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기습 저녁식사를 안주로 대신하며 이양과 내가 한쪽 구석에 박혀 있는 이 곳은 양재사거리 4번 출구를 나와 작은 골목길로 들어서면 있는 지하의 <트로이>였다. 상당히 넓은 규모의 호프집이지만 규모에 비해 깔끔하고 제법 괜찮은 안주류와 라이브 공연을 볼 수 있는 곳으로 저녁 시간에는 대부분 빈 자리가 많지 않을 정도로 손님이 많아서 오히려 그 시끄러운 소리가 부담 없이 대화를 나누기에 아주 좋은 곳이기도 했다. 처음엔 별말 없이 허기진 배를 안주로 채우고 곧 이어 시작된 라이브 공연을 한 시간 가량 감상하고 나서야 우리는 본격적으로 피쳐를 비워가며 이야기를 시작했다. “강현주씨는 오늘 상담 후에 표정이 무척 밝던 걸요?” “그랬어요?” “네. 늘 어둡고 그늘지더니 오늘은 웃기까지 하던걸요.” “다행이군요.” “특별한 치료법이라도?” “그런게 어딨어요? 꾸준히 대화를 통해 문제를 해결해 나가는 거죠.” “그런데……” 이양이 고개를 갸웃하며 야릇한 표정을 짓는다. “아무리 봐도 오늘은 좀 달랐던 것 같아요.” “뭐가 궁금한 데요?” “그냥요.” “환자에 대한 것은 이야기 할 수 없다는 것, 수영씨도 알죠? 자, 술이나 마셔요.” 앞에 놓은 맥주잔을 들어 올리니 이양도 얼른 자신의 잔을 잡아 부딪혀 온다. “그런데 저 지금 최면 상태에요?” “무슨 소리에요?” “아까 저한테 최면 거신 거 아니셨어요?” “최면 안걸린다면서요?” “오늘은 걸리고 싶었거든요.” “그럼 걸렸나 보죠.” “어, 정말요? 진짜?” “허……” 어이없는 웃음이 나온다. “무슨 문제 있어요?” “그런 것 같아요?” “수영씨 긴 머리가 하루 아침에 단발로 변한 데는 그만한 이유가 있지 않겠어요?” “역시……” “말해 봐요. 뭐가 문젠지. 내가 도움이 될만한 것이 있으면.” 여자가 머리를 자를 땐 많은 경우 심리적 충격을 받았을 때라는 건 대부분의 사람들이 아는 일일 것이다. 170의 큰 키에 긴 생머리를 자랑스럽게 늘어뜨리고 다니던 이양이었는데 아침 출근하며 그녀를 보는 순간 나는 내심 깜짝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그 긴 머리는 어디 가고 학생처럼 짧은 단발머리로 변한 모습에 무어라 말조차 나오지 않았다. 그저 조심스레 그녀 앞을 지나 내 방으로 들어갈 뿐이었다. “남자 문제?” “뭐……” 말을 하다 말고 한 모금 크게 들이마신 그녀가 잔을 내밀었다. “건배!” “천천히 마셔요. 맥주도 취해요.” “어쩌죠? 오늘은 좀 취하고 싶은데.” “헐……” “전에는 신경 안쓰고 살았는데 좋은 조건이란 거… 참 중요한 것 같아요.” “조건에서 밀렸다?” “그런 셈이죠. 후후……” “어떤 조건인지 말해줄 수 있어요?” “조언 좀 해주시게요?” “그렇다기 보다 위로는 좀 해줄 수 있겠죠.” “별로 생각하고 싶지 않네요. 난 적어도 사랑이란 게 일반적인 조건보다 우선한다고 생각했거든요.” “음…… 그런데 지금은 생각이 바뀌었다?” “그건 아니에요. 단지 그것이 나만의 생각이었다는 걸 확인했다는 거죠.” 고개를 끄덕였다. 이해할 수 있다. 이양이 하는 말이 어떤 것인지. 세상엔 여러 부류의 사람이 있고, 그 부류 중엔 자신들과 동급 이상인 레벨의 사람만이 사람으로 보이는 조금은 특별한 사람들이 있곤 하니까. 이양의 답답함이 내게도 전이한 것인지 나도 모르게 잔을 들어 크게 한 모금 들이켰다. 목구멍을 가득 채우고 내려가는 차가움이 정신을 번쩍 들게 하다가는 이내 곧 몸을 데우며 정신을 흐리게 한다. 아무리 노력해도 나아지지 않는 알코올의 반격. 하루의 대부분을 신경을 곤두세우고 다른 이의 말과 사소한 행동과 복잡한 심리를 분석, 판단하는 일로 지쳐있는 내 몸이 점차 긴장을 늦춘다. 이것이 바로 내 의식의 일상탈출이라고 해야겠지. 한동안 의미없는 대화가 오가며 술을 들이켰다. 단지 술을 먹기 위한 안주로서의 대화였다고나 할까. 그러다 피쳐가 몇 번을 다시 온 이후 이양이 나를 향해 정색하고 물었다. “선생님은{출처:yadam4.net} 왜 아직 솔로세요?” “글쎄요.” “사귀는 분 없으세요?” “그거 알아요? 사귀는 사람이 있느냐고 묻는 사람과 사귀는 사람이 없느냐고 묻는 사람 사이에는 심리적 차이가 있다는 것.” “아, 그런 거에요? 어떤 차이가 있는 데요?” 무언가 재미있는 것이라도 찾았다는 듯, 이양의 눈이 반짝이기 시작했다. “전제의 차이, 또는 희망의 차이죠.” “음…… 그러니까 사귀는 사람이 있느냐고 묻는 것은 있을 것이다 전제 하는 것이고, 없느냐고 묻는 것은 없었으면 한다는 것?” “심리학에 소질이 있군요.” “뭐, 찍기에 소질이 있죠. 쿠……” 웃던 그녀가 웃음을 뚝 그치더니 놀란 듯한 시선으로 변했다. “그러니까…… 조금 전 제 질문은 선생님께 사귀는 사람이 없었으면 한다는 희망을 내포했다는 거네요?” “그럴 수도 있다는 거죠.” “만약 하신 말씀이 사실이라면…… 내 마음 속에서 선생님에 대한…… 음…… 그 어떤 마음이…… 그런… 건가요? 그렇게 해석해야 되는 거죠?” “꼭 그런 건 아니에요. 언어적 습관과도 관련이 있으니까요.” “흠……” 한 손으로 턱을 괴고 생각 속에 빠진 이양을 보며 개원하기 전 나를 도와줄 아가씨를 뽑기 위해 면접을 봤던 때가 생각이 났다. 여러 사람이 왔었지만 딱히 마음에 드는 사람은 없었다. 내가 마음으로 원한 조건은 단지 하나. 밝고 명랑한 사람이어야 한다는 것이었다. 상담하러 오는 손님들 대부분이 마음에 어둠을 갖고 있는 사람들인데 맞이하는 사람까지 어둡다면 그건 바람직하지 않다는 생각에서였다. 그러나 정작 찾아온 아가씨들은 거의 전부 취업이라는 것에 비중을 둔 무거운 표정들이거나 너무나 만들어진 표정들이었다. 원래의 성격이 어떤지는 모르지만 첫인상은 너무나 많은 것을 좌우하지 않던가? 개원일이 며칠 남지 않았음에도 아직 직원을 결정하지 못하고 있을 때, 누군가 문을 마구 두드렸었다. 개원 예정일 표시가 있음에도 누군가 벌써 상담하러 왔나 싶어 문을 열었을 때, 땀에 젖은 운동복을 입은 아가씨 하나가 숨을 헐떡이며 서 있었다. 바로 이양이었다. “실례하겠는데요. 여기 사람 구한다면서요?” “네?” “요 앞에 써있던데 아니에요?” “맞긴 한데… 미리 전화 하셨었나요?” “꼭 미리 전화하고 와야 하는 거에요? 지나가는 길에 사람 뽑는다고 해서 그냥 와봤는데…… 뭐, 알았습니다. 다시 전화하고 오죠.” 휙하니 고개를 돌리고 뒤로 묶은 긴 머리를 찰랑이며 다시 뛰어가는 그녀를 어이없이 바라봤다. 그러다 고개를 좌우로 흔들며 문을 닫고 다시 내 자리에 앉으려는 순간, 벨이 울렸다. “여보세요?” “좀 전에 들렸던 사람인데요.” “네?” “기억력이 영 아니신가 봐요. 쿡! 좀 전에 그러셨잖아요. 전화했었냐고. 그래서 전화하는 건데요. 아직 사람 뽑으시나요?” “아…… 조금 전 그 아가씨?” “맞을 걸요.” “허……” “사람 뽑으시면 이력서 들고 가면 되는 거죠?” “여기가 어떤 곳인지는 아세요?” “저 까막눈 아니거든요. 정신건강의학과라면서요. 흔히들 말하는 정신병원. 맞죠?” “괜찮으시겠어요?” “제가 정신병 있는 거 아닌데 뭐가 문제겠어요. 언제 갈까요? 아니, 지금 바로 갖고 가도 되죠? 좀 있다가 저 약속이 있어서 외출해야 하거든요. 아무래도 아주 늦게나 들어올 것 같은데…… 괜찮죠?” “그, 그러시던가요.” “알았습니다. 30분 내로 갑니당.” 그리곤, 뚝! 끊어진 전화기를 들고 나는 한동안 봉변당한 사람처럼 멍하니 서있어야 했었다. 결론적으로 말해서 나는 이양의 그 당돌함이 좋았다. 거침없이 직설적인 성격과 조금은 제멋대로인 듯싶지만 긍정적인 면도 나름 마음에 들었다. 더욱 좋았던 것은 그녀가 무척 건강하다는 것이었다. 나는 면접을 보러 온 아가씨들과 일부러 인사를 하며 악수를 청하곤 했었다. 이유는 간단했다. 손에 느껴지는 건강함, 체온의 정도를 알아보기 위해서였다. 육체는 영혼을 담고 있는 항아리와 같다고 나는 생각한다. 건강하고 튼튼한 항아리여야 그 속에 담고 있는 내용물도 건강할 수 있다는 것이 내 논지인 셈이다. 그런 면에서 이양은 내가 생각하는 직원, 아니 업무 파트너로서 가장 이상적인 지원자였다. 이양이 왜 내가 개원하는 곳에 지원을 했는지 그 이유가 가끔 이상하게 생각되고는 했었다. 제출한 이력서를 보며 더욱 그런 생각을 했다. 유명한 여대의 불문과 출신에 직전까지 대기업의 비서실에서 근무한 경력을 갖고 있었다. 마음만 먹으면 다시 좋은 직장을 얻을 수도 있을 법한 이양이 왜 별다른 좋은 조건마저 없는 곳에 지원을 했었던 것인지. 꼭 한 번 열어보고 싶은 비밀의 상자라는 생각이었다. 생각 속에 잠긴 이양을 보며 나도 생각 속을 거닐다 문득 시계를 보니 9시 반을 막 지나고 있었다. “왜 시계를 보세요? 가시게요?” “내일을 위해서 쉬어야죠.” “내일은 오전 예약도 없는 걸요.” 그런가? 그러고 보니 나오면서 내일의 일정을 깜빡 잊고 확인하지 못했다. “그래도 내방하시는 분이 언제 올지 알 수 없는 일이죠. 준비하고 기다려야……” “선생님.” “네?” 턱에서 손을 떼고 상체를 바로 하는 이양의 눈빛이 강렬하다. “오늘 저랑 잘래요?” 내가 지금 무슨 말을 들은 거지? 한 대 맞은 듯 정신이 멍하다. ‘조금만 더!’를 계속해서 외치더니 결국에는 술에 취해 비틀거리는 이양을 데리고 내가 갈만한 곳은 마땅히 없었다. 할 수 없이 택시를 타고 다시 사무실로 갈 수 밖에 없었고, 힘겹게 이양을 상담용 의자에 눕혀 놓고 턱에 찬 숨을 가누며 화장실로 가서 얼굴을 씻었다. 잠깐 오르던 취기가 가시고 있었다. 물기 가득한 얼굴로 거울을 들여다 봤다. 내 나이 34. 보통의 직장이었다면 한참 열심히 일할 나이였다. 그런 나이에 나는 지금 뭘 하고 있는 걸까? 집에서 나와 독립한 것이 벌써 몇 년. 과거의 상처는 이미 흔적만으로 화석화 되었지만 아직도 소화하지 못한 감정의 찌꺼기는 배 속 깊은 곳에서 때로 치밀어 오르곤 했다. 그래서 나는 주위의 기대와 역행하는 길로 나섰는지도 모른다. “헉……” 갑자기 거울 속에 나타난 산발한 여인의 모습에 그만 나도 모르게 답답한 신음을 흘렸다. “비, 비켜봐요. 우웨엑! 우웩! 켁켁……” 이런! 아무래도 저러다 변기 막힐 것 같다. “아우…… 등 좀…” “등요?” “네. 좀 두들겨주세요.” 등을 두들겨주자 이양이 위를 꺼내기라도 할 듯 역겨운 것들을 끝까지 끄집어 냈다. “아… 살 것 같다. 이제 좀 나가 주실래요?” “괜찮아요. 더 두들겨 줄까요?” 이양이 슬쩍 고개를 돌려 나를 째려봤다. 한 번도 본 적 없는 무서운 얼굴. “나 씻을 건데요!” 내가 화장실 한 켠을 보수해서 샤워부스를 만든 것이 실수였던 모양이다. 때로 집에 들어가기 늦은 날은 이곳에서 밤을 보낼 수 있도록 나름 생각했던 것인데. 하지만 어쩌랴? 이 상황에서는 조용히 나가는 수 밖에. 답답함에 창문을 열자 12시가 넘은 시간인데도 아직도 도로를 질주하는 차량들의 소리가 가득하다. 어디서 왔다가 어디로 가는지도 모르는 수많은 사람들 속에서 나도 내가 알지 못하는 어딘가로 흘러가고 있다는 생각에 공연스레 우울해졌다. 배낭을 둘러매고 집을 나설 때 내 등에 대고 외치던 새 엄마의 목소리가 다시 귓가에 울렸다. “세상에 나가서 고생을 해보면 알게 될 거다. 세상이란 것이 결코 만만치 않다는 걸 말야. 그러니까 너무 늦기 전에 마음 돌리는 게 나을 거야. 아주 늦으면 이 집에서 너의 자리는 없을 테니까 말야. 기억해 둬. 니가 날 인정하든 안하든 누가 뭐라고 해도 난 이 집의 안주인이란 걸. 난 너에 대해서도 엄마로서의 권리가 있다고!” 그래, 세상은 녹녹치 않다. 그건 이미 독립을 실행에 옮긴 순간부터 날마다 체험해왔다. 그렇지만 나도 만만치는 않다. 내가 여기 이렇게 서 있다는 것이 바로 그 증거다. 나도 결코 쉽게 꺾이지는 않을 것이다. 세상을 향해서도, 내 엄마의 기억에 대해서도. “뭔 생각을 그렇게 하세요?” 뒤 돌아보니 이양이 다시 멀쩡해진 얼굴로 서 있었다. 그런데 어째 저 옷이 눈에 익지? 가만, 저거 아무리 봐도 내 옷 같은데. “그 옷, 혹시…” “맞아요. 선생님 꺼. 옷을 좀 버려서…… 헤헤…… 옷걸이에 걸려 있길래 입었는데 어때요? 봐줄 만 해요?” 내 아웃도어 점퍼를 입고 한 바퀴 돌아 보이는 이양의 모습에 어이없는 웃음이 나왔다. 치마를 입고 그 위에 아웃도어 점퍼라. “그러네요. 그건 그렇고 집에 가봐야죠? 시간이 늦었는데.” “그래야겠죠?” 또 아까처럼 무슨 폭탄발언을 하려는지 긴장이 됐다. “그래야 할까요?” “부모님 걱정하실 텐데……” “선생님 저에게 정말 관심 없으시군요.” “그게 무슨 말이에요?” “요새 저 혼자 살잖아요.” “혼자… 요? 부모님하고 같이 있다고 하지 않았어요?” “그럴 줄 알았어요. 당분간 오빠네 내려가 계시기로 했다고 말씀 드린 것 기억 안나시죠?” 그랬군. 얼핏 들은 것도 같은데 딱히 기억에는 없었다. “그래도 늦은 시간이니 집에 가야죠. 매일 출근도 해야 하고.” “그렇긴 하죠. 그런데 이 시간에 집에 가면 내일 아침에 여기 제 시간에 올까 싶어요. 깨워줄 사람도 없고.” “좀 늦어도 괜찮으니 걱정 말아요.” “그럼 고맙지만 이 늦은 시간에 여자 혼자 집에 가라고요?” “데려다 줄게요.” 이양의 집은 그리 멀지 않은 아파트였다. 걸어서 가면 30분 정도. 매일 아침 조깅을 한다는 이양의 뜀박질이면 몇 분 걸리지 않지 않을까? 하긴 오늘은 술로 인해서 뛰어가지는 못하겠지. 뛰다가 다시 토하는 상상을 하니 왠지 웃음이 나왔다. “뭔 웃음이 그래요?” 들켰다. “아무 것도 아니에요.” “아니긴요! 뭔가 있는 것 같은데.” 왜 그러지? 이양이 자꾸 다가온다. 어째 영 불안하다. “뒷걸음질로 도망가시려는 것도 이상하고. 아무래도 뭔가 불순한 생각을 한 것 같은데요? 그죠?” 늦은 밤 이렇게 남녀가 한 공간에 있다는 것이 불편하기만 하다. 어서 문제를 해결해야겠다. “정신 들었으면 나가요. 집까지 바래다 줄 테니.” 문을 향해 걸어가는 내 팔을 이양이 붙잡았다. “잠깐만요.” “왜, 왜요?” “아까 제가 그랬잖아요. 저랑 잘 거냐고.” 오, 마이 갓!