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동 쉽게 보기 : 동국비사 - 東國秘史- 1

한국미녀
동국비사 - 東國秘史- 1
밍키넷 0 4,302 2023.08.21 13:49
동국비사 - 東國秘史 



"전하." 

하나 예쁠 것 없을 후궁의 젖무덤에 얼굴을 파묻고 음탕한 유희를 즐기던 소열왕(昭熱王) 
제(劑)는 이 낮익은 목소리에 흠칫 놀라 고개를 들었다. 함빡 달아오른 후궁이 콧소리를 내며 
그의 팔에 엉겨붙었다. 소열왕은 자신을 부른 목소리의 주인공이 하나뿐인 친동생, 
영흥태수(永興太守) 소하군(昭河君) 류(流)임을 알자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후궁의 허리를 한 
팔로 휘어감았다. 소하군 류는 적군의 피가 채 굳지도 않은 투구를 벗어 자신의 존재 자체를 
깨끗이 무시하고 있는 황제에게 공손히 신하의 예를 표하였다. 그의 새하얀 얼굴이 은제로 
장식된 건룡당(-왕이 머무는 숙소)의 빛을 받아 파리하게 빛나고 있었다.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 여인과 운우의 정을 나누면서도 소열왕은 자꾸만 류가 부복해 있는 
방향으로 눈길을 돌렸다. 외면이라도 하면 좋으련만. 그는 요지부동이었다. 후궁의 교성이 
건룡당을 울렸다. 소열왕은 신경질적으로 그녀를 밀치며 바닥에 흩어진 곤룡포를 대충 어깨에 
걸쳤다. 

"오랜만이구나 류. 그래, 전장은 어떠했더냐." 
"폐하의 보살핌에 적군을 물리치고 무사히 귀환했나이다." 

류의 목소리는 여전히 차분했다. 덩달아 소열왕의 마음도 조금씩 가라앉는 느낌이었다. 
아무래도 상관 없을 이복형제들이 왕위를 호시탐탐 노리는 가운데 이런 충성스런 친동생이자 
명신이 곁에 있다는 사실이 그에게 얼마나 힘이 될른지. 
후궁이 찍소리도 못하고 물러나자 비로소 류가 고개를 들었다. 파리한 얼굴에 엷은 상처가 
도드라졌다. 소열왕은 눈살을 찌푸리며 그의 뺨을 흘낏 쳐다보았다. 류는 입가에 엷은 미소를 
띄우며 다시 고개를 숙였다. 

"별것 아닌 상처이옵니다. 심려치 마시옵소서." 
"그래. 피곤할 터이니 이만 물러가거라." 

짜증섞인 목소리였다. 하지만 류는 다시한번 공손히 절을 하고 천천히 건룡당의 문을 열었다. 
하얀 창호가 발린 문설주 밖으로 그의 어른어른한 그림자가 한참이나 일렁였다. 소열왕은 못내 
편치 못한 마음으로 그 뒷모습을 지켜보았다. 그리고는 밖에 서 있을 지밀상궁을 향해 
가시돋힌 목소리로 소리질렀다. 

"서아(恕兒)를 불러오거라!" 



* 



류는 건룡당을 나선 뒤에도 한참동안 그 앞을 벗어나지 못하였다. 이번 전장에서 그는 무수히 
많은 반란군들과 마주쳤었다. 그들의 목소리는 한결같았다. 타락한 왕을 끌어내고 좀 더 
살기좋은 세상을 만들고 싶다… 
처음에, 류는 그들의 말을 부정했었다. 아니, 부정하고 싶었다. 그러나 서서히 이 반란군들에게 
동조해가는 부하들을 보며 안타까움과 함께, 형님이자 주군인 소열왕에 대한 서글픔이 
솟아오르는 것이었다. 
그리고 오늘, 소열왕의 이러한 모습을 처음으로 면전에서 목격하였다. 단아한 그의 얼굴에 짙은 
슬픔이 장막처럼 드리워졌다. 그리고 들려오는 소열왕의 옥음. 
서아는 또 어느 후궁의 이름이던가. 지밀상궁이 당혹스럽다는 눈빛으로 류를 흘낏 쳐다보았다. 
류는 직감적으로 황제가 부르는 '서아'라는 이가 정상적인 후궁이 아님을 알아 챌 수 있었다. 
차라리, 보지 않음이 나으리라.. 그는 지밀상궁에게 살짝 고개를 숙인 뒤 건룡당 밖으로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조금전 지밀상궁이 서아를 데려오라 지시했던 궁녀가 쏜살같이 튀어오는 게 보였다. 그리고 
그녀의 뒤로 계집처럼 예쁘게 치장을 한 곱상한 소년 하나가 종종걸음으로 뛰어오고 있었다. 
왜 궁궐 내에 저런 아이가 있을까. 
류는 잠시 멈춰 서 그 소년의 뒤를 눈으로 좆았다. 소년은 건룡당으로 향하고 있었다. 

"…항아님, 한가지만 묻겠소." 

뭔가 모를 단지를 들고 소년의 뒤를 따르던 궁인이 얼굴을 붉히며 멈춰섰다. 

"저 소년은 대체 뉘요?" 

그녀의 얼굴에 당혹스럽다는 빛이 감돌았다. 하지만 어차피 숨길 수도 없을 노릇이었다. 궁인은 
애써 시선을 피하며 남에게 말하듯 퉁명스러운 목소리로 내뱉었다. 

"서아라고 전하의 후궁이옵니다." 

류의 하얀 얼굴이 더욱 창백하게 질리고 말았다. 그는 파리한 입술을 바르르 떨며 그 궁인과 
건룡당의 유려한 건물을 등졌다. 성큼성큼 걸어가는 그의 걸음에는 웬지 힘이 들어가 있지 
않았다. 
타락한 왕조의 왕에겐 음란함이 있었다. 음란함이 무엇인가. 여색이 문란해 짐도 그 이유 중 
하나겠지만 가져서는 안 될 관계를 가짐에 역점을 두고 있지 아니하던가. 
백성들의 왕의 남색을 알면 어떤 표정을 짓게 될지. 한때 자신의 이상을 대변하던 소열왕은 
지금 무언가 잘못된 길을 걷고 있었다. 
류는 다시한번 고개를 돌려 서아라는 아이의 펄럭이는 옷자락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그만 눈을 
감아버리는 것이었다. 



* 



"아, 전하 아프옵니다." 

서아는 자신이 부릴 수 있는 온갖 교태를 다 부리며 소열왕의 가슴에 제 볼을 부비었다. 
소열왕의 허리가 바쁘게 움직였다. 웬만한 여자보다도 능숙한 서아의 교성을 들으며 소열왕의 
몸은 더욱 뜨겁게 달아올랐다. 서아는 그 가느다란 팔로 소열왕의 목을 휘감았다. 그리고 그의 
귓가를 간지럽히듯 애무하였다. 둘의 뜨거운 입김이 바쁘게 교차하였다. 사내 둘의 몸이 엉키며 
진득한 소리가 방안에 메아리쳤다. 지밀상궁은 눈살을 찌푸리며 그만, 그 방의 풍경을 외면해 
버렸다. 여자 후궁들도 모자라서. 도대체 사내아이가 뭐가 좋다고 저러시는 겔까. 

"하아.. 전하, 그런데 오늘 정말 아름다운 사람을 봤사옵니다." 
"아름답다? 서아 너보다 아름다운 이가 있다더냐?" 
"농담이 아니옵니다." 

진류왕은 서아에게서 슬며시 몸을 떼며 거친 숨을 몰아쉬었다. 

"그래? 뉘라 하더냐." 
"그것을 잘… 한데 병조의 옷을 입고 있었나이다. 뺨에 분홍빛 상흔이 있는 걸 봤는데…" 

뭔가를 좀 더 말하려 하던 서아가 그만 입을 다물었다. 그도 그럴듯이 방금 전까지만 해도 
서아를 부둥켜 안고 어쩔줄 몰라하던 황제의 환한 표정이 어느새 딱딱하게 굳어 있었던 것이다. 
서아는 강아지처럼 몸을 웅크려 황제의 가슴에 얼굴을 묻었다. 그리고 숨을 죽이고 가만히 
그의 동정을 살폈다. 

"소하군이니라." 
"네?" 

가까스로 입을 연 소열왕의 목소리는 그의 표정대로 화가 나 있기보다는 서글프기 그지없었다. 

"내 동복 아우인 소하군 류이니라." 
"그리하옵니까…" 

이제 서아에게 그 아름다운 사람이 소하군인지 류인지 하는 것은 별반 중요하지 않았다. 
어떻게 하면 이 왕을 구슬려 다시 기쁘게 만들어 줄 수 있을까, 오직 그것만으로도 그의 
머리는 충분히 복잡하였기 때문이다. 



* 



서아의 숨소리. 어린 소년 특유의 가늘고 고른 숨소리가 소열왕의 귓전에 와 닿았다. 새벽이다. 
아직 동이 트진 않았으나 새벽일 것이라, 어렴풋이 짐작 할 수 있었다. 창 너머의 거무스름한 
기운을 보아하니 아직 인시(새벽 5~6시경)에도 다다르지 않은 모양이었다. 소열왕은 건너편에 
가지런히 개어진 곤룡포를 걸치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문을 여니 꾸벅꾸벅 졸고 있던 궁녀가 
화들짝 놀라 허리를 굽혔다. 그는 조용히 하란 손짓을 보낸 뒤 건룡당 밖으로 천천히 발걸음을 
옮겼다. 
차가운 공기가 확 코끝에 와 닿았다. 건룡당 앞뜰… 작은 연못을 중심으로 펼쳐진 녹색 벌판에 
풀벌레 소리가 아득했다. 늘상 보던 곳이었지만 어제 오후, 소하군, 류를 본 후 다시 대하니 
감회가 새로웠다. 그래, 이곳은 어릴 적, 자신이 세자에 책봉되기도 전부터 소하군과 같이 
뒹굴던 놀이터였지. 아직 아바마마께서 기침하시지 않았다는 소리에 좋다고 놀러 나갔다가 
연못에 빠졌던 일도 있었다. 그때, 류는 소열왕의 젖은 옷이 마를때까지 꺼이꺼이 울다가 
아바마마의 혼곤한 잠을 깨워놓기까지 했었다. 
유난히 우애가 두텁던 형제였다. 이 삭막한 궁궐 속에서. 

"전하, 안으로 드시옵소서. 고뿔이 드실까 염려되옵니다." 

지밀상궁의 근심어린 목소리가 낮게 울려퍼졌다. 소열왕은 이에 아랑곳 하지 않고 연못 가로 
한걸음, 한걸음 다가갔다. 금빛 잉어들이 반짝이며 헤엄치고 있었다. 손을 담궈보았다. 물이 
차가웠다. 지금, 이곳에 빠진다면 그래도 류는 자신을 위해 울어 줄 것인가. 
자신에게 아이가 없는 지금, 류는 왕위 계승 서열 1위, 그것도 문무백관의 신임이 두터운 
왕제로서 재목이 충분한 후계자가 될 터인데. 
그 아이는 아직도 날 형으로 생각하고 있을 것인가. 
새삼 서글픈 심정이 몰려들었다. 그의 뺨으로 굵은 눈물방울이 또르르 굴러내리는 것을 보며 
지밀상궁은 그만 고개를 돌리고 말았다. 
일국의 왕이란, 외로운 자리였다. 


* 



"폐하. 병조참판, 소하군마마께서 듭시옵니다." 
"… 들라 하라." 

양 문이 스르르 열리며 류의 단아한 얼굴이 눈에 들어왔다. 소열왕은 금침에 비스듬히 누워 
제일 먼저 그의 뺨에 남아있던 상흔으로 시선을 돌렸다. 새하얀 옥당목이 그곳에 감겨 있었다. 
류는 반사적으로 자신의 뺨을 매만지며 소열왕에게 아침 문안인사를 올렸다. 

"간만의 휴식이었을터인데, 잘 보냈느냐?" 
"전하의 성은 덕택이옵나이다." 
"그래? 참으로 잘 되었구나. 이제 다시 시작이거늘…" 

소열왕은 애써 그에게서 시선을 거두었다. 그리고 둘 곳 없는 눈길로 괜시리 자신의 조반상을 
쏘아보는 것이었다. 소주방 상궁은 그런 그의 곱지 않은 시선에 물색 모르고 가슴을 졸였다. 또 
무슨 핀잔거리를 찾은 것일까.. 하는 마음에. 
하지만 다행이도 불똥은 그녀에게 튀지 않았다. 그저 그대로 소열왕의 마음에 담겨졌을 
뿐이었다. 

"곧 조회가 시작될 것이니라. 채비를 갖추고 나가야 하지 않겠는가." 
"…예. 전하." 

둘 사이엔 별 말이 오가지 않았다. 하지만 둘은 참으로 많은 대화를 나누었다는 듯 노곤한 
기색으로 몸을 일으켰다. 소열왕이 먼저 나가고 그 뒤를 류가 따랐다. 둘은 여전히 피를 나눈 
형제였지만 이전처럼 함께 뒹굴고 놀던 그런 형제는 아니었다. 어색하게 나서는 이들의 행렬을 
지밀상궁은 위태롭게 바라보았다. 어쩌면 아주 작은 바람에도 톡 하고 부러질 것만 같은… 
그런 불안감을 가슴에 안은 채로 



* 



조회는 정말 조회였을 뿐, 아무것도 아니었다. 간신들의 아첨에 소열왕은 몇번 고개를 끄덕였고 
충신들의 간언에 몇번 성을 버럭 냈다. 하지만 그 외, 딱히 다른 조치를 취하지는 않았다. 
언제나 그랬다. 간신들의 간언을 귀담아 듣지 않고 충신들의 간언에 성낸 사실을 마음에 담아 
두지 않는 것은 그가 성군의 자질을 타고 났음을 증명해 주었다. 
하지만 소열왕은 충신들의 간언을 실행시킬 성실함을 가지고 있지 않았다. 그들의 말이 옳다는 
걸 알았지만 개혁을 단행하기는 귀찮았다. 그것 뿐이었다. 
그것이 영특한 소열왕을 백성들에게 있어 폭군의 반열에까지 오르게 만든 이유였다. 

"전하." 

하지만 오늘은 달랐다. 아침 문안을 들었을 때까지만해도 아무 말이 없었던 류가 입을 열었기 
때문이었다. 낮익은 목소리에 소열왕은 반갑지 않다는 듯 고개를 돌렸다. 
기분때문이었을까. 류의 눈빛에 어떤 결의가 서려있는 것처럼 보였던 것은. 

"전하. 신 병조참판 아뢰옵나이다. 이전, 반란군을 처단하기 위해 전하의 군대를 이끌고 
삼남지방을 돌았나이다. 그리고 참으로 망극한 소리를 들었나이다. 
그곳 백성들이 전하를 뭐라, 참으로 망극하오나, 뭐라 칭하는지 아시옵는지요." 

좌우로 늘어서 있던 백관들의 얼굴이 일제히 흑빛으로 굳어버렸다. 그들도 익히 아는 말이었다. 
하지만, 왕의 앞에서 직접 간언하려는 자가 있다니. 특히 류를 아끼는 영의정 이도는 
당장이라도 그의 앞으로 달려나가 류를 끌어내리고 싶은 심정이었다. 

"뭐라 하던가." 

싸늘한 목소리였다. 

"백성을 버리고 하늘이 버린 세기의 폭군이라 하더이다." 

부복해 있던 류를 제외하고 모든 백관들은 점점 부르쥐어가는 황제의 두 주먹을 똑똑히 지켜 
볼 수 있었다. 아니, 사실 류도 보았을 것이다. 하지만 류는 이에 멈추지 않았다. 

"전하. 이번 반란은 한번만으로 그칠, 그러한 반란이 아니옵니다. 전하께옵서 개혁을 단행하고 
주색을 멀리하시지 아니하신다면 제2 제3의 반란이 일어날 것이옵니다. 
통촉하여 주시옵소서!" 

그리고 소열왕의 낯빛이 노기로 붉게 달아올랐다. 소열왕은 무시무시한 눈으로 류를 바라보며 
손에 잡히는 무언가를 그에게 집어 던저버렸다. 화려한 용 무늬가 정성스럽게 새겨져 있던 
벼루였다. 
벼루는 류의 이마를 붉은 피로 적신 뒤에야 바닥에 맞닿았다. 

"그래? 폭군이라 갈아엎고 자신이 왕이 된다 이거렸다? 하, 그래 내 앞에서 이런 말을 하는 네 
저의는 무엇이냐! 네놈은 하늘이 저버린 폭군이니 가서 자결이라도 하라 이건가? 하늘이 
선택한 네놈이 왕이 될 수 있게 말이지? 왜, 왕위가 그리도 탐나더냐? 내 네게 양위라도 하란 
말인가? 
아니면." 

류는 당황한 눈빛으로 황제를 쳐다보았다. 

"네놈이 반란이라도 일으키겠단 말이냐? 역모 말이다." 

붉은 피가 눈 앞을 적셨다. 류는 구슬픈 눈으로 왕을 바라보았을 뿐, 별다른 변명도 하지 
않았다. 그것이 소열왕을 더욱 화나게 만들었다. 
변명을 하란 말이다. 멍청한 놈. 
소열왕은 옥좌에서 벌떡 일어나 찬바람이 쌩하게 불 정도로 차갑게 류의 옆을 스쳐지나갔다. 
류는 소매로 흐르는 피를 훔치며 산산조각 난 벼루를 하나, 둘씩 주워담는 것이었다. 그리고 
소열왕의 뒤를 향해 나지막히 

"성은이 망극하옵니다….전하…" 

라고 말하였다. 그의 말에 잠시 멈칫이던 소열왕은 이내 문을 박차고 대전을 나서버렸다. 그가 
대전을 나서자마자 기다렸다는 듯 영의정이 달려나와 류를 부축해주었다. 류는 비틀거리며 
일어서 희미한 미소를 지어보였다. 

"이게 무슨 어리석은 짓인가." 

영의정이 안타깝다는 듯 눈살을 찌푸렸다. 

"전하를 위한 일이옵니다." 

그리고 그의 눈이 복잡하게 흔들렸다. 

"무엇이 아깝겠나이까…" 



* 



"서아야." 
"네, 전하." 

서아가 달착지근한 목소리로 소열왕의 목을 휘감았다. 

"너도 아우가 있더냐?" 
"없사옵니다. 전하." 

그의 순진한 대꾸에 소열왕도 어두운 표정을 풀고 함박 웃음을 머금었다. 교활한 것 
같으면서도 은근히 순박한 아이였다. 
영리한 것 같으면서도 순진하기 짝이없는 류와 겹쳐져서 그랬을까. 소열왕은 이 아이, 서아가 
그리도 애틋하게 보이지 않을 수 없었다. 

"그래. 그렇다면 너는 내 마음을 헤아리지 못할 것이니라." 

고개를 갸웃이는 서아의 위로 소열왕의 몸이 겹쳐졌다. 조회가 끝난지 한식경도 지나지 않았을 
때였다. 따스한 햇살이 창틀 너머로 비쳐오는 그 아래로 두 사내의 흰 몸뚱이가 뒤척이고 
있었다. 간간히 섞여오는 가느다란 신음소리와 함께. 건룡당 장지문 앞에서 이 범상치 않은 
그림자를 지켜보던 류는 나지막히 한숨을 쉬며 돌아섰다. 지밀상궁이 안타까운 눈빛으로 그를 
붙잡았다. 

"내 왔었단 말은 고하지 말게나." 

금방이라도 눈물이 떨어질 듯, 류의 커다란 눈망울이 한껏 서글픈 빛을 머금었다. 지밀상궁은 
가까스로 고개를 끄덕였다. 서아의 새된 비명소리가 떠나가는 류의 뒤를 잰걸음으로 쫒아가고 
있었다. 류의 눈길이 건룡당 앞 연못으로 향하였다. 
그곳에는 금빛 잉어 두마리가 한가롭게 헤엄치고 있었다. 



* 



그런 말을 듣고 나서 곧바로 사내와 몸을 섞는 왕이라. 
자신의 집 대청에 걸터앉아 서서히 드리우는 어둠의 장막을 바라보던 류는 씁쓸한 시선을 둥근 
달로 넌지시 던져보았다. 

'네놈이 반란이라도 일으키겠단 말이냐? 역모 말이다.' 

소열왕의 노기 띈 음성이 자꾸만 귓전에 맴돌았다. 류는 자신이 살아가며 소열왕, 형에게 
이러한 말을 듣게 되리라곤 상상도 하지 못하였었다. 
그는 이제 자신을 귀여운 동생으로 보고 있지 않았다. 왕좌의 경쟁자로 보고 있었다. 
무의식적으로 튀어나온 이 한마디에 그는 절망하였다. 

'류의 피리소리는 청명하기 그지 없구나. 듣기 좋다.' 

또다른, 소열왕의 온화한 목소리. 류는 입가에 희미한 미소를 띄우며 소맷자락에서 가느다란 
피리를 꺼내들었다. 새하얀 달빛 아래로 천상의 음률인 듯한 곡조가 가늘고 높게 울려퍼졌다. 
소름이 돋았다. 
어디선가 몰려온 먹구름에 달빛이 차차 가리워졌다. 류는 눈만을 들어 그 어둑한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그리고 피리를 입에서 떼었다. 
피리소리가 여운이 되어 좁은 마당을 맴돌고 있었다. 

"전하를 바꾸기 위해선…" 

그의 얼굴에 비로소 환한 웃음이 피어났다. 

"좀 더 극단적인 방법이 필요하단 말인가?" 



* 



"전하! 반란이옵나이다!" 

병조판서의 다급한 목소리가 건룡당을 쩌렁쩌렁 흔들었다. 

"무슨 호들갑인가. 삼남 도찰사로 소하군이 가 있지 않던가. 크게 염려할 필요 없느니." 
"그… 그것이…" 

느릿한 소열왕의 말에 반박할 듯 더듬거리는 병조판서의 어주에 소열왕은 밀려드는 불암감을 
억누를 길이 없었다. 백성들이 류를 벌써 죽이기라도 했단 말인가? 류의 안전은? 막 자리를 
박찰 듯 앞으로 몸을 기울인 소열왕의 앞에 병조판서는 울음을 터뜨리듯한 목소리로 이 말을 
내뱉어야만 했다. 

"소하군 저하께옵서 반란군의 괴수라 하더이다!" 

…그리고 하늘이 무너져내렸다. 



* 



"삼남지방을 무혈입성 하였다 하옵니다." 
"경상 좌수청, 전라 어영청, 그리고 남도산성이 점령되었나이다!" 
"전군인 5만 대군 중 일만여가 그의 휘하에 들어가 있나이다!" 
"백성들이 소하군을 지지하기 시작하였다 하나이다!" 
"조치를!" 
"조치를 취하소서!" 

온 몸이 덜덜 떨려왔다. 소열왕은, 추호도 생각치 못했던 이 사실 앞에 아무런 대책도 내세우지 
못하였다. 무엇보다도 충격적인 소식은 삼남지방의 무혈입성이었다. 
백성들은 기다렸다는 듯이 왕을 버리고 류의 휘하로 달아나버렸다. 자신이 그토록 무능한 
왕이었던가. 이 문무백관 중에서도 소하군을 지지하는 이가 있을 터. 
가슴이 답답했다. 서하를 안고, 모든 것을 잊고 뒹굴고 싶었다. 정말 그랬다. 

"전군을 통솔하라." 

그는 참담한 목소리로 명을 내렸다. 

"아니, 짐이 직접 갈 것이니." 

병조판서가 놀란 눈으로 소열왕을 바라보았다. 그것은 영의정도 마찬가지였다. 소열왕은 
옥좌에서 벌떡 일어나 지밀상궁을 돌아보며 차갑게 명령하였다. 

"갑주를 가져와라. 내 눈으로 확인 할 것이니." 
"존명." 

그의 명령과 동시에 백관이 움직임이 분주해지기 시작하였다. 



* 



"전하. 반란군을 평정하였으나 아직 그 세가 완전히 진압되진 않았사옵니다. 소신을 그곳의 
통제사로 삼아주신다면 충심을 다해 반란을 진압하겠나이다." 

언제나 소열왕의 명에만 충실하게 따르던 류가 처음으로 올린 청원이었다. 저의 임무가 
막중함에 책임감을 느껴서 그랬던 게지. 
간만에 돌아온 동생에게 고함과 상처만을 남긴 것 같다며 그의 마음도 편치가 않았었다. 
소열왕은 류에게 사과의 말을 건네는 대신 그를 다시 삼남지방으로 몰아 내 버리고 말았다. 
사과? 새삼스럽게 사과란 것을 하기엔, 둘의 관계는 너무나도 껄끄러워 있었다. 
삼남지방의 통제사를 자청한 것이 반란을 일으키기 위함이었다…? 
지밀상궁이 입혀 준 갑주의 혁대를 졸라매며 소열왕은 메마른 입술을 악물었다. 무심코 눈길을 
돌리니 그곳에 자신과 류가 어릴 적 함께 놀았던 모습이, 궁중 화공의 손으로 생생하게 옮겨진 
초상첩이 놓여져 있었다. 
그는 온 힘을 다해 그것을 바닥으로 내동댕이쳤다. 초상첩은 순식간에 산산조각이 나 사방으로 
흩어져 버렸다. 때마침 들어오던 서아가 화들짝 놀라 몸을 움추렸다. 

"저.. 전하?" 

그제서야 소열왕은 정신이 돌아온 듯 조금 누그러진 눈길로 서아를 바라보았다. 

"옷과 소도구를 간단히 챙기거라." 
"예..?" 
"너도 전장에 갈 것이니라. 옷 속에 갑주를 입는 것도 나쁘진 않을 터." 

서아의 얼굴이 창백하게 질려버렸다. 

"저… 전장이라니요? 제, 제가 무슨…." 

소열왕은 짜증난다는 듯이 서아를 흘겨보았다. 서아는 후들거리는 다리를 애써 문설주에 
기대며 울것 같은 눈을 하고 있었다. 

"과인이 전장에 나설 것이니라. 전장에 계집을 데려 갈 수는 없을 노릇이고. 날더러 그곳에서 
홀로 지내란 말인가?" 

즉, 전장에서 가지고 놀 노리개가 필요하다… 이것인가. 서아는 더 말을 잇지 못하고 달아나듯 
건룡당을 빠져나갔다. 언제나 엄숙해 보이던 지밀상궁의 얼굴이 일말, 동정의 빛이 떠올랐다. 
그래. 어머니도 늘 엄한 분이셨지만 속으로는 잔정이 많은 분이시기도 했었지? 
서아는 엉겁결에 떠오른 어머니 생각에 애써 누르고 있던 울음을 왈칵 터뜨려 버렸다. 
지밀상궁이 부드러운 옷깃으로 서아의 어깨를 감싸안아주었다. 온 몸을 들썩거리며 우는 
서아의 모습은 소열왕의 곁에서 교태나 부리고 앉아있는 타락한 이의 상징처럼 되어버린 
남창이 아닌 그저 그 나이또래의 순진한 소년에 지나지 않았다. 



* 



삼남의 중심지 천주성(天州城). 
동, 서, 남 삼방이 강으로 둘러 싸여있고 북쪽은 험한 산지로 둘러싸인 천혜의 요새였다. 
지금까지 어떤 외적도 깨지 못한 곳. 
이곳에 자리잡은 류와 그의 군사들은 추수가 끝나 한가해진 농민들을 이용하여 산의 나무와 
많은 군량미들을 수집하고 있었다. 풍부한 식량과 천혜의 요새라.. 
게다가 수많은 민중들의 지지를 등에 업은 소하군의 군사는, 아무래도 모든 면에 우위를 
점하고 있을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소열왕이 직접 군대를 이끌고 남하한다는 소리에 천주성의 작전회의는 시끌시끌해질 
수밖에 없었다. 아무리 폭군이라도 왕이다. 지금 그에게 맞선다면 이제 진짜 돌이킬 수 없는 
사태가 일어나고 마는 것이다. 

"소열왕의 군대는 이 박달재를 걸쳐 천주성으로 진격할 전략을 짠 모양입니다." 
"박달재에 미리 군사를 주둔시켜 기습을 감행함이?" 

모든 참모진의 눈길이 모두 류에게로 쏠렸다. 은빛, 가벼운 갑주 위에 검은 도포를 걸친 소하군 
류는 입가의 엷은 미소를 지우지 않은 채 조용히 고개를 흔들었다. 

"당분간… 지켜 봄이 어떻겠습니까?" 

그의 단 한마디에, 조금전까지만해도 부산하게 떠들어 대던 이들이 꼬리를 내리고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묘한 위엄이었다. 부드러우면서도 냉철한, 그것이 류의 가장 큰 장점이자 통솔력이기도 했다. 

"쓸데없는 군사 낭비는 최소한도로 줄이기로 합시다." 

그리고 나흘 후. 
천주성은 소열왕의 군대에 포위되고 말았다. 천주성 내의 병력은 15000여명. 
소열왕의 병력은 34000명에 달하고 있었다. 



* 



"희한한 일이군요.. 이쯤에서 어김없이 기습공격이 있을거라고 생각했었는데..." 

군사 유철이 고개를 절레절레 내저었다. 기껏 앞쪽으로 내세웠던 선발대들이 무용지물이 
되어버렸던 것이다. 소열왕은 불쾌하다는 듯한 눈길로 그를 노려보았다. 군사란 작자가 한다는 
짓거리가 하나같이 한심했다. 

"... 소하군이 총괄하고 있다면... 상식만을 생각하면 안될 것이오." 

병조판서 김립이었다. 그는 자신의 직속 부하였던 병조참판이었던 소하군을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는 사람 중 하나였다. 

"희대의 천재라 불릴정도로 영리한 자이니..." 
"아하, 그래? 그렇다면 네놈도 그 잘난 대가리를 굴려야 하지 않겠나!" 

입으로만 나불대는 이들의 사이에 성난 소열왕이 끼어들었다. 둘은 제 입을 제 손으로 
틀어막으며 슬금슬금 외곽으로 물러섰다. 소열왕은 새빨갛게 상기된 얼굴로 주위를 둘러보며 
무언가 트집을 잡을 게 있는 갈 찾고 있는 눈치였다. 

"제길. 이놈이나 저놈이나 멍청하긴..." 

그럼 당신이 한번 해보쇼. 군사 유철은 입술을 비죽거리며 소열왕을 이죽거렸다. 불행인지 
다행인지 그의 이죽임은 소열왕의 눈에 띄지 않게 잘 넘어갔으나 병조판서의 눈에 들어오고 
말았다. 
아직 전쟁도 하지 않은 통에.. 벌써부터 분열이라니. 병조판서는 혀를 차며 소하군이 있을 
천주성을 향해 눈길을 돌렸다. 
소하군이라면, 이때 어떻게 행동을 했을까. 
황제의 진노가 깊어갈수록 그들의, 소하군에 대한 환상도 점점 깊어져만갔다. 그것은 군신간의 
깊은 골이 패이는 전주곡에 지나지 않았다. 



* 



소하군, 류는 천주성 성곽에 서서 이들의 움직임을 지켜보고 있었다. 그의 단아한 얼굴에 일순, 
어두운 그림자가 스쳐지나갔다. 그것은 자신의 병력이 약함을 탓하는 것도 아니오 전쟁에 
불리함을 인식해서도 아니었다. 
단지.. 오합지졸로 움직이는 왕의 군대를 보며, 착잡함을 감출 수가 없었다. 

"정말 기가 막힐 정도입니다. 전하의 군대가 저정도일줄이야..." 

그들의 눈에는 34000의 대 병력도 개미 떼로 보일 뿐이었다. 어느새 뒤로 다가와 중얼거리는 
군사 장선의 말에 류는 씁쓸한 미소를 머금었다. 

"그래요. 천천히 지켜보도록 합시다..." 

막 가을걷이가 끝난 어느 늦가을의 일이었다. 
성에는 군량미가 풍부했고, 군사로 징집된 병사들은 하나 거추장거릴 일 없는 자유로운 환경 
속에서 창과 칼을 들었다. 이런 세세한 면에까지 류의 배려가 깃들어 있었던 것이다. 

"전 마마의 생각을 알 수가 없습니다." 

그제서야 장선을 바라보는 류의 입가에 흡족함이 배어있었다. 

"어렵게 생각하실 필요 없습니다." 

그리고 그는 천천히 눈을 감았다. 바람소리가 귓전을 때리고 소열왕의 군대를 향해 날아갔다. 
아주 작은 그의 흔적을 담고... 



* 



진영을 설치하는 가운데, 서아는 소열왕의 막사에 쪼그리고 앉아 온 몸을 사시나무떨듯 떨고 
있었다. 이곳에는 자신을 보듬어주던 지밀상궁도 없었다. 오로지 군사, 군사들뿐. 그리고 자신을 
경멸하는 듯한 눈으로 바라보는 소열왕의 신하들 뿐이다. 
소열왕도. 자신을 노리개로만 여기는 그런 왕에게 기댈 마음따위 애시당초 존재하지도 않았다. 
처음부터 그를 사랑하는 사람은 존재하지 않았다. 
갑자기 두 눈에 왈칵 눈물이 고였다. 그는 이를 악물고 소매로 눈부리를 훔쳤다. 만일 
누군가에게 우는 걸 들키기라도 한다면 전쟁을 앞두고 우는 재수없는 녀석이라며 무슨 봉변을 
당할지도 모른다. 그는 막사 안쪽의 침대 아래로 들어가 꺽꺽 복받혀 오는 울음을 삼켰다. 

"서아야." 

그때, 소열왕의 부드러운 목소리가 들려왔다. 서아는 간신히 삼킨 울음을 어금니에 악물고 침대 
아래서 슬금슬금 기어나왔다. 

"흥. 짐더러 이런 방에서 자란 말인가." 

다른 이들은 딱딱한 맨바닥에서 눈만 간신히 붙인답니다. 서아는 속으로 입을 비죽였다. 

"하는 수 없지." 

입가에 비죽 미소를 머금은 소열왕이 서아의 몸으로 손을 뻗쳤다. 서아는 주춤 뒤로 물러섰다. 

"왜그러느냐?" 
"저, 전장에 도착하자마자 이, 이러셔도 되는 것이옵니까, 저, 전하.." 

소열왕은 미간을 좁히고 서아를 쳐다보더니 그의 하얀 뺨을 세게 올려붙였다. 그래도 
어릴적부터 무예를 닦아온 왕이었다. 서아의 가냘픈 몸뚱이는 막사의 하늘거리는 천막에 
부딪쳐 간신히 고꾸라졌다. 

"지금 네가 내게 훈계를 하는 것이냐?" 

소열왕의 몸뚱이가 온 몸을 새우처럼 구부리고 누워있는 서아의 위로 올라탔다. 서아는 
숨막히는 듯한 소리를 지르며 발버둥을 쳤지만 소용이 없었다. 

"너는 그냥 얌전히 내게 안기면 되는 것이다." 
"저, 전하-" 
"어차피 역적놈의 아들이 쓰레기밖에 더 되겠더냐." 

발버둥치던 서아의 몸이 이내 잠잠해졌다. 서아는 창백하게 질린 얼굴위로 굵은 눈물방울이 
또르르 굴러내렸다. 왕의 입가에 비로소 만족한 듯한 미소가 맴돌았다. 그는 거칠게 서아의 
옷을 잡아당겼다. 



* 



소열왕의 막사 안쪽에서 억눌린듯한 신음소리가 새어나왔다. 보초병은 희미하게 비치는, 두 
사내가 몸을 섞는 그림자에 헛기침을 하며 고개를 돌렸다. 때마침 진영을 정비하던 병조판서가 
이 장면을 보고야 말았다. 그는 당황스런 눈빛으로 보초병을 바라보았다. 이게 또 무슨 
변괴던가. 
명색이 왕이란 자가 전장에 오자마자 데려온 아이와 몸을 섞어? 그것도 보초병이 눈을 
시퍼렇게 뜨고 있는데.. 그는 괜히 망신스러운 기분에 보초병을 쫓아버리고 자신이 그 앞에 
멀거니 지켜서 있었다. 50이 넘어간 고관이 황제의 밤일을 하고 있는 곳 앞에서 보초를 서고 
있는 것이다. 
그 장면 또한 가관이었다. 
막사 안에선 울음인지 신음인지 모를 소리가 계속 새어나오고 있었다. 



* 



"이제... 시작입니다." 

군사가 단호한 목소리로 말을 했다. 류는 말없이 자신의 검을 만지작거렸다. 

"내일, 총 공격을 벌이겠습니다. 마마, 허락해 주시옵소서." 
".... 그래요. 좋습니다...." 

이렇게 대답하는 그의 표정은 그리 달갑다는 눈치가 아니었다. 그 사정을 누구보다도 잘 아는 
군사는 아무런 토도 달지 않은 채 류의 앞에서 물러섰다. 회의실에는 류 혼자만이 남아 있었다. 
그는 쓸쓸한 눈빛으로 창 너머 왕의 진영을 바라보았다. 

"저는 언제나 방해물일 뿐이군요..." 

류는 만지작거리던 검을 뽑아 검신을 훑었다. 새하얀 은빛의 검신이 태양의 빛에 눈부시게 
반짝였다. 그의 눈에 어떤 결의가 서렸다. 그리고 작은 인두를 불에 달궈 검신에 무언가를 
새기기 시작하였다. 한자 한자 검은 글자가 은빛 검신에 그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하였다. 

"이제는.. 그 노릇도 끝입니다..." 



* 



"대감!" 

깜빡 잠이 들었던 모양이다. 병조판서는 몽롱한 얼굴을 가로저으며 찢어지는 듯한 비명을 
지르는 이를 바라보았다. 잠시 순찰을 돌겠다며 나갔던 병조좌랑 유평이었다. 이사람이 나간지 
얼마나 됐다고 들어오는게야? 지난 밤 소열왕의 막사 앞을 지키느라고 그의 노구는 피로하기만 
했다. 

"크, 큰일났사옵니다!" 
"도대체 무슨 일인가?"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다짜고짜 늘어지기에는 병조좌랑의 표정이 너무나 급했다. 그는 간신히 
상체를 일으키며 늘어지게 하품을 했다. 

"소하군의 군대가 밀려오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는 입을 벌린 채 그대로 굳어버리고 말았다. 



* 



소하군은 착잡하다는 듯이 제 턱을 쓰다듬었다. 소열왕의 진영에서 가장 큰 문제점이 이제 곧 
드러날 것이다. 물론, 그것은 처음엔 소열왕의 안전을 위한 미봉책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실전에서는 좀 다르게 작용할테지. 그것도 적군에게 가장 유리한 방법으로 말이다. 
지금 소열왕으 진영은 네개의 군으로 나누어져 있었다. 일군은 이들의 기습을 예상했던 군사가 
미리 보냈던 선발대, 이군은 죄수와 부랑배들로 이루어진, 포악하지만 오합지졸에 불과한 
방패막이들. 삼군은 일반 병사, 사군이 바로 최 정예부대인 국왕호위대이다. 한데, 앞의 세 군은 
뒤의 제 4군을 위한 방패에 지나지 않다는 게 지금까지의 사정이었다. 
물론, 그것이 나쁘다는 이야기는 아니다. 어쩌면 실전에서는 더 효율적인 방법일지도 모르고, 
만약 왕이 자신의 전투에 동행했다면 소하군 역시 이 방법을 썼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이들의 군사는 가장 치명적인 실책을 범하였다. 소하군은 잠시 시선을 북쪽의 산악지대로 
돌려보았다. 초록빛 물결에, 무기들의 섬광에 부셔왔던 눈이 한결 나아졌다. 그가 다시 
전장으로 시선을 옮겼을 때, 그의 군대는 제1군, 선발대와 마주치고 있었다. 한바탕 고함과 
함께 뿌연 흙먼지가 일어났다. 
이제, 그들의 문제점이 하나씩 베일을 벗기 시작할 것이다. 



* 



"전하! 전하!" 

소열왕은 아직이었다. 오히려 애꿎은 서아만 깨어나 비척비척 몸을 일으키는 것이었다. 

"어서 전하를 깨우시오!" 

병조판서는 가까스로 몸을 추스리는 서아에게 성난듯한 목소리로 소리쳤다. 서아는 움찔한 
표정으로 병조판서의 안색을 살폈다. 

"기침하시기 전에 깨우면 화냅니다." 
"지금 그런걸 따질 때가 아니오!" 
"..싫습니다. 그럼 대감께서 깨우십시오.." 

서아의 이 한마디에 이번엔 병조판서가 움찔했다. 둘다 용기가 없기는 매한가지였다. 
병조판서는 큼큼 헛기침을 하더니 막사로 들어와 한참을 머뭇거렸다. 서아가 그러는 사이에 
쏜살같이 빠져나갔다. 이제 소열왕을 깨울 사람은 병조판서밖에 없었다. 

"이.. 이런..." 

잘못 깨웠다간 경을 칠테지. 적군의 칼을 맞아 죽기보다 왕에게 죽는 게 빠를게다. 그는 
뭐마려운 개마냥 안절부절 못하고 있었을 뿐, 왕을 깨우지는 못했다. 
그 사이 선발대가 무너지고 말았다. 적군은 파죽지세로 2군을 향해 밀려드는데... 
2군의 병사들은 여유롭게 식사를 하고 있었다. 그것도, 잠에서 깨지 않은 자가 태반인 채로. 



* 



"저 진형에서는 가장 큰 문제가 '연락'이죠." 

군사가 나지막히 고개를 끄덕였다. 

"저는 저 진형을 짤 때 연결고리를 두어 연락을 용이하게 합니다. 그래도 1군과 4군의 사이의 
거리는 너무나 멀기만 하더군요. 하지만 지금, 전하의 진영에는.. 연락의 고리마저 끊긴 
상태입니다. 즉.. 고위 장교들만 이 소식을 접할 수 있을 뿐, 병사들에겐 미처 전달되기도 전에 
전쟁이 끝나는 것이지요." 

자신의 군사가 승리를 거두고 있는데도 류의 표정은 펴질줄 몰랐다. 군사의 얼굴에도 씁쓸한 
그림자가 드리웠다. 

"...마마." 

그의 나지막한 부름에 류가 고개를 돌렸다. 

"무슨 생각을 하시는 것이옵니까." 
"글쎄.." 

어중간한 류의 대답에 군사는 더더욱 단호한 얼굴로 적진을 바라보았다. 

"마음을 단단히 먹으시옵소서." 
"...." 
"언젠간 일어날 일이었사옵니다." 
"미안합니다." 

미안하다? 군사가 깜짝 놀란 듯이 돌아보았다. 

"무슨 말씀이시옵니까. 저희는 이 반정의 앞에 선 것을 영광으로 생각하고 있사옵니다." 

충성스럽기 그지없는 말이었다. 왕자들의 친구로 들어올 정도로 영특하고 장래를 촉망받던 
군사였다. 그가 모든 것을 버리고 성공할지도 미지수인 반정의 기수에, 그저 류, 자신만을 믿고 
들어왔다는 것은 분명 감격적인 일일 것이다. 하지만 류는 가슴이 아팠다. 그런 그가 이렇게 
충심을 바치고 있는 데 이상하게 서글프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중에.. 알게 되시겠지요." 

군사의 얼굴이 어두워진다. 

"왜... 미안하다 하였는지, 그 이유를 말입니다..." 



* 



2군은 애시당초 기대도 하지 않은 군대였다. 하지만 막상, 이렇게 빨리 무너지고 나니 아쉬운 
점이 없지 않았다. 이들이 조금만 더 버텨 주었더라면... 
적군은 지금 3군과 맞닥뜨리고 있었다. 3군은 그 수만 해도 만만치 않기 때문에 쉬 무너질 것 
같지는 않았다. 
그리고 그제서야 소열왕이 긴긴 아침잠에서 깨어나는 것이었다. 막 군사 유철에게서 보고를 
받던 병조판서는 얼굴에 화색을 띄우는 대신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소열왕은 자신의 곁에 
병조판서가 있다는 사실이 의아했던지 주위를 둘러보며 서아를 찾았다. 

"전하! 1군과 2군이 무너졌사옵니다!" 
"응? 그건 그렇고 서아놈은 어디.... .....! 뭐라고?" 

유철이 이마를 치며 입술을 비죽 내밀었다. 

"무, 무슨소리인가! 자세히 말해보라!" 
"소하군의 군대가 1군과 2군을 격파했사옵니다!" 
"갑자기 그게 무슨 봉변이란 말이냐!" 
"전들 어찌 알겠사옵니까." 
"그게 지금 내 앞에서 할 말인가! 다 쭈그러진 상판이나 들이밀지 말고 전시 상황을 알아오라! 
당장!" 

결국 두 '쭈그러진 상판'은 소열왕의 막사에서 쫒겨나가고야 말았다. 그때것 유순한 태도를 
보이던 병조판서가 찌푸린 얼굴로 바닥에 침을 퉤 뱉었다. 유철의 입술은 비죽 튀어나온 채 
들어갈 기미를 보이지 않고 있었다. 

"더-러워서, 젠장." 

유철의 시선이 황제의 막사에서 멀지 않은 곳에 몰려있는 병사들에게로 향했다. 그는 혼자 
성큼성큼 잘도 걸어가는 병조판서를 놔두고 그들에게로 걸음을 옮겼다. 무엇 때문에 저들이 
저렇게 옹기종기 모여있는지 궁금해 견딜수가 없었던 것이다. 



* 



"하핫, 내가 어제 봤는데 말이지, 아주- 살살 녹이던데?" 
"어이, 꼬맹이. 우리도 저 국왕인가 뭔가하는 놈을 위해서 목숨을 바치고 싸우는 몸이라고. 좀 
보여줘봐." 
"사내놈이라 더 맛있으려나?" 
"왜, 난 죽어도 그런 짓은 안한다. 킥, 사내가 자존심이 있지.." 
"네놈은 백번 죽었다 깨나도 왕이 안부를걸?" 

옹기종기 모인 병사들의 가운데에는 쪼그리고 앉아 불안한 눈으로 그들을 쳐다보고 있는 
서아가 있었다. 유철은 인상을 찌푸리며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아침부터, 재수없게 
남창놈의 자식이. 

"글쎄, 한번 벗어 보래도?" 
"왕이 안는 녀석은 어떻게 생겼는지 구경이나 하자." 

병사들의 거친 손이 서아의 몸을 휘어잡았다. 서아는 발버둥을 치며 앙앙 목놓아 울기 
시작하였다. 상의가 찢어지고 맨살이 드러나자 병사들의 눈빛이 이상하게 번뜩였다. 
이러다간 일 나겠군. 
유철은 허릿춤에서 대나무쪽으로 매인 병부로 이들의 머리를 한대씩 후려갈겼다. 

"이런 미친놈들. 지금 적군이 몰려내려오고 있는데 남창자식하고 희희덕댈 생각이 드냐!" 
"에-? 구, 군사님? 그, 그게 무슨 말씀이시온지요?" 
"당장 위치로 가게!" 

이들은 영문도 모르고 후다닥 병기를 챙겨 달아났다. 서아는 찢어진 옷깃을 주섬주섬 주워 
안으며 불안한 눈으로 유철을 바라보았다. 그는 서아를 향해 침을 퉤 뱉으며 쌀쌀맞게 몸을 
돌렸다. 그리고 내뱉듯이 중얼거렸다. 

"역적놈의 아들이 남창짓이라, 그놈의 집구석도 뻔할 뻔자군." 

서아의 얼굴에 구슬픈 빛이 맴돌았다. 그는 제 옷을 챙겨 달아나듯 북쪽을 향해 달음질치기 
시작하였다. 



* 



-둥-둥 두둥- 

적군을 향해 날카로운 창끝을 겨누던 소하군의 병사들이 크게 울려퍼지는 저음의 북소리에 
일제히 날을 거두었다. 이들은 이미 전투불능의 상태에 빠진 소열왕의 병사들을 뒤로하고 
미련없이 물러나기 시작했다. 
그때 것 성안에만 웅크리고 있었던 소하군의 병사들이 성 밖에 진영을 설치했다. 2구의 
병사들이 우르르 1군을 향해 달아나는 모습이 가관이었다. 소하군은 자신의 애마인 
흑영(黑影)을 이끌고 이 진영으로 내려가 병사들을 치하했다. 
사람 덩치의 두배는 됨직한 말. 그것도 새까만 옻빛에 발목만 눈처럼 하얀 이 흑영은 탐을 
내지 않는 사람이 없을 정도로 아름다운 준마였다. 소열왕도 이 흑영을 갖고 싶어했으나 
난폭하기 그지없는 말의 성미에 못이겨 소하군에게 다시 내주었을 정도였다. 
하지만 희한하게도, 소하군의 앞에서만큼은 절대 난폭한 짓을 하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그리고 
영리하기 그지없어 사람의 속을 꿰뚫는 듯한 행동을 하는 게 하루 이틀 일이 아니었다. 
소하군 병사들에게 다가가기 위해 내리자 흑영은 얌전히 고개를 숙여 제 등에 얹혀진 안장을 
흔들었다. 
소하군은 빙긋이 웃으며 흑영에게서 안장을 풀어주었다. 야생의 상태로 돌아간 말은 제 세상을 
만난 듯 신나게 뛰어돌아다녔다. 
어차피 휘파람 한번이면 돌아올 말이다. 소하군은 묵직한 안장을 옆의 병졸에게 맡기고 진채 
안을 살피기 시작했다. 



* 



날이 어두워지기 시작했다. 산기슭까지 피냄새가 진동했다. 서아는 슬슬 추워지는 날씨에 
옷깃을 여미며 온 몸을 오돌오돌 떨었다. 
온 길을 되짚어 가야만 했다. 하지만, 이미 때는 늦었다는 듯 낮까지만 해도 아군의 진채였던 
곳에 떡하니 소하군의 군대 깃발이 꽂혀있는 것이었다. 그제서야 서아는 후회하기 시작했다. 
너무 멀리 달아났구나. 
사실, 1군과 2군 사이의 거리만 해도 성인 남자가 꼬박 달려야 하는 거리였다. 하지만 운이 
좋았던 것인지 나빴던 것인지 서아는 그 마을 주민들만이 알고 있는 지름길을 발견했던 것이다. 
그는 멍한 눈으로 적군의 진채를 바라보았다. 환한 불빛, 그리고 달콤한 음식냄새. 배가 고팠다. 
주머니를 뒤적이니 다행이도 아침에 넣어두었던 간식거리가 손에 잡혔다. 다 식고 뭉개져서 
볼품은 없었지만 시장이 반찬이라고 그의 입엔 꿀맛 같았다. 

-저벅 

정신없이 간식거리를 먹던 서아가 움찔 놀라 고개를 들었다. 발자국 소리? 
이곳은 적의 진채다. 이곳에서 발자국 소리가 들린다면 무엇이겠는가. 적군일 것이 뻔했다. 
서아는 어쩔줄을 몰라하며 근처의 수풀에 몸을 숨겼다. 

-저벅 

소리가 점점 커져왔다. 그리고 서아를 향해, 검은그림자가 드리워졌다. 무언가가 풀섶을 헤친다. 
그림자가 제 얼굴에 드리워지자 서아는 무턱대고 비명을 질렀다. 

"으아악-" 
"이히힝!" 

엥? 서아는 당혹함을 감추지 못하며 슬그머니 눈을 떴다. 그의 눈앞에 있는 것은 거대한 
'말'이었다. 새까맣고 윤기가 흐르는. 
그는 여태것 이렇게 멋진 말을 본 일이 없었다. 소열왕의 말도 나름대로 괜찮다고 
생각했었지만 이 말에 비하면 발톱의 때도 안되었다. 
히야.. 서아는 고개를 바짝 들어 말의 새까만 눈동자를 바라보았다. 말은 지긋이 서아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안녕-?" 

어색한 인사. 하지만 말은 꿈쩍도 안한다. 서아는 비로소 말이 자신이 아닌, 자신의 손에 있는 
간식거리를 보고 있다는 걸 깨닳았다. 

"음- 먹을래?" 

신기한 일이지. 말은 마치 그 말을 알아들었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서아는 싱긋 웃으며 그 
간식거리를 내밀었다. 말이 뭉툭한 코를 들이밀며 킁킁 냄새를 맡고는 우적우적 음식을 
받아먹기 시작했다. 콧잔등이 부드러웠다. 서아는 아주 맛있게 음식을 먹고있는 말의 갈기를 
쓰다듬어보았다. 거친 여느 말의 갈기와는 다르게, 너무도 부드러웠다. 

"맛있어?" 
"이히히힝-" 

말이 순순히 서아의 손에 부비적거린다. 서아는 방금전의 두려움을 잊었다는 듯 얼굴 가득 
환한 미소를 띄웠다. 



* 



고요한 막사 안에 맑은 휘파람 소리가 울려퍼졌다. 하지만 상대는 감감 무소식. 류는 걱정에 찬 
눈길로 막사 주위를 둘러보았다. 병사들을 풀어 막사 주위를 살피게 한 군사가 다가와 류의 
어깨에 손을 얹었다. 

"그 영리한 녀석이 잡혔을 리는 없을 겁니다. 필시 어딘가에서 먹이라도 먹고 있는 게지요." 
"그래요. 그랬으면 좋으련만..." 

류의 시선이 막사에 닿아있는 산 기슭으로 향했다. 말이든 산토끼든 동물이란 놈의 습성은 
초목을 쫓아가는 법. 여기에까지 생각이 미치자 그의 발걸음도 산 기슭을 향해 가고 있었다. 
군사가 당황한 듯 류의 팔을 잡아챘다. 

"지금은 밤입니다. 산은 위험합니다." 
"아.. 하지만 진채 바로 옆이 아닙니까. 깊이만 들어가지 않으면 불길이 보일 텐데, 무슨 
걱정이겠습니까." 

그는 희미하게 미소지으며 계속해서 산쪽을 향해 걸음을 딛었다. 못내 걱정스러운 군사가 곧 
횃불을 들고 그의 뒤를 따랐다. 하지만 몇발짝을 딛기도 전에 멈춘 류가 뒤를 돌아보더니 
돌아가라는 손짓을 했다. 

"혼자가시려는 겁니까!" 
"금방 돌아오겠습니다. 병사들을 돌보고 계세요." 

군사는 미간을 찌푸리고 류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류는 말도 없이 터벅터벅 잘 다져진 
산길을 걸어 올라가고 있었다. 



* 



"이-히히힝!" 

갑자기 말이 고개를 쳐들고 야단법석을 떨었다. 서아는 깜짝 놀라 주춤 뒤로 물러섰다. 수풀이 
파르르 흔들린다. 말의 울음소리 때문에 누구인지, 분간을 할 수는 없었다. 
늑대나- 호랑이. 뭐 그런 종류의 맹수는 아니겠지..? 
서아는 흠칫 놀라 말의 목덜미를 잡아당겼다. 말은 머리를 푸들푸들 떨더니 이내 발광을 
가라앉혔다. 

"흑영!" 

그리고 맑고 청아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이런곳에 있으니 휘파람도 못듣지 아니하냐." 

말, 흑영은 제 주인을 만난게 그리도 반가웠던지 길쭉한 머리를 그에게 부비며 흥흥거리는 
소리를 냈다. 서아는 손바닥에 있던 간식 찌꺼기를 탁탁 털고는 그런 그들의 모습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흑영을 부드럽게 쓰다듬던 그가 고개를 들었다. 그제서야 서아를 발견한 
모양이었다. 
그리고 서아도 그제서야 이 사내의 모습을 확실히 확인 할 수 있었다. 
낯익은 얼굴... 

"한데.. 누구신지?" 

공손한 어조였다. 서아는 이 낯익은 사내를 언제 보았는지 기억을 더듬기 위해 머리를 굴렸다. 
누구더라..? 

"저.. 저..." 
"흑영을 돌봐주셨군요. 흑영이 무슨 실수를 하진 않았는지?" 

살짝 웃는 그의 뺨에 연분홍빛 상흔이 드러났다. 그제서야 머릿속에 스치는 기억. 

"소- 소하군?" 



* 



"서아는 어디로 간거냐!" 

소열왕의 짜증섞인 목소리에 영의정은 어쩔줄 몰라하는 유철을 노려보았다. 하지만 달리 
입밖으로는 내지 않았다. 만약 소열왕이 그 사실을 알아보라. 유철은 물론이고 그 병사들까지 
참수형감이다. 
소열왕의 성격으로는 충분히 그러고도 남았다. 

"탈영을 한게 아닐런지요?" 

좌수사 이직이 빈정대듯 중얼거렸다. 영의정 이도의 곱지 않은 눈길이 이내 그에게로 향하였다. 

"허긴, 불안하긴 했었습니다..만?" 

그리고 그의 시선을 의식한 병조판서가 좌수사를 두둔했다. 영의정은 설레설레 고개를 
내저었다. 
하긴, 이 중 서아에 대해 아는 이는 영의정밖에 없었으니. 
다른 이들은 그저 역적의 아들, 그리고 왕에게 꼬리를 친 몹쓸 남창놈이라고 생각할 뿐이었다. 

"그렇다면 내 이놈을 찢어죽이리라!" 

소열왕이 이를 갈았다. 그 바람에 잔뜩 겁먹은 다른 장수들이 제각각 다른 곳을 바라보며 
딴청을 피웠다. 덩치는 산만한 인간들이. 유철의 입이 댓발이나 튀어나왔다. 

"당장- 찾아오라!" 



* 



"절 아시는군요?" 

서아는 파리하게 질린 얼굴로 고개를 끄덕, 끄덕했다. 

"누구신지...?" 

이렇게 묻는 류의 표정이 살짝 굳어졌다. 그 모습을 보아하니 서아가 누구인지 이제서야 알아 
챈 모양이었다. 류는 흑영에게서 손을 떼 자신의 이마를 짚었다. 

"아.. 전하의... 그래요. 이름이 무엇인가요?" 
"서.. 서아..." 

목소리가 떨려왔지만 류는 적군이었다. 순순히 대답하지 않으면 자신을 죽일지도 모른다는 
불안감에 간신히 입술을 떼었다. 

"여기엔 무슨 일로?" 

그때 서아의 머리에 스치는 생각이 있었다. 아, 이 사람은 지금 자신을 첩자라고 여기고 
있는건가? 그렇다면 정말 꼼짝없이 죽는게 아닌가. 
여기에까지 생각이 미치자 서아는 저도 모르게 닭똥같은 눈물을 뚝뚝 떨구었다. 그를 빤히 
지켜보던 류는 순간 당황하여 주춤 뒷걸음질쳤다. 

"저- 지- 진짜- 기- 길을- 잃- 잃은 거예요- 아- 아무짓도- 아- 안- 했어요...!" 

그제서야 류도 씁쓸한 미소를 머금었다. 그런 생각 한적 없는데. 서아가 지금 무슨 생각을 
하는지 어렴풋이 짐작은 갔다. 

"압니다. 걱정 마세요." 

그리고 그는 서아를 향해 손을 내밀었다. 서아는 엉겁결에 그의 손을 마주잡았다. 

"데려다 드리겠습니다. 타세요." 



* 



말은 상상했던 것보다 훨씬 거대했다. 무슨 높은 망루에 올라온 듯 수풀이 한눈에 들어왔다. 
그리고 무서웠다. 서아는 말이 흔들릴 때마다 기겁을 하고 그 갈기을 움켜쥐었다. 안장이라도 
있으면 좋으련만. 이런 곳에서 류는 잘도 침착하게 서아를 붙잡고 있다. 

"전하께서는 잘 지내시나요?" 
"네. 너-무 잘 계세요. 아, 아니, 안 잘계세요-" 

반란군에게 임금이 잘 계시다고 하면 안되겠지-? 서아는 허겁지겁 말을 바꿨다. 류는 가볍게 
웃음을 터뜨리며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그냥 사실대로 말씀해 주십시오. 그래.. 전하께선 절더러 뭐라 하시덥니까?" 
"음.. 으음.. 그냥... 좀..." 

서아는 간신히 용기를 내어 뒤를 돌아보았다. 류의 얼굴에 걱정이 그득했다. 

"쓸쓸해 보였어요.. 조금은." 
"그렇습니까..." 

그리고 둘 사이에 말이 없었다. 서아는 이런 침묵이 싫었다. 무서웠다. 그는 말 잔등에 착 
달라붙은 채로 웅얼거리듯 입을 열었다. 

"저- 소-하군님은 참 이상해요." 
"네?" 
"전 반란군의 괴수가 전하를- 전하라고 부르는 걸 듣도 보도 못했거든요." 
"하하.. 글쎄요. 일단은 형님이시니까.." 
"전하의 안부를 묻는것도 그렇고." 
"...." 
"소하군님은 왜 반란을 일으키신거예요?" 

저런저런. 처음엔 경계심이 너무 심해 탈이더니 이젠 너무 경계를 안해 탈이군. 류는 시선을 
들어 하늘을 바라보았다. 반짝이는 별이 촘촘히 박혀 무수한 무리를 이루었다. 

"글쎄요..." 

서아는 뒤를 힐끔 훔쳐보았다. 그리고 자신도 고개를 들어 별을 바라보았다. 수많은 반딧불이 
까만 하늘에 콕콕 박혀있는 것만 같았다. 잡아보고 싶어... 그는 저도 모르게 말 갈기를 
잡고있던 손을 하늘로 뻗어보았다. 순간 몸이 휘청하며 한쪽으로 기울어졌다. 비명을 지를 새도 
없이. 
그의 몸이 막 말 등에서 떨어지려는 찰나, 류가 재빠른 동작으로 서아를 안아올렸다. 류의 
두근거리는 심장소리가 귓가에 전달되어왔다. 놀랐을까? 왜 놀랐을까? 
어차피 떨어져봤자 자신이 반기를 든 왕의 정부가 다칠 뿐이데. 
서아는 놀라서 화끈거리는 얼굴을 식히며 고개를 수그렸다. 

"아까 왜 반란을 일으켰냐고 물어셨습니까?" 

그리고 고개를 숙인 채로 끄덕였다. 

"저 하늘에 박히 무수한 별들 중에 자신의 별이 있다는 사실을 아십니까?" 
"제 별은 없을거예요." 
"하하.. 제가 보기엔 저- 밝은 별 옆에 빛나는 조그만 별이 당신의 것 같은데요." 

보고싶다. 계속 고개를 숙여야 할지 들어야 할지 망설이던 서아는 결국 유혹을 이기지 못하고 
고개를 들었다. 새하얗게 빛나는 별. 일명 왕의 별이라고도 불리는 그 별의 곁에 연보라빛으로 
새하얗게 빛나고 있는 아름다운 별이 보였다. 저게 나의 별? 서아의 얼굴에 환한 미소가 
걸렸다. 

"그럼 소하군님의 별은요?" 

그는 대답 대신 손을 들었다. 그의 손가락 끝에, 왕의 별과 대등할, 아니 그보다 더 빛나는 
듯한 붉은 별이 걸렸다. 객성이었다. 일명, 파군성이라고도 불리는 불길한 별. 

"...저는 언제나 누군가의 앞을 가로막으며 살아왔답니다.." 

그의 목소리에 서글픈 빛이 그득했다. 

"제 별이 너무 빛나는게 싫어서..." 

그리고 그들의 앞으로 환한 빛이 와 닿았다. 왕의 진채였다. 

"그래서..." 

흑영이 한번 푸르르 고개를 떤다. 류는 더이상 말을 잇지 않고 먼저 말잔등에서 뛰어내렸다. 
그리고 서아를 받아 내려주었다. 

"..... 오늘 만나서 즐거웠습니다." 
"네?" 
"오래간만에 이야기를 많이 나누었어요.." 

서아는 어리둥절한 눈으로 류를 바라보았다. 

"흑영은, 사람을 보는 눈이 뛰어나거든요. 흑영이 그리도 따랐다는 건, 분명 당신이 순수하고 
착한 사람이기 때문일 겁니다." 

순수하다...? 서아는 왈칵 치밀어오르려는 눈물을 간신히 삼켰다. 나는 더러운 남창에 불과한데. 

"사실 당신을 보기 전까지는 조금.. 안좋은 감정도 가지고 있었거든요." 

그의 미소가 모처럼 밝게 빛났다. 그는 말이 끝나자마자 흑영에 올라타더니 곧 말머리를 
돌렸다. 서아도 미련을 버리고 몸을 돌렸다. 진채가 눈앞에 있다. 이제 돌이킬 수 없는 것이다. 



* 



막사에 들어감과 동시에 무자비한 소열왕의 주먹이 서아의 뺨으로 날아들었다. 서아는 
휘청이며 막사 구석으로 그대로 곤두박질쳤다. 

"이런- 쓸모없는 놈! 지금껏 어디갔다 온게냐!" 
"저- 전하..." 

서아는 최대한 몸을 둥글게 움크린 채 소열왕의 발길질이 날아오기를 기다렸다. 하지만 
아니었다. 식식거리는 거친 숨소리만 맴돌았을 뿐. 
서아는 조심스럽게 고개를 들어 소열왕을 바라보았다. 

"모처럼 네놈을 써먹을 수 있는 기회가 왔다." 

그는 화를 억누르는 듯한 말투로 가만가만 이야기했다. 

"예?" 

멀뚱이 되묻는 그의 앞에 떨어진 것은 서찰 한통. 서아는 반사적으로 그것을 펼쳐보았지만 
언문뿐이 모르는 그에게 한자로만 쓰여진 편지는 그저 한폭의 그림같을 뿐이었다. 

"내일 아침." 

소열왕이 한걸음, 두걸음 서아를 향해 다가섰다. 서아는 그 서찰을 꼭 끌어안고 불안한 눈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소열왕의 입술이 그의 귓가에 와 닿았다. 따뜻한 입김과 함께 나직한 목소리가 머리를 울린다. 

"그 편지를 소하군에게 가져다 주는거다." 
"예...옛?!" 
"그저 사신의 깃발을 들고 저 성문을 두드리면 되는거다. 알겠나? 성공하면.. 포상을 해주겠다." 

그리고 입술을 뗀 소열왕은 부드러운 입맞춤 대신 거친 손으로 서아의 머릿채를 휘어잡았다. 
그의 느슨한 옷깃 사이로로 새까만 흑요석으로 만들어진 목걸이가 길게 늘어져 서아의 뺨에 
닿았다. 차가웠다. 

"하지만 만약 바보같이 굴어 실패한다면." 

서아의 얼굴이 파리해졌다. 

"네놈을 다시 그 방에 가두어 둘 것이다." 
"저- 전하! 그것만은.." 
"그러니 성공하라지 않더냐." 

소열왕이 손을 놓자 서아의 몸은 힘없이 바닥에 나뒹굴었다. 그는 차갑게 웃으며 자신의 
침상으로 올라가 드러누웠다. 그곳에 서아가 누울자리는 없었다. 막사 밖을 바라보니 아침에 
자신을 비웃었던 그 병사들이 보초를 서고 있었다. 나가고 싶지 않았다. 
그는 두 손으로 어깨를 감싸고 오들오들 떨며 소열왕의 침상 밑으로 기어들어갔다. 조금 
따뜻했다. 아주 조금. 
그곳에 누운채로 막사 천막을 빼꼼히 들추었다. 눈만 간신히 내밀 구멍이 생겼다. 하늘이 
보였다. 짙은 남청빛 하늘에 별이 촘촘했다. 
저것은 소열왕.. 왕의 별 천랑성. 저것은 서아. 자신의 별이라고 했던 그 이름모를 별.. 그리고 
지상의 어둠을 깨듯 환히 빛나는 저 별... 

저 별... 



* 



사신의 깃발을 들고 한손에는 서찰을 들고 적군을 향해 달려가는 서아의 뒷모습을 보며 
병조판서가 나직히 한숨을 내쉬었다. 

"도대체 저런 바보같은 녀석을 왜 보내는 겁니까! 전하의 속은 알다가도 모를 노릇입니다." 
"글쎄- 원래 그러시지 않았소. 전생에 석가모니였던지. 태어나자마자 천상천하 유아독존이라고 
부르짖진 않았나 모르겠소이다." 

유철이다. 저런 말을 할 사람은 그 뿐이지. 영의정은 험험, 헛기침을 하며 그들이 모여있는 
막사로 들어갔다. 

"영상대감 납시셨소이까." 
"영상대감! 대감은 저 전하의 속내를 아시겠습니까?" 

낸들 알겠소. 영상은 엷게 미소지으며 고개를 내저었다. 
하지만 그는 알고 있었다. 그래, 누구보다도 소열왕과 소하군, 그 두형제를 가까이서 
지켜보았던 그가 아니던가. 소열왕이 태어나면서부터 태사관, 즉 왕자들의 스승으로서 그를 
지켜본 영의정이었다. 
소열왕의 속내라면 어렴풋이 짐작하는 것 만으로도 알 수 있었다. 

지금 이 전장의 묘한 분위기까지도. 

소하군이 병술의 천재라면 소열왕은 류의 스승격이다. 류가 알고있는 모든것은 그의 형인, 그 
절친한 형이었던 소열왕이 모두 가르쳐 준 것이기 때문이다. 
소열왕은 나면서부터 왕재라고 칭송받았던 인물이었다. 비록 지금은 방탕한 생활을 하고 
있지만. 
그래, 이 엉성한 진영. 소열왕이 이런 엉성한 진영과 어설픈 병술을 부릴 자가 아니다. 그것은 
즉 지금 소열왕은 이 전쟁에 전혀 관심이 없다는 말이 된다. 
류도 알고 있을 것이다. 형의 능력을 바로 곁에서 봐 온 그가 아니더냐. 

그래서 전력투구를 하지 않는 것이다. 그 첫날의 기습 이후 아무런 소식도 들리지 않는다. 사실 
그 기습도 어처구니 없는 것이었었다. 겉으로 보기엔 큰 피해를 입은 것 같았지만 사실 타격을 
입은 것은 거의 없었다. 부상병들뿐, 사망자는 거의 보이지 않았으니까. 

그런 지금, 사자를 보낸다? 

표면적으로 분석할 수 있는 것은 두가지다. 저 서아를 보냄으로서 문지기의 방심을 유도하여 
성에 쉽게 들어갈 수 있을것이다. 
그리고 잃어도 그만 돌아오면 이익인, 소모품일 뿐이다. 

이것은 저 병조판서와 유철 역시 파악하고 있을 것이다. 다만, 가장 중요한 점을 제외하고는. 

첫째. 서아는 한문을 하지 못한다. 그러므로 소하군은 구두로 말할 수가 없을 것이다. 소열왕은 
류의 친필서한을 받고 싶었을 것이다. 

둘째. 서아는.. 그렇지. 류로 하여금 '무언가'를 느끼게 할 수 있을 것이다. 소열왕이 노리는 
것은 바로 그것이었다. 자신이 서아를 안는 이유, 그것을 류에게 전달시키고 싶었을 것이다. 

예의상, 사자는 그 진영에서 음식과 잠자리를 대접받은 뒤 자신의 진영으로 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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