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친구네 가게인 거 같은데…” “네, 친구에요” “친한 친구 같네요?” “네……” “너무 60년 대 식이었죠?” “네?” “차 한 잔 하자고. 하하” “아~ 네…. 맞아요” 그제서야 여자의 입가에 웃음이 번진다. 경계했을 것이다. 생전 첨 보는 남자 아닌가? “어쩌면 그래서 앉았는지도 모르죠” “네?” “옛날 식의 뻔한 수작이 편하게 했는지도” “수작이라니? 하하하” “……” “수작 맞네요. 인정합니다” “호호” “수작에 넘어오신 걸로 알아도 될까요? 그럼?” “아직은요. 아직은 잘 모르겠어요” “그렇군요. 잘 모르시는 거군요” “그냥 아까 내가 읽은 책을 누가 읽나 궁금해서 언뜻 봤어요” “알아요. 근데 언제 읽으셨어요?” “작년인가, 재작년인가 그래요” “세 권 다요?” “네. 다 읽죠 그럼. 읽다가 마나요” “재밌던가요?” “글쎄…… 재미로 읽는 책은 아니지만, 그래도 끝까지는 읽었어요” “어떤 책이었죠?” “읽고 계시잖아요?” “그래도….. 듣고 싶은데요.” 어쩌면 처음 만난 남자와 여자가 할 얘기라는 것이 그렇게 딱히 있는 것도 아닌데, 호구조사부터 시작하지 않아서 다행이다. 처음 만나는 사람끼리의 호구조사는 피곤한 통과의례다. 몇 살이세요, 어디 사시고, 뭐 하시는 분이세요……따위가 정말 중요한 질문들은 아닌데, 통과의례처럼 그런 얘기들로 시작된 대화는 따분하다. “푸코의 책들은, 너무 방대한 자료들이 인용되거나 깔려있어서 다른 문화권 사람들이 읽기에는 불편하잖아요” “맞아요. 제가 동양 문화권에 태어난 사실이 처음 원망스러웠던 이유도, 푸코 때문이었는지도 모르겠어요” “그래요? 저도 그랬어요” “네, 종교적 배경, 문화적 배경이 너무 다른 이질의 문화권에 존재한다는 것 자체가 많은 한계를 느끼게 했지요” “맞아요” “푸코도 동양문화권의 배경에 대한 이해가 없었다면 우리 같은 절망을 느꼈을까요? 하하” “그럴지도 모르죠” “그냥 신화적 세계관이면 덜 하겠는데, 종교사까지 포함되어야 하니깐. 더 쉽지 않더군요” “네” “왜 하필 그 책을 골라 읽으셨어요?” “그 책이 어때서요?” “[성의 역사]라는 제목이…… 선뜻 집어들게 되는 건 아닌 듯 해서…” “편견이죠. 제가 여자라서 그렇죠?” “그렇기도 하고. 어떤 면에서 보면 여자가 더 보수적인 게 일반적인 이해 아닌가요? 성에 대해서?” “그렇기도 하지만, 성은 두 바퀴의 굴레죠. 남자와 여자가 같이 굴러가는 두 바퀴의 굴레…” “아~ 그렇지요” “남자 혼자 한 바퀴로 굴러가는 수레는 제 자리일 뿐, 앞으로 나가지 못하죠” “그래요. 너무 지당한 말인 거는 같은데, 적어도 겉으로 드러나는 것이 아니어서. 폐쇄적인 느낌이 강하죠. 여자의 성은” “폐쇄적이라 해도 굴러가는 수레바퀴랍니다” 당당하다. 성에 대한 담론을 이렇게 당당하게 얘기하는 여자는 본 적이 없다. 성에 대해 당당한 여자는 성에 대해 개방적이다라는 등식이 성립할 지는 모르지만 이 여자는 당당하다. “성에 부여한 권력의 속성에 동의하셨어요?” “그럴 수 밖에 없는 것 아닌가요? 성과 권력은 동질의 것일 수 밖에 없는 거” “권력을 배제한 성도 가능하기는 하지 않을까요?” “물론, 사회사적으로 보지 않으면 그리고 통사적으로 보지 않으면 가능할 수도 있지요” “그런 성을 꿈꾸어 본 적이 있나요?” 나는 여자를 바라보았다. 겨울이었고, 여자는 검은 롱 부츠를 신고 있었다. 다리가 더 길게 보였고 검은 니트 스커트와 역시 검은 색 스타킹 사이로 드러난 무릎 쯤이 가늘었다. 윗옷은 역시 니트 터틀넥에 검은 색 가죽 조끼를 입고 있었다. 온통 검은 색으로 드러난 여자의 몸매는 무엇인가를 도발하는 듯한 당당함이 넘쳐났다. 거기에 긴 손톱과 그로테스크한 매니큐어의 컬러까지 나를 한 편으로 주눅들게 만드는 무엇인가가 있었다. 그 주눅에 돌을 던진다. “대답하기 불편하시면 안 하셔도 됩니다. 그냥 차나 마시죠” “아뇨, 불편할 건 없어요” “그런 자세가 성에 대한 여자들의 폐쇄성을 드러내는 거 같은데…” 또 하나의 돌을 던진다. 그러나 그 돌은 이어져 나온 여자의 대답에 흔적도 없이 수면 속으로 사라졌다. “아까 그 친구, 어디 갔는지 아세요?” “네?” “나한테 가게 맡기고 애인 만나러 갔어요” “아~” “근데 더 우스운 건요, 그 애인이 누군지 아세요?” “네? 누군데요?” “제 남편이랍니다” “네?” 순간 숨이 턱하고 막혔다. “아무리……” “호호호, 왜요? 아닌 것 같죠?” “그래요. 쉽게 이해하기 어려운 말이지 않나요? 어떻게?” “그래요. 쉽게 이해하기 어려운 일이죠. 근데 세상에는 그런 관계도 있답니다.” 있다고 치자. 아니 있다고 하는 당사자가 내 앞에 있으니, 있는 것이다. 그래도 쉽게 이해가 되지 않는다. 여자가 차를 한 모금 마신다. 나는 또 다시 담배를 꺼내 물었다. “담배 피워도 괜찮지요?” “네. 피세요. 전 괜찮아요” “고맙습니다” 여자의 입술이 빨갛다. 립스틱을 바른 지 얼마 안 되어 보인다. 빨간 립스틱이 커피 잔에 묻어져 나온다. “어떻게……” 잠시간의 침묵도 숨이 막혔다. 그래서 꺼낸 말이 이 말이다. 제길, 하지 않았어야 할 말일지도 모른다. “궁금해요? 호기심?” “네, 궁금하지 않을 수가 없네요” “궁금하다…… 제가 대답해드릴 의무는 없지요?” “물론입니다” 가끔 그런 얘기들을 들었었다. 일반적인 관계와 관계의 틀을 허무는 관계도 현실에 존재한다. 그 일반적이지 않은 관계라는 것들이 일반적인 관계의 틀 속에 사는 사람들에게는 충격적인 일이기도 하지만 그렇다고 그 모든 것들을 그르다고 부정 할 수 있을까? 그런 관계를 꿈 꾸는 사람들도 분명히 존재할 지 모르고, 어떤 잣대가 지금은 옳지 않다고 해도 그것이 과거에도 옳지 않았다거나 앞으로도 쭈욱 옳지 않을 지도 모른다는 예단은 또 얼마나 위험한 추론인가. “그래도 그렇게 충격적이지는 않네요” 난 내 관용을 드러내 보임으로서 이야기를 객관화시키려 했는지도 모른다. “그런 얘기들 들어본 거 같아요” “어떤 얘기요?” “공유한다는 얘기…… 서로가 공유하는 섹스도 있다고” “그래요?” “네, 이해 못할 것도 없다고, 어떻게 보면 그게 조금 더 나은 섹스의 전형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한 적도 있어요” “그래요?” 사실이니깐, 그렇게 생각한 적이 있는 것이 사실이니깐. “궁금한 건, 그런 관계를 받아들이는 그 쪽의 심정이죠” “받아들이는 문제는 아니었어요. 제가 권한 관계니까” “네? 하긴 그러니 대신 가게도 지켜주시겠죠” “그렇죠, 그건” “근데, 지금쯤 하고 있을까요?” “네?” “지금쯤 하고 있을지도 모르잖아요?” “아~. 그럴지도 모르죠 호호” 의외다. 여자가 웃는다. 하긴 울면서 할 얘기 웃으면서 할 얘기가 따로 있는 것이 아니니깐. “그런 상상 안 해요?” “어떤?” “지금쯤 하겠다. 아니면 지금쯤 어떻겠다. 그런…” “왜요, 하지요” “하면 어때요?” “질투심이 생기나요?” “질투요? 호호호” “네, 질투요. 저는 솔직히 그 상상만으로도 지금 흥분이 되는데” “그래요? 하고 싶어요?” 너무 직설적이다. 왠지 이 여자 못 당할 것 같다는 느낌이 든다. “그럼요. 제가 상상력이 원래 출중하다 보니. 하하” “그래요? 원래 그렇게 성욕을 통제하지 못하세요?” 연 이은 공격이다. “통제라니요. 성욕이 통제될 때는 상대가 내 성욕의 대상이 아닐 때 뿐이지 않나요?” “그럼 제가 성욕의 대상인가요?” “아니요, 그런 말이 아니라. 나 혼자 생각하고 나 혼자 자극되는 성욕은 not guilty입니다. 하하” “아~ 그러네요” 날 놀리는 걸까? 여자의 대담한 드라이브에 이리 저리 막기 급급하다. 한심한 넘. “같이는 안 하시나 보지요?” “……” 공을 넘겼다. 내 딴에는 최대한 가속을 한 드라이브다. “우리 얘기가 어쩌다 여기까지 왔나요? 호호” “글쎄요. 어쩌면 작은 연대의식에서 출발했는지도 모르지요. 같은 책을 읽었다는” “그런가요? 그래도 그러기에는 불충분해요” “거기에 뭔가가 또 있었겠지요. 제 60 년대식 수작 같은” “호호호, 아니예요. 착각하지 마세요” “착각인가? 하긴 그런 수작에 넘어갈 사람으로 보이지는 않네요” “호호호” 어쩌면 관계의 경계를 무너뜨리는 무엇인가는 내가 의도하지 않는 어떤 모티브에 기인할 때가 많다. 지금 이 전개의 모티브가 무엇이었을까. “제가요, 지적 집착이 큰 편이라서요, 어쩌면 그 집착이 하나의 계기가 되었을지도 모르겠네요” “그래요? 전 또 그렇게 지적 소양이 풍부한 사람은 아닌데” “그랬거나 아니거나, 여튼 온통 무식함이 철철 넘치는 사람에게는 끌린 적이 별로 없어요” 갑자기 여자의 오만함이 귀에 거슬렸다. 알면 얼마나 알고 또 모르면 얼마나 모른다고. 사람이 사람하고 살아가는 세상에 지적 편위가 얼마나 큰 변별점을 지닌다고. 여자의 오만함을 깨부수고 싶은 욕망이 또아리를 틀었다. 난 망치를 들었다. “같이는 안 해 보셨어요?” “아뇨, 같이 했어요. 처음에는” “지금은 같이 안 하고요?” “뭐 대부분 같이 안 하기는 해요” 막힘이 없다. 쉽게 대답할 얘기는 아닐지도 모르지만 어떤 소재에 대한 한계의 벽은 무너진 지 꽤 된 듯하다. “왜 같이 안 하세요? 같이 할려고 맺은 관계 아니었었나요?” “그렇기는 했어요. 처음 시작은” “어떤 시작이었는데요?” “권태요, 무료함 같은 거” “아~, 한 편으로는 익숙함에 대한 거부 같은 거?” “호호 잘 아시네요” “누구든 하는 생각이죠, 거기까지는. 다만 그 거부가 현실에서 실현되느냐의 차이만 존재할 뿐” “아~ 맞아요. 그건 그런 거 같네요” “거긴 그렇다 치더라도, 친구는?” “처음부터 그랬던 거는 아니지요 물론” “그럼?” “처음엔 남편이 상대를 구해왔어요. 물론 한 번, 한 번의 섹스였지만, 남편하고 하는 모습을 보여주기부터 시작해서, 남편은 빠지고 셋이 하거나 같이 하는 단계까지 진행이 됐지요” “아~ 점점 더 큰 자극에로의 수렴이었나 보네요?” “그랬나요?” “그런 셈이죠. 다른 자극, 더 큰 자극에로 수렴이 되는 자극의 일반적인 작동원리죠” “그랬었던 거 같네요” “그럼 친구는?” “그러다가 남편이 새로운 관계에 대해 말을 꺼내기 시작했죠” “남자가 둘인 관계가 아니라 여자가 둘인 섹스?” “네. 맞아요. 그런 섹스요. 하두 애원을 하고 협박을 하길래 직접 구해오면 한다고 장난 삼아 얘기했더니 그걸 허락으로 들었나 보더군요” “그래요?” “근데, 그런 여자를 찾는 게 보통 일은 아니지요. 돈으로 사오는 관계는 싫다고 단호하게 얘기했더니 어떻게 어떻게 자리를 마련하려고 애쓰더군요” “그래요? 그러다가 결국은 그 쪽에서?” “네, 그런 셈이죠. 이 친구는 그 때 벌써 혼자였으니깐” “친구끼리는 꺼내기 쉽지 않은 얘기였을텐데” “그렇게 쉽게 꺼낼 얘기는 아니지만, 이 친구는 제겐 특별했으니깐요” “어떤 의미의?” “친구랑 저랑은 이미 바이였어요” 여자는 이렇게 내 예상과 한계를 늘 앞서 뛰어 넘는다. “아~ 그래서……” “네, 대학 때부터……” “결혼 후에도 그럼 관계는?” “신혼 때를 빼고는 아마 계속 됐겠지요” “그럼 결과적으로 질투의 대상이 둘이 되는 게 아닌가요? 제가 바이를 잘 몰라서” “그렇기도 하고 아니기도 하지요” “어떤 면에서?” “둘 다 가질 수 있는 길이기도 하니까요?” “그런가? 섹스도 소유의 대상?” “아니요. 그런 소유와 집착은 예전에 버렸습니다” “그런 것도 사랑인가요?” “사랑요? 글쎄 어떤 규정을 지어야한다면…… 그렇지만 사랑보다는 관계라고 믿고 싶네요” “관계라…… 섹스와 근접한?” “아니 보다 넓은 의미의. 그러나 섹스를 포괄하는 관계요” 내 눈앞에 스스로의 특별한 성적 아이덴티티를 커밍아웃하는 여자가 앉아있다. 이런 특별한 경험이 내게로 다가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