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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많은 여인의 고백
최고관리자 0 3,204 06.11 11:03

야설:죽고 싶은 마음만은 꿀떡 같지만 산다는 것이 무엇인지는 모르지만 그 삶의 끄나풀을 차마 놓지 못 하여 근근히 숨을 쉬며 살아가는 가냘픈 한 여인의 고백을 들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제 나이 이제 겨우 사십이 조금 지난 나이입니다.


지금 제가 차마 죽지 못 하고 힘들게 겨우겨우 살아가는 이유는 죄 없이 제 뱃속에서 살아가고 있으며 몇 달 후면 햇빛을 보게 될 것이며 답답하지만 그래도 쉬어야 할 공기를 마주하게 될 갓난아기 때문에 차마 목숨을 끊지 못 하고 한숨으로 나날을 보내며 살아가고 있는 이 세상에서도 아마 가장 한이 많은 한 여자로 살아가고 있습니다.


제 뱃속의 아기가 남들 아기처럼 정상적인 성 생활에 의하여 가져진 아기라면 제가 왜 한 많은 여자라고 하겠습니까.


그런데 지금 제 뱃속의 아기 아빠는 남도 아닌 제 보지구멍으로 낳은 제 아들의 아기이기 때문입니다.


물론 이미 오래 전부터 아들과 육체적인 관계를 가져왔지만 최근에 군대에서 제대를 한 아들은 저에게 말을 하지도 않고 콘돔을 사용하여 피임을 하는 것처럼 하고 저와 육체관계를 가졌었으나 아들이 군대에서 제대를 하고 육체관계를 다시 시작하고 두 달이 겨우 지나 제 몸의 변화가 오고 헛구역질이 나와 이상하다는 생각을 하였지만 별반 의심을 하지 않았었으니 어미인 저의 헛구역질을 하는 모습을 발견한 아들은 환호를 지르며 콘돔에 구멍을 내어 엄마인 저에게 임신을 시킨 사실을 말하였고 혹시나 하여 산부인과를 찾은 저는 의사선생님으로부터 청천벽력과 같은 임신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어버렸고 유산을 시키려고 하였지만 아들은 유산을 시키면 제 곁에서 영원히 사라져 버리겠다는 청천벽력 같은 협박에 차마 유산을 하지 못 하고 어쩔 수가 없이 집도 팔고 가게도 처분을 하였고 아들도 다니던 대학의 학업도 중단을 하고 우리 모자하고 전혀 인연이 없는 지금 사는 곳으로 이사를 왔고 주변에 사는 사람들은 우리 모자 사이를 모자지간으로 인지를 하지 못 하고 그냥 젊은 놈에게 반하여 유혹을 하여 같이 붙어먹고 사는 불윤 관계로만 알기에 그럭저럭 살아가고 있는 그런 형편이며 아들은 지금 저 대신에 앞에서 살던 곳에서 하던 고기 집을 다시 하기 위하여 창업 준비를 하고 있고 저는 부른 배를 가진 임산부이지만 아들의 창업을 돕기 위하여 동분서주를 하고 있습니다. 


 


그런 지금부터 저의 불행하였고 지금까지도 불행하게 살고 있는 저의 이야기 모든 것을 낱낱이 한 치의 거짓도 없이 여러분들 앞에서 고백을 하겠습니다.


 


저는 세상에 태어난 그 자체부터가 불행의 시작이었습니다.


엄마는 저를 걸리고 동생을 업고 다니면서 장돌뱅이 인생을 살고 있다는 것을 알았을 때는 제가 국민 학교에 입학을 하기 훨씬 오래 전의 일입니다.


물론 집도 있었고 아빠도 계셨습니다.


집은 두메산골의 허물어져가는 외진 집이었고 산자락 밑에 있는 몇 마지기의 밭도 있었고 아빠고 그 밭에 농사를 지으면서 힘들게 마나 근근이 입에 풀칠을 하는 그런 형편이었습니다.


그린 우리 집에 우환이 시작이 된 것은 제가 국민 학교에 입학하기 직전 부터였습니다.


우리가 살던 두메산골에 놀음쟁이들이 들락거리면서 부터였습니다.


아빠를 비롯한 많은 남자들이 그 놀음쟁이들의 꼬드김에 빠져들었고 아빠는 몇 마지기의 밭을 날려먹고는 알코올 중독자가 되어버린 것입니다.


전 재산이나 다름이 없는 밭을 놀음쟁이들의 손에 의하여 날려버린 아빠는 할 일이 없게 되었고 유일한 소일거리라고는 엄마가 장을 돌면서 벌어온 돈을 거의 강제로 빼앗다시피 하여 읍내로 내려가 진종일 술집에서 노닥거리는 것이 일과였고 아예 집에 들어오지 않는 날이 더 많아 지기 시작하였습니다.


 


거기다가 또 하나의 변화는 제가 국민 학교에 입학을 하고부터는 동생을 집에 남겨두고 엄마가 장에 나가셨다는 것입니다.


그건 저에게 엄청난 무언가를 알게 한 계기가 되었습니다.


저보다 겨우 한 살이 적은 남동생은 학생이 아니면서도 저를 따라 학교로 놀러왔고 거기서 형들에게 무서운 것을 배우고 만 것입니다.


 


누구인지는 모르지만 어떤 형들로부터 요즌 흔히 하는 시쳇말로 빠구리라는 것에 대한 이야기를 들었었고 자세한 것은 몰랐지만 고추를 여자 고추에 대고 비비고 문지르는 것이라는 정도를 알게 되었고 학교를 가지 않는 일요일의 경우 아빠가 집에 없고 엄마가 장에 간다고 집에서 나가면 동생은 저에게 사리마다를 (팬티의 일본식 말임)벗게 하고는 자기의 고추를 저의 고추에 대고 마구 문지르기도 하고 비비기도 하였습니다.


 


그게 무엇을 말하는 것인지 도통 모르는 저에게 하나의 변화가 생겼습니다.


처음에는 간지럽기만 하였지만 회를 거듭 할수록 묘한 느낌이 생겼고 그 묘한 느낌은 제 고추로부터 이상한 물이 나오도록 하였으며 그 물이 동생의 고추에 뭍어 제 고초에 대고 문지르면 그 기분은 더 묘한 기분이 되는 것이었습니다.


묘한 기분에 빠져든 저는 제게 되리 먼저 동생하고 하자고 하는 경우가 늘었습니다.


물론 동생의 고추가 제 보지구멍에 박힌 적은 다행이 없었습니다.


 


하지만 한 번인가 박힐 뻔한 경우는 있었습니다.


그날은 평소바다도 훨씬 많은 물이 제 고추에서 나왔고 동생의 고추에 묻어 동생이 조금만 움직여도 동생의 고추는 제 고추의 갈라진 끝에서부터 끝까지 오르락내리락 할 정도였습니다.


그런데 갑자기 제 고추에서 알 수가 없는 통증이 느껴졌고 깜작 놀란 저는 동생의 가슴을 크게 밀치며 엉덩이를 돌려 지금 생각하면 동생의 고추가 제 고추에 박히는 것을 겨우 모면한 셈이었습니다.


그런 일이 있고부터는 저도 조심을 하였고 동생도 조심을 하였습니다.


 


그리고 이학년에 올라가서 얼마 안 되던 날 우리의 그런 짓을 마감을 해야 하는 사건이 터지고 말았습니다.


엄마가 장에 간다고 나가자마자 동생이 저에게 옷을 벗으라고 하였고 미치 기다리고 있던 저는 동생의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사리마다를 벗었고 동생도 옷을 벗자마자 제 몸 위로 몸을 포개고는 고추를 제 고추에 데고 문지르기 시작하려고 하는 순간 장에 간가도 나갔던 엄마가 나타났고 사실인 즉은 제가 먼저 (첫 번째부터)시작을 하자고 한 것도 아니었지만 누나라는 것 때문에 모든 덤터기는 제가 써야 하였으면 거의 다리몽둥이가 부러지지 않을 정도로 맞아야 하였고 동생 역시도 저보다는 적게 맞았지만 동생도 다리몽둥이가 퉁퉁 붙도록 맞아야만 하였고 그 후 동생과 저의 그런 놀이는 다시 한 경우는 없었습니다.


 


그렇게 엄마에게 발각이 되고 사흘이 지나서인가 엄마가 장에서 오더니 동생에게 밖으로 나가라고 하고는 저에게 사리마다를 벗고 누우라고 하여 누웠더니 제 가랑이를 벌리게 하고 고추 금을 벌리더니 안도의 숨을 쉬며 다시는 그런 짓을 하지 말라고 신신당부를 하였고 그 검사가 동생과 제가 하던 놀이 중에 저의 처녀막이 뚫렸는지 보려는 검사였다는 것을 알게 된 것은 한참 후의 일이었고 엄마가 안도의 숨을 쉰 것도 저의 처녀막이 온전하게 있다는 것을 알고 쉰 것이라는 것 역시 한참 후의 일이었습니다.


 


못 사는 집에서 태어났지만 공부는 아주 잘 하였습니다.


육학년 때 담임선생님은 물론이고 교장선생님까지 엄마를 학교로 오게 하여 인근의 도회지 중학교에 보내라고 권하였을 정도였으니 말입니다.


하지만 가정 형편은 녹녹하지 못 하여 엄마가 중학교에 보내기에는 아주 무리였고 저는 집에 있으면서 이웃집에서 불러주면 아기를 봐 준다든지 아니면 설거지나 빨래를 거들어 약간의 곡물이나 돈을 얻었습니다.


 


열다섯이 되던 해 초의 일입니다.


우리 마을 뒷산에는 제법 알아주는 사찰이 있었고 초하루며 보름 그리고 부터님 오신 날의 경우 절이 미어터질 정도로 많는 신도들이 찾았습니다.


아마 그날이 정읠 대보름날이었을 것입니다.


한 아주머니가 우리 집 앞을 지나가다 말고 마당에서 손을 호호 불어가며 빨래를 하고 있던 저를 발견하고 들어오시더니 나이와 학년을 물으시기에 열다섯이고 학교는 다니지 않는다고 말하자 학교에 가고 싶은 마음은 없느냐고 물으시기에 가고 싶지만 형편이 안 된다고 말하자 엄마가 어디에 있느냐고 물으시기에 00장에서 무슨 장사를 하고 있고 옷은 어떤 옷을 입었다고 자세히 말하자 알겠다고 하시며 가셨고 그날 저녁 장에서 돌아온 엄마가 도시로 나가 식모살이를 하면서 중학교에 보내주겠다는 분이 계셨는데 어떠냐고 물으시기에 저는 환호를 하며 가겠다고 하였고 몇 칠 후 그 아주머니가 다시 우리 집으로 왔고 저는 그 아주머니를 따라 도시로 나갔습니다.


 


그 아주머니의 집은 도심에서 조금을 떨어진 고택이었고 제 눈에는 마치 궁궐 같은 생각이 들 정도로 화려하였습니다.


식구라고는 아주머니의 남편과 저보다 한 살이 많은 아들 이렇게 셋이서 살고 있었습니다.


아주머니의 남편은 공무원이었습니다.


요즘이야 공무원이란 직업이 중견기업 뺨 칠 정도의 봉급과 다우는 받지만 당시에는 아주 급여와 대우가 열악하여 급여에 의지하는 것이라기보다는 촌지로 살아갔고 매달 아니 거의 매일 봉투에 과일바구니나 기타 선물을 한 아름씩 가져 왔고 이삼일에 한 번 꼴로 아저씨의 남방에는 아주머니가 바르지도 않는 립스틱 자국을 묻혀서 들어오는 경우가 있었지만 (식모로서 빨래를 하면서 자주 발견하였음)아주머니는 모른 척 하였고 아저씨에게 가난하여도 좋으니 촌지를 그만 받으라고 사정을 할 정도였습니다.


 


저는 아주머니를 따라 온 그 다음 날 인근의 중학교로 찾아갔고 아주머니가 오전에만 수업을 받게 하는 조건으로 입학을 허락받았습니다. (사립이고 아주머니의 아저씨가 공무원이었기에 가능하였을 것임)


 


엄마하고 살 때는 단칸방이라 엄마와 저 그리고 동생이 함께 자고 기거를 하였으나 식모를 살러 오고부터 저에게는 저만의 방이 새로 생겼습니다.


식모를 살러 갔던 집은 집이 본채와 사랑채로 나뉘어 져 있었습니다.


본채에는 아주머니 부부의 침실이 큰방과 아저씨의 서재로 쓰이는 서재가 따로 있었고 당시로는 드물게 아주머니가 사용하는 옷 방을 겸한 화장대가 놓인 방이 따로 있었으며 아들의 방도 우리가 살던 방에 비하면 다섯 배 이상 큰방이었습니다.


그리고 대문 옆에 자리한 반 항 칸짜리의 사랑채가 있었고 그 방이 제가 사용하게 된 방이었고 그 방에는 책상이며 옷장과 (가지고 간 옷은 거의 없었지만)저를 비롯한 엄마와 동생이 함게 뒹굴어도 될 정도로 넓은 방이었습니다.


하지만 불행은 그 집에 식모로 들어가고 겨우 일주일 만에 발생을 하고 말았습니다.


열두시가 거의 다 되어 갈 무렵 제가 기거하는 방의 봉창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렸습니다.


주인아저씨의 조용히 하고 문을 열라는 목소리와 함께 말입니다.


대문을 소리 없이 열어주자 아저씨는 저에게 조용히 하라고 하더니 저를 데리고 제 방으로 들어갔고 그리고 아저씨의 신발도 들고와 문 앞에 놓았습니다.


그러더니 제가 잠을 자기 위하여 펴 놓은 이불 속으로 들어가며 저의 팔을 잡아당기며 한 손으로는 검지로 자신의 입을 가리며 조용히 하라는 표시를 하였고 주인아저씨의 말을 무시 할 수가 없는 저는 이불 속으로 들어갔고 들어가자마자 아저씨의 손이 제 하복부에 닿는가 싶더니 주인아주머니가 제 생애 최초로 사준 파자마 안으로 들어왔고 세상에 태어나서 오로지 남동생의 손길과 엄마의 손길만이 닿았던 제 보지둔덕에 손바닥을 올리더니 가쁜 숨을 몰아쉬며 말만 잘 들으면 호강을 하게 된다고 속삭이더니 저의 손을 당겨 무언가를 쥐어 주었고 잠시 후 제 손에 쥐어진 것이 동생이 제 고추에 다고 문지르고 비볐던 어른들의 고추 즉 좆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고 자가 만져보고 제 고추에 대고 문지르고 비비던 남동생의 고추와는 전혀 길이는 물론이고 굵기 마저 전혀 다른 어른들의 좆이라는 것을 알고 무서움에 떨었지만 차마 고함을 지르거나 반항을 할 입장은 아니었습니다.


 


두려움과 무서움에 떠는 사이 술 냄새를 풍기는 아저씨의 입술을 제 입술을 덮쳤고 반항을 할 틈도 없이 저의 파자마는 벗겨졌고 아저씨의 술 냄새를 풍기는 혀가 제 입안으로 들어오자 저도 모르게 빨고 있는 틈에 아저씨도 알몸이 되어 제 몸 위에 포개어졌고 남동생이 하였듯이 주인아저씨의 좆이 제 보지둔덕에 닿았고 그리고 금이 멀어지는가 싶더니 주인아저씨의 좆 끝이 동생의 좆이 하였던 것처럼 금을 따라 상하로 이동을 하는가 싶더니 남동생의 고추에 의하여 악간 느꼈었던 적이 있었던 통증이 생기는가 싶더니 엄청난 통증과 함께 아랫배가 더부룩한 느낌이 들었고 그때서야 저는 주인아저씨의 좆이 제 보지구멍 안으로 들어왔다는 사실을 알았지만 저로서는 어떻게 할 방법도 없이 아저씨가 하는 대로 몸을 맡겨야만 하였습니다.


요즘이야 초등학생들도 빠구리라고 하여 하는 경우가 허다하다고 하지만 당시로서는 겨우 열다섯 살의 나이로 아빠보다 훨씬 나이가 많은 주인아저씨의 좆에 의하여 저의 처녀막을 허무하게 뚫리고 말았던 것입니다.


 


그날부터 거의 한 달 동안 주인아저씨가 늦게 집으로 오는 날이면 당연하다는 듯이 저는 주인아저씨의 좆을 보지구멍을 받아들여야 하였고 또 좆 물도 받아들여야만 하였습니다.


물론 아무런 대가가 없었던 것은 아닙니다.


지금이야 오천 원 하면 아이들 껌 값에 불과 한 돈이지만 당시에 오천 원 하면 어마어마하게 큰돈이었고 주인아저씨는 제 보지구멍에 자신의 분신인 좆 물을 싸는 날이면 어김없이 오천 원을 제 머리맡에 두고 나갔습니다.


 


그런데 한 달이 조금 지나 더 큰 문제가 생기고 말았습니다.


주인집 아들이 학교 도서관에서 공부를 하다가 늦게 집에 돌아 왔고 저는 주인아저씨의 좆을 받아 들이 보지구멍으로 그 주인아저씨의 아들 좆을 받아들이고 만 것입니다.


그로부터 거의 보름 이상을 저는 하교를 한 주인 아들의 좆을 받아들이고 밤이면 밤늦게 집으로 오는 주인아저씨의 좆을 받아들여야 하였습니다.


보름이 조금 지난 어느 날 주인 아들의 좆을 보지구멍으로 받아들이고 있으면서 봉창 틈으로 방안을 훔쳐보는 눈 하나를 발견하였고 그 눈의 주인공이 다름이 아닌 주인아저씨의 눈이라는 것을 단박에 알았습니다.


동시에 아들의 좆이 박히는 식모의 보지구멍에 좆을 박는 다는 것이 윤리적으로 허락을 하지 않았던지 주인아저씨는 저의 봉창을 두드리지 않았고 저와 마주치며 공부에 지장을 안 주도록 주의를 하라는 말만하고 자리를 피하였습니다.


 


주인아저씨의 경우 성에 대한 지식이 많아 안에 싸야 할 때만 싸고 나이면 콘돔을 끼고 하였지만 주인 아들의 경우 저보다 겨우 한 살이 많은 까까머리 학생이라 성에 다한 지식이 거의 전무하였고 할 때마다 보지구멍 안에 쌌습니다.


그 결과는 뻔한 것이 아닙니까.


겨우 중학교 일학년에 열다섯 살의 나이로 저는 임신을 하고 만 것입니다.


그것도 배가 불러오면서 주인아주머니에 의하여 임신을 하게 되었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저의 배가 불러오자 이상하게 여긴 주인아주머니가 저를 불러 앉히고 다그쳤고 저는 주인아저씨의 일부터 낱낱이 고백을 해야만 하였고 주인아주머니의 손에 끌려 산부인과에 갔을 때는 이미 임신 육 개월이라는 진단을 받았고 그 소식은 주인아저씨의 어머니 귀에까지 들어갔고 오대 독자인 손자의 아들을 임신하였다는 말에 주인아저씨의 어머니는 며느린인 주인아주머니에게 유산을 시키지 말고 낳게 하라는 엄명을 받자 당혹해 하면서도 시어머니의 말슴을 무시를 하지 못 하여 저에게 자기 손자를 낳아 달라고 당부를 하였고 유산을 시키려면 수파수술을 받아야 한다는 말이 수술 그 자체가 싫어서 저는 낳겠다고 하였고 배에 복대를 하여 가며 학교에 다녔고 이듬 해 초여름에 아들을 낳고 말았습니다.


 


식모에서 졸지에 며느리가 되어버린 것입니다.


중학교 이학년이면서 겨우 열여섯의 나이로 말입니다.


거처도 사랑채에서 주인 아들의 방 아니 결혼식만 안 하였다 뿐이지 남편의 방으로 옮겼습니다.


그렇게 되자 가장 어색해 한 것은 주인아저씨에서 시아버지로 변한 분이었습니다.


그건 시아버지에게 많은 변화를 주었습니다.


하루하루를 죄책감에 시달리기 시작을 한 것입니다.


그 죄책감은 시아버지에게 술을 들게 만들었고 결국 알코올 중독으로 공무원 자리도 사표를 써야 하였습니다.


엄청난 부를 누리던 집도 가장이 흔들이기 시작하자 아무런 쓸모가 없었고 점점 몰락의 길로 갔습니다.


결국 제 남편이 대학에 입학을 하기 몇 달 전 제 남편은 시아버지의 술주정으로 자신의 아내가 며느리가 되어버린 시아버지와 자기와 육체관계를 가지기 전에 이미 제가 관계를 가졌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고 그 결과는 엄청난 사건을 만들고 말았으니 저와 자신의 아들을 남겨두고 자살이라는 극한적인 선택을 하도록 만들고 말았습니다.


뿐만 아닙니다.


자신의 실수로 인하여 아들이 자살을 하였다는 사실을 안 시아버지도 극한 선택을 하였고 시어머니까지도 같은 선택을 하고 말았습니다.


면사포 한 번 써 보지도 못 하고 저는 졸지에 과부가 되어버린 것입니다.


거기다가 손자의 자살 아들의 자사 그리고 연이은 며느리의 자살은 시할머니에게도 화병을 가져다 드렸고 증손자인 제 아들이 초등학교 입학을 하기 전 해에 세상을 버리고 말았습니다.


 


한편 저는 아들을 낳았지만 학구열은 대단하였습니다.


아들을 출산을 하고도 시어머니에게 아이를 맡기고 학교에 다녔고 아기에게 먹여야 할 퉁퉁 불은 젖을 선생님이나 친구들 몰래 화장실에 앉아서 짜서 버려야 하였지만 공부는 선두에서 물러나지를 않았습니다.


중학교 졸업식 때 학교장 상이 아니라 교육감 상을 받았을 정도였으니 말입니다.


그리고 남편의 자살과 연이은 시아버지 이어머니의 자살에도 슬픔을 딛고 저는 공부를 계속하였습니다.


물론 죽은 남편하고 제가 혼인신고를 해도 가능한 나이가 되었을 때 친정엄마의 요청으로 시어머니께서 제 남편의 동의하에 남편과 혼인신고를 해 둔 덕에 시아버지의 많은 재산이 남은 것은 아니지만 생활을 하기에는 부족할 정도가 아닌 재산을 모조리 저에게 상속이 되어서 공부를 계속하며 아들과 살기에는 불편함이 없었습니다.


 


그런데 저는 남편과 시아버지 그리고 시어머님의 자살이 저 때문에 발생을 한 일이라고 생각을 한 저는 참회록을 쓰기 시작하였습니다.


그렇게 쓰기 시작한 참회록이 큰 문제의 발단이 될 줄은 전혀 몰랐었습니다.


공부를 하다가 싫증이 나면 참회록을 쓰면서 학구열을 살렸고 또 공부가 하기 싫으면 참회록을 쓰면서 학구열을 살렸습니다.


고등학교를 졸업하던 해에는 거의 노트 한 권을 채었고 대학에 입학을 하여 두 권 째 노트에 참회록을 쓰기 시작하였습니다.


대학을 졸업하였을 때는 두 권의 참회록으로 저의 참회록이 완전하게 완성이 되었고 그 누구에게도 보이지 않을 곳에 소중하게 감추었습니다.


그리고 저는 저 자신도 그 참회록에 대한 것을 모조리 잊어버리고 취업 대신 시아버지가 남겨주신 재산을 밑천으로 삼아 요식업에 뛰어들었습니다.


 


요식업을 시작한 장소는 시아버지가 물려주신 고택에서 시작하였습니다.


분채와 사랑채로 나누어져있던 고택의 시아버지 내외께서 기거를 하시던 큰방과 시아버지의 서재 시어머니가 사용하는 옷 방을 겸한 화장대가 놓인 방 그리고 남편과 살던 방으로만은 고기 집을 하기에는 협소하였고 그렇다고 시아버지가 사시던 집을 허물고 다시 짓기도 뭐하여 궁리 끝에 얻은 결론은 고택을 고택 전문 이전 업자에게 부탁을 하여 사랑채를 없애고 앞으로 당겨 이전을 한 후에 본채 뒤편에 본채와 어울리게 이층 건물을 지어서 일부는 주방으로 사용하고 나머지를 홀로 사용하였고 이층을 살림집으로 하려다가는 주변의 조언에 따라 아예 도심 끝자락에 지어진 아파트를 하나 매임을 하여 거기로 이사를 하고 이층에도 손님을 받기로 하였습니다.


 


건물이 완공이 되기 시작을 한 저희 식당은 막 외식산업이 호황기에 접어 들 때라 날로 번창을 하여 시쳇말로 돈을 갈퀴로 끌어 담는 그런 수준이었고 저의 아들 기영이도 제 머리를 닮았던지 공부도 잘하여 서는 그야말로 하루하루가 신바람이 났습니다.


요즘이야 주 5일 근무가 기본이라 금요일 저녁에 술집의 장사가 제일 잘 되는 날이지만 당시에는 토요일 저녁이면 발을 디딜 틈이 없을 정도로 손님이 많았습니다.


그게 제 나이 26살이었고 제 아들 기영이 나이 불과 11살 때의 일이었습니다.


 


여자 혼자의 몸으로 가게를 운영하기가 힘들다는 판단이 서자 저는 저를 돕던 친정의 유일한 남동생을 중매를 하여 일찍 결혼을 시켰고 그리고 올케와 함께 우리 가게에 와서 일을 하도록 하였습니다.


제가 남동생을 일찍 결혼을 시킨 후에야 저의 사업에 동참을 하도록 한 이유도 있었습니다.


고기 집이라는 것이 그렇지 않습니까.


말이 고기 집이지 술집이나 마찬가지이고 술이라는 것이 들어가게 되면 이성을 잃게 마련입니다.


처음부터 남동생이 저의 가게에서 일을 하였고 일을 마치거나 종업원들끼리 회식을 할라치면 남동생은 은근히 예전의 일을 저에게 이야기하며 그때가 즐거웠었다는 투로 말하며 은근히 육체관계 가졌으면 하는 마음을 가지고 있었기에 저는 남동생을 일직 결혼을 시키지 않게 된다면 어떤 사고가 발생을 할지 모른다는 판단을 서게 하였고 결국 제가 이겨서 남동생을 결혼을 시켰고 그리고 올케하고 같이 제 가게에서 일을 하도록 만들었던 것입니다.


그렇게 조신을 하며 살던 저에게 제 나이 32살 그리고 아들 기영이 나이 17살에 생각지도 않은 사건이 발생을 하고 만 것입니다.


 


그날은 미리 예고를 하였던 종업원들과의 월례 회식을 하는 날이라 저는 승용차를 타지 않고 택시를 타고 가게로 출근을 하였습니다.


그리고 열시가 되자 영업을 마감하고 단출하게 회식 자리를 마련하였고 회식을 한 것까지는 아무 일도 없었습니다.


식당을 운영하지만 혼자 사는 여자에게 낙이 뭐가 있겠습니까?


아들이 성장하는 것을 지켜보는 것이 유일한 낙이라면 또 하나의 낙은 술을 마시는 것이었습니다.


솔직하게 표현을 하여 좆 맛에 확실하게 길 들여져 있지는 않았지만 밤이 되면 생각이 나는 것이 섹스였고 그 성욕을 참기 위한 가장 좋은 수단을 술에 취하여 뻗어버리는 것이었습니다.


홧김에 서방질 한다는 말이 있죠?


청상과부에게 회식 자리는 마음을 놓고 술을 마시게 하는 그런 날이라 거의 홧김에 서방질을 하는 것이나 대동소이하였습니다.


 


“ 뭐야 무거워 ” 어떻게 집에 왔는지도 모를 일이었습니다.


하지만 몸이 무겁다는 느낌이 들었고 제 보지구멍에 무언가가 박힌 그런 느낌이 들어 누구인지도 모르고 가슴을 밀치며 겨우 말을 하며 눈을 떴습니다.


“ 후후후 엄마 어때? ” 눈에 어렴풋이 남자의 얼굴이 보였지만 그게 아들 기영이라는 것을 알게 된 것은 기영이가 엄마 어때 라고 물었을 때입니다.


“ 기영아! 난 엄마야 ” 아들의 가슴을 밀치며 말하자


“ 후후후 왜? 외삼촌하고는 거의 빠구리 비슷하게 하였고 할아버지하고는 완전하게 했고 한 달이 지나서는 아빠의 좆을 받아들인 이 보지구멍에 아들인 내 좆은 받아들이기 싫다는 말이야 ” 기영이가 저를 내려다보며 말하면서 한손에 들고 있던 노트를 흔들었고 그때서야 저는 아들 기영이 손에 들려있던 것이 제가 쓴 참회록이란 것을 알고는 할 말을 잃어버리고 말았습니다.


 


“ 후후후 이제 할아버지는 물론이고 아빠도 없으니 이 보지구멍은 내 전용을 하면 어때 이유 없지? 이유가 있다면 이걸 복사를 하든지 아니면 워드로 쳐서 컴퓨터에 올려 개망신을 줄 거야! 어때 선택을 해 개망신이야? 아님 내 전속 보지구멍이야? ” 아들 기영이가 천천히 펌프질을 하며 물었습니다.


“ 흑흑흑 비밀만 지켜줘 응 부탁이야 알았지? ” 저는 아들 밑에 깔려서 보지구멍으로 아들의 좆을 느끼며 애원을 해야 하였습니다.


“ 후후후 좋아 앞으로 낮에는 엄마와 아들이지만 밤이면 남편과 마누라 사이가 되는 거야 알았어? 마누라 ” 기영이가 어미인 내 볼을 툭툭 치며 물었고


“ 응 ” 하고 대답을 하자 


“ 어허 하늘같은 남편에게 응이라니, 다시 알았어? 마누라 ” 하고 묻기에


“ 여.......보 알.......았........어.......요. ” 하고 더듬으며 대답하자


“ 다시 알았어? ” 하고 묻기에


“ 여보 알았어요. ” 하고 대답을 하였습니다.


그리고 그 다음날부터 술로 잠을 청하던 저는 아들 기영이의 좆으로 잠을 청하기 시작하였고 처음에는 서툴기만 하던 펌프질도 점점 요령이 생겼고 저 역시 아들의 좆 맛에 길들여지기 시작하였습니다.


 


고등학교를 졸업을 하고 대학에 다니면서도 거의 매일 기영이는 엄마인 제 보지를 즐겁게 해 주었습니다.


대학 일 년을 다니다가 휴학을 하고 군대에 입대를 하자 저는 거의 한 달에 두 번꼴로 아들에게 면회라는 핑계를 대며 부대로 찾아가서 아들의 좆을 느끼고 돌아와야 하였습니다.


시쳇말로 늦게 배운 도둑질 날 새는 줄 모른다고 말입니다.


아들 기영이는 작년 늦여름에 제대를 하였습니다.


저의 평소의 말대로 피임을 하고 관계를 가졌습니다.


가을에 복학을 하고도 거의 매일 밤 기영이는 제 몸을 찾았고 저는 감사하는 마음으로 기영이 좆을 기영이가 나왔던 보지구멍으로 맞이하였습니다.


저는 기영이가 콘돔을 끼고 하는 것을 좋아 하였습니다.


 


물론 노원도 사용을 하여 보았지만 보지구멍으로 느껴지는 이물감이 싫었고 제가 가장 좋아하는 기영기가 보지를 빨아주는 것인데 노원을 용하고 빠구리를 하다 말고 기영이 사정을 늦추기 위하여 기영이 더러 보지를 빨아 달라고 하면 싫어하기에 사용하기 싫었고 또 먹는 피임약을 복용도 하였지만 저에게 맞지 않아 부작용이 생겨서 먹는 피임약도 먹지를 못 하고 작은 노원에도 이물감을 느껴서 싫어하는 저에게 루프 피임법은 더더욱 싫기에 가장 선호하는 피임법이 콘돔을 끼고 하는 것이 가장 안전하다고 생각을 하였던 것입니다.


그게 저의 판단 미스라고 느낀 것은 어느 날 갑자기 헛구역질이 나오자 기영이에게 물었더니 저의 몸을 빌려 자기 아이를 낳게 하려고 콘돔에 바늘구멍을 나였다고 하면서 환호를 하였습니다.


놀란 나머지 아침에 가게 문을 여는 것도 남동생에게 부탁을 하고 산부인과에 갔더니 진찰 결과 확실한 임신이라고 의사선생님이 말하였습니다.


그길로 기영이를 집에 있게 하고 달려가 애원을 하였더니 기영이는 저에게 협박 아닌 협박을 하였습니다.


유산을 시킬 경우 저의 곁에서 영원히 사라질 것이라고 말입니다.


저는 아들에게 굴복을 하고 말았습니다.


 


시아버지에게 물려받은 고택의 가게를 남동생에게 헐값에 넘기고 아들과 소리 소문 없이 사라지기로 말입니다.


거기를 떠나오면서도 저는 남동생에게도 행선지를 가르쳐주지 않았습니다.


저와 아들 기영이에게 아무런 연고가 없는 지금 사는 곳으로 숨어들었고 인근의 유명하다는 철학관을 찾아가 저와 기영이 사주를 주고 궁합을 보고는 저는 다시 한 번 더 놀라고 말았습니다.


그 철학관의 사주를 보는 사람은 자기 생전에 이렇게 금실이 좋은 궁합은 본 적이 없다고 하면서 놀라운 말을 하였습니다.


금실은 천하에 없을 정도로 좋지만 결혼을 하고 살 사이는 절대 아니고 영원히 동거생활로 만족을 하여야만 한다고 말입니다.


마치 기영이와 제가 모자사이라는 것을 알기라도 하듯이 말입니다.


하지만 철학관의 말 믿을 수가 없었습니다.


결국 세 군데를 더 다녔으나 매번 대답은 거짓말 같이 똑 같았습니다.


같은 책 혹은 같은 스승 밑에서 공부를 하여 꼭 같은 점괘가 나온 것이 아나가 하는 희심이 생겼습니다. 


이번에는 무당의 점집을 찾아갔습니다.


대기 손님이 엄청 많았었습니다.


처음 같던 날은 무당 코 끝도 보지 못 하고 번호표만 받고 돌아왔습니다.


다음 날 첫 번째로 용하다는 무당 앞에 가기가 무섭게 무당을 일갈 하였습니다.


되도 않은 아이 낳으려고 한다고 말입니다.


자신이 모시는 신 앞에 절을 하라고 하였습니다.


얼떨결에 절을 하자 절을 하는 동안 그 무당은 나무에 달린 방울로 제 몸 위에 대고 천천히 흔들면서 신령님 붙어먹어서는 안 될 놈하고 붙어먹은 불쌍한 년을 굽어 살피소서 하고 말을 하더니 갑자기 빠르게 방울을 흔들면서 우리 신령님이 뱃손의 아기 때문에 노하심을 푸셨다고 하면서 알콩달콩 잘 살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그런 말을 들은 저는 혹시나 하여 다른 무당에게도 찾아 갔으나 그들도 마치 앞에 만났던 무당처럼 제가 붙어먹어서는 알 될 아들하고 붙어먹어 아이를 가진 것은 훤히 안 다는 듯이 이야기를 하였고 역시 뱃속의 아기가 저로하여금 아들하고 함께 살면서 아들을 남편으로 모시고 살 팔자임은 넌지시 말하여 주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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