클럽 - ‘계단 끝에서 그를 사다’ (1) 클럽 에피소드 1 : ‘계단 끝에서 그를 사다’ written by. 조반유리 승훈은 열 일곱 살 때 소년원을 다녀왔다. 별 거 아닌 이유였는데, 동네 사는 깡패 녀석을 팼던 것이 그 이유였다. 왜 팼는지는 기억나지 않는다. 그 또래 쯤에 흔히 있는 다혈질에 혈기 왕성한 질풍노도..뭐 그런 것 때문이었나. 아무튼, 돌아와 보니, 부모님은 이혼하시겠다고 말했다. 원래부터 딱히 사이도 안 좋았기에 승훈은 별로 신경쓰지 않았다. 그리고 가난했기 때문에 부모님이 아니라 신들이 이혼하겠다고 해도 그는 먹고 살길 만이 고민일 뿐이었다. 승훈이 사는 곳은 서울에서 아직도 가장 가난하다는 동네였다. 그 동네는 수없는 계단을 올라가야 끝이 보이는 집들, 즉 달동네였다. 엄밀히 말하자면, 승훈은 그 달동네와 거리 하나를 사이에 두고 있는 낡은 아파트에 살았다. 아주 어릴 때부터 거기 살았다. 부모님이 이혼하고 어느 쪽도 승훈을 맡지 않겠다고 말했을 때도 그는 홀로 아파트에 남았다. 스무 살이 되었을 때, 그는 압구정동에서 가장 유명한 호스트 바에 취직했다. 역시 이유같은 건 별로 없었다. 그냥 고등학교도 졸업하지 못했고 내세울 거라곤 반반한 외모 밖에는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스무 살 이후로, 승훈은 그 전의 자신의 모든 기억들에서 냉정하게 등을 돌렸다. 자신은 스무 살을 기준으로 그 이후로만 존재하는 화려한 호스트 라고만 생각했다. 그러나 자신이 여전히 머물고 있는 것은 태어날 때부터 그 동네였다. 가끔 출근하기 위해서 차를 몰고 나오다 보면, 달동네로 올라가는 계단 끝에 누군가 앉아 쉬고 있었다. 몹시 더운 여름 날, 곧잘 그러고 있었는데, 그는 바로 ‘강지윤’이라는 이름이었다. 그가 집을 비운 어머니 대신 슈퍼에 반찬꺼리를 사러왔다는 걸 알고 있었다. 자주가는 슈퍼는 바로 그 긴 계단의 끝에 있었다. 지윤과는 그저 어린 시절부터 조금 아는 사이다. 좁은 거리였고 몹시 더웠으므로, 승훈은 가끔 차를 멈추고 그에게 아이스크림을 사 주곤 했다. 그렇다고 지윤을 특별히 생각한 것은 하나도 없었다. 지윤은 달동네에서도 그저 왕따였고, 자신은 이 동네를 뜨는 것만이 목적이었다. 언젠간 떠날 가난한 동네였기 때문에 승훈은 그저 변덕을 부린 것이었다. 그가 아이스크림을 사주고 떠나면, 자신의 차 백밀러로 지윤이 계단에 여전히 걸터앉아 아이스크림을 먹는 것이 보였다. 그는 자주 그랬지만, 그 사실을 전혀 기억조차 못하고 있었다. 그 계절이 여름이었는지 겨울이었는지도 가끔 잊곤 했다. 한마디로 승훈은 그냥 이 동네에서 어울리지 않는 값비싼 외제차에서 내려, 자신의 허세를 자랑하는 수단으로 그에게 아이스크림을 사준 것이었다. 사실 기억하기에는 지윤이 너무 초라했고 아무 의미도 없었다. 더군다나 자신은 다른 세상에 살겠다는 야망으로 너무나 가득차 있었다. 그것이 잘못은 아니지 않은가. 누구나 지금보다 나은 현실을 꿈꾼다. 그리고 그 때문에 잠시 자신이 비열하고 인간 이하이며 나쁜 사내가 된다고 해도 전혀 후회가 없다. 어차피 성공하고 나면 모든 것은 잊혀진다. 그렇게 2년이 흘렀다. *********************** 임승훈은 압구정동 호스트 바 Ananomi에서 가장 잘 나가는 호스트 중 하나였다. 그는 이 일을 천부적이라고까지는 아니지만, 어느 정도 즐기는 부익 계층에 속했다. Ananomi 는 고급 샹들리에와 융단으로 장식된 실내 내장과 수입 원목으로 짜여진 인테리어를 갖추고 있었다. 어느 쪽으로 보아도 Ananomi는 한국에서 가장 괜찮고 품격있는 호스트 바 중에 하나라고 여겨질 공간이다. 승훈은 그 안에서도 가장 수려한 외모와 늘씬한 몸, 그리고 조금은 방탕해 보이는 라이프 스타일로 인기를 모으고 있었다. 어쩌면 그가 가진 수완 중에 하나, 즉 그토록 새끈한 외모에 조금은 거칠어 보이는 묘한 매력 때문인지도 모른다. 아무튼 그의 인기는 그의 건방짐과 걸맞게 명성이 자자한 편이었다. 호스트 생활 2년 째, 스물 둘의 승훈에게 만약 강지윤이라는 복병이 나타나지 않았더라면 그는 필시 더욱 그 생활을 즐겼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가끔 삶은 자신이 생각하는 것처럼 그렇게 호락 호락 넘어가 주질 않는다. 언젠가 그 지지리도 간난한 동네의 계단 끝에 앉아 자신이 내민 아이스크림을 먹던 그 인간. 강지윤이 갑자기 이 호스트 바 Ananomi에 나타난 것이다. 그것도 Ananomi에서 가장 거칠고, 비열하고 이기적이고 그러면서도 가장 인기가 높은 임승훈을 찾아왔다고 말했다. 그리고 일 자리를 좀 달라고 부탁했다. 그것이 이 모든 일의 시작이었다. 1. 누군가 등뒤에서 요란한 소리를 내며 접시를 깼다. 이제 스물 두 살이 된 승훈이 그 소리에 아직 적응이 안 된다. 그는 짜증 섞인 듯 머리카락을 몇 번 거칠게 긁어 버린다. 이럴 때 뒤돌아보면 정말 욕이 튀어나올 것 같아 골백번을 참고 있다. 접시를 깨뜨린 녀석이 누군지는 뻔하다. 바로 몇 달 전에 신입으로 들어온 스물 세 살짜리 서비스 맨 '지윤'의 행동이다. 이른바 강지윤. 뭐 하나 잘 난 거 없고 제대로 할 줄 아는 것도 없이 그저 승훈을 따라 덜컥 취직해 버린 머저리 같은 인간. 그것이 지윤을 대하는 승훈의 방식이다. 한마디로 지윤은 날마다 승훈의 일상을 치고 들어와 괴롭히는 촌뜨기 얼닭이라는 것이 그의 생각이다. "제대로 좀 할 수 없어!?" 어릴 때부터 지윤의 그런 모습을 보아온 승훈은 아예 존댓말이란 씨로 말아먹듯 내동댕이친다. 그에게는 지윤이라는 존재 자체가 늘 짜증이 났다. 지금만 해도 그렇다. 호스트를 할 기질은 아예 보이지 않아 싹수 노랗게 포기해 버린 인간이 접시도 하나 제대로 못 나른다. 아주 환장하겠다. 움찔. 그러나 조금 언성이 높아진 승훈의 태도에도 금방 마음이 움츠러드는지 그 볼품없는 외양을 한껏 움찔거리며 지윤이 부지런히 깨진 접시를 담았다. 부글 부글 거리는 마음을 애써 누르며, 승훈은 지윤의 팔꿈치를 휙 잡아당긴다. "창고 안에 빗자루 있거든, 강지윤. 그냥 대충 쓸어 담지 그래? " "............아..." 뭐가 도대체 '아'냐... 승훈은 기가 막히다는 듯 허찬 웃음을 지으며 말없이 등을 휙 돌렸다. 정말 한 두 해도 아니고, 노는 물이 달라서 서로 못 봐주는 사이가 될 것 같다. 2. 엄밀히 말하자면 강지윤은 임승훈의 친구 형이다. 기껏해봤자 한 살 차이 밖에 나지 않는 지윤은 어린 시절부터 골목에서 자주 마주치곤 했었는데, 찢어지게 가난한 그 집안 살림 때문에 날마다 놀림을 당하기 일쑤였다. 지윤의 동생이자 승훈의 친구인 ‘지석’은 별로 그 일을 문제삼지 않았지만, 형인 지윤은 말수가 적은 아이였다. 그 때문인지도 모른다. 어릴 때부터 놀림을 당한 것은... 자신에 대해 아무런 변명도 할 줄 모르는 머저리가, 바로 지윤을 바라보는 승훈의 시각이다. "지윤이 좀 잘 교육 시켜봐, 임승훈. 니가 그래도 우리 클럽에서는 잘 나가는 인물 중 하나잖아?" 프런트에서 계산기를 두드리던 사장 대철이 한마디 힐끗 던진다. 그 말의 저의를 잘 알고 있다. 호스트 생활 2년. 어느덧 어른들의 규칙을 잘 이해하게 되었다. 어느만큼 속물이 되었다고 욕해도 상관없다. 처음부터 속물인 인간이 어디에 있나. 승훈은 지금 Ananomi의 가장 잘나가는 호스트 중 하나다. 잘 나간다는 것은, 손님들의 호출이 많고 돈 벌이가 짭짤하다는 의미다. 이른바 바 안에서 같이 파트너를 해 주는 1차를 떠나서 2차 3차까지 불려다니면 그 만큼 팁도 많아진다. 대철에게 매일 상납하는 실제 거래액 외에 나머지 부수입은 모두 승훈 자신의 것이다. 그만큼 그는 Ananomi에서 인기인이었다. 그런 그에게 재수 없는 인간이 나타난 것은 바로 몇 달 전의 일이다. 승승장구하며 여자나 남자 모두를 거머쥐고 즐기던 삶에서 갑자기 촌닭의 보호자같은 역할로 하락해 버렸다. 승훈은 자존심도 상했지만, 무엇보다 성질이 났다. 일주일 전에 지윤이 그야 말로 산 사오년 전에 유행이 끝난 허름한 잠바를 입고 꾸부정하게 Ananomi의 입구에서 쭈빗거린 것이다. 그가 입고 있던 중년 잠바, 가짜 메이커를 생각할 때마다 승훈은 머리가 지끈 지끈 아파왔다. 입구에서 지윤이 찾은 사람이 다름 아닌 승훈이었다. 승훈은 지윤의 동생인 지석과는 그런대로 친한 편이었다. 지석은 자신의 형에 대해 별 말 하지 않았다. 다만 너무 순수해서 마음이 아픈 형..이라고만 말하며 삐딱하게 웃곤 했다. 그들 모두에게 지윤은 동네 뒷골목 어디에도 끼지 못하는 때 국물 흐르는 아이..라는 것이 거의 사실이었다. 나이를 먹어도 그 사실에는 변함이 없었다. 그런데 하필이면 그 강지윤이 떡하니 Ananomi의 입구에서 승훈을 찾았다. 그리고는 못내 당황해하는 승훈과는 상관없이 그 초라한 행색으로 떠듬 떠듬 일자리를 달라고 말했다. 한마디로 결론은 그것이었다. 어머니와 단 셋이 살았던 지윤에게서 지석이 바로 군대에 입대한 것이다. 지윤은 정말 일자리가 필요했던 것이다. 그리고는 기가 막힌 승훈을 향해, 고개도 제대로 들지 못하며 그가 덧붙였다. ‘믿을 것이 너 밖에 없어서..’라고. 그 말을 듣는 순간, 승훈은 갑자기 짜증과 분노가 차오르는 기분이 되었다. 그 날 이례로 그의 기분은 계속 하향 곡선을 그린다. ********************** 만약 결과가 좋으면 다 좋은 것이라고... 지윤이 문득 나타나서 일이나 잘 했으면 승훈이 그렇게까지 짜증을 내진 않는다. 그러나 어린 시절 동네나 학교 모두의 '왕따'였던 강지윤이 일이라고 썩 잘하는 종자냐 하면 그건 또 아니었다. 어쩔 수 없이 생색 내기 식으로 소개 시켜 준 일이 바로 Ananomi의 룸서비스 일이었는데, 그는 어지간한 서빙도 제대로 못하기 일쑤였다. 오늘만 해도 그렇다. 벌써 몇 번 째 접시를 깨는지 , 혹은 술 종류를 기억하지 못하는지 헤아리기도 힘들다. 임승훈도 그다지 인내심 깊은 편은 아니었지만, 쉽게 쉽게 자라온 편이라서 이런 종류의 일에는 짜증이 났다. 아니 돈 쉽게 잘 벌고 인기 호스트 2년차인 자신이 왜 이 촌닭의 뒤치다꺼리를 해야하는지, 그 자체가 이미 이해가지 않는다. 휘익- 머리를 성가시듯 쓸어 넘기며 승훈은 룸의 문을 열었다. 아직 손님들이 올 시간이 안됐기 때문에 룸 안에서는 다른 녀석들이 담배를 피며 농담을 즐기고 있었다. 승훈이 들어서는 순간, 그 찡그린 듯한 인상에 다들 조금 의아한 눈초리였고, 이내 무슨 이유인지 생각났다는 듯 규철이 힐쭉거린다. "그러지 말고 아예 호스트로 만드는 거 어떠냐, 임승훈? 그 새끼 내가 보기에 인물은 꽤 반반하던데.............." 하아~라고 승훈은 짧게 쓴 웃음을 짓는다. 아직 초저녁인데 벌써 피곤해 진다. 오후 4시에 출근해서 이것 저것 준비하고 오픈함과 동시에 손님들의 예약을 받는 그로써는 지윤의 존재자체가 계속 걸리적거리는 거다. 누가 뭐래도 자신의 이름을 팔고 Ananomi에 취직했으니 절대 빠져 나갈 수가 없다. 정말 말 그대로 체면도 있고 해서, 울며 겨자먹기로 취직시킨 거지만, 한마디로 부글거린다. 이제는 자신보다 호출이 한참 덜 들어오는 규철마저 이 일에 비웃듯 하얀 이빨을 드러낸 것이다. 규철과의 묘한 라이벌 의식을 생각하면 그 일은 더욱 성질이 난다. "강지윤이 호스트를 하느니 내가 성을 간다, 김규철." 승훈이 이를 갈 듯 툭- 한마디 내 던지자 규철의 옆에 있던 서유가 막 웃음을 터뜨린다. 뭐가 그렇게 즐거운 걸까. 내가? 아니면 강지윤이? 하긴 나도 내 꼬락서니가 갑자기 우스우니 할 말 다 한 거다. "넌 좀 혼나 봐야 해, 임승훈." 왜 그랬을까. 그 순간에.. 아마 갑자기 싸움이라도 벌일 듯, 반짝이는 눈동자로 즐겁게 응시하는 규철 때문이었을까. 혹은 녀석이 던지는 그 건방진 말에 대한 반발심 때문이었을까. 승훈은 그 순간에 원하지도 않는 말을 불쑥 내 뱉고 말았다. "내가 떠나면서 강지윤을 대타로 남겨 놓고 나가면 속이 시원하겠냐?" 한 눈에 보아도 값비싼 양복을 셔츠를 갑자기 둘둘 말아 올리며, 승훈은 규철을 향해 비웃었다. 그런다고 니가 다시 지명도 1위가 될 거 같아? 오라..너 같은 새끼가 이 세계에서 그래도 일 순위라도 되고 싶은 게 꿈인가보지? 규철은 자신에게 실적 1순위를 빼앗긴 것이 아쉬운 것이다. 물론 승훈의 말은 아무 생각 없이 튀어나온 비꼬임에 불과했다. 문제는 규철의 반응에 있었다. 그는 승훈의 제안이 몹시 흥미롭다는 듯, 달콤하게 미소지으며 불쑥 앞으로 상체를 내민다. "재미있겠는걸? 해 볼 수 있으면 한번 해보시지, 임승훈" “깝치지 말고 니 손님 관리나 잘 해라.” “이건 어때, 그럼? 니가 예전부터 애태우고 있던 내 손님, 원주연을 너에게 넘길게. 땡기는 제안 아냐? 너 정도의 속물이라면 틀림없이 끌릴텐데?“ “.......-!!!!!!!” 그것은 흥미로운 제안이었다. 규철이 주연의 이름을 꺼내는 순간, 룸에 있던 호스트들의 눈이 일순 그에게 쏠린다. 장난처럼 웃고 있던 녀석들의 얼굴이 조금은 진지해진 것이다. 승훈도 눈이 번쩍 뜨이는 기분이다. 예사롭지 않은 제안이다. 원주연이라면, 우리나라 제 일의 기업 손녀라고 Ananomi에 소문이 쫙- 났다. 그녀가 입는 옷에서 들고 있는 가방까지 명품이 아닌 것은 전혀 없었다. Ananomi가 있는 압구정동에서도 소문이 자자한 그녀의 부와 세련됨은, 모든 호스트들과 손님들의 탐미 대상이었다. 그 뿐이면 좋을텐데. 그녀는 재력에 알맞은 미모와 지적 능력까지 갖추고 있다. 그보다 더 감질나는 여자도 없다. 실질적인 Ananomi의 넘버 원인 임승훈이 그녀를 손에 넣지 못한 것은 규철보다 늦게 들어왔기 때문이다. 그녀는 처음부터 규철의 손님이었다. 대부분의 메인 손님들이 승훈에게로 넘어온 것과는 달리 이 유명하고 특별한 손님은 언제나 상냥하고 고급스럽게 미소지으며 규철을 룸으로 불러 들였다. 한마디로 지금 규철이 꺼낸 제안은 승훈으로 하여금 동물적인 승부욕과 참을 수 없는 모욕감을 동시에 부채질 한 것이다. 승훈의 이름을 빌미삼아 이 곳에 기생하는 어울리지 않는 지윤과 그 대단한 주연을 서로 바꾸자는 제안과도 같다. 말 그대로 승훈은 주연을 짝사랑 하고 있는 충동적인 십대처럼 가슴이 두근거렸다. 그래서 였을까. 갑자기 승훈은 크게 웃었다. 흥미진진한 표정으로 둘을 번갈아 쳐다보는 다른 녀석들도 재미있다는 듯 입술을 비튼다. 규철의 한 쪽 눈썹이 휙 올라가는 것을 자세히 쳐다보며, 어느 때보다 날카로운 눈길로 승훈은 이렇게 대답했다. 마치 포커 판의 판돈을 높이듯 말이다. “.........주연 받고 너의 아우디 더. 강지윤을 Ananomi 최고의 호스트로 만들어주지.“ “아니. 그건 내 아우디까지 걸기에는 너무 쉬운 일이야. 내가 보기에 재능은 충분히 있다구. 만약 내 아우디 승용차가 가지고 싶으면 한 가지를 더 걸기, 임승훈.“ “재능? 하.. 니들이 녀석을 몰라서 그래. 난 강지윤이 어릴 때부터 같은 동네에서 자랐다구. 그 녀석은 어떤 수를 써도 계속 왕따인 게 당연해. 그런 식으로하면 내기 판돈이 너무 커지는 것 같은데..” “자신없으면 지금 그만두고, 그럼. 강지윤을 Ananomi 의 일급 호스트로 만들어. 그리고 난 한 가지 더 제안할게. 그 녀석이 너에게 반하게 만들면 더 재미있을 것 같아. 그리고 나서 차는 거지. 넌 그 정도는 할 수 있는 비열하고 속물적인 인간이잖아?“ 마지막 규철의 반격에 승훈이 고개를 절래 절래 저었다. 기가막혀서 웃음이 절로 세어나온다. “...........반하게 만들라구? 말도 안돼. 그런 녀석은 백 트럭 쯤 갔다줘도 싫다.“ “왜? 자신없어? 얼마든지 니 걸로 만들 수는 있잖아? 너는 자존심 하나로 버티는 놈인데, 그깟 녀석하나 반하게 못 만들어? 그리고 강지윤이 임승훈에게 반했다 한들, 니가 가질 것도 아니잖아? 당연히 버리는겠지, 너 같은 녀석은.. 그러니깐, 지윤이를 일급 호스트로 만들어. 그리고 너에게 반하게 하면 되지. 그러고 나면 차는 것 까지는 문제 없잖아?“ “.........................” “내가 생각하기엔 그렇게 안 좋은 조건이 아냐. 아우디 승용차의 가격을 생각해보라구, 임승훈. 거기다가 원주연도 걸었어, 나는.“ 결국 그렇게 된 것이다. 거래는 그런 식으로 성립되었다. 초라한 인간 강지윤을 Ananomi의 일급 호스트로 만들어내고, 자신에게 반하게 만든다. 그러면 승훈은 원주연과 규철의 아우디를 한꺼번에 가질 수 있다. 반대로 지윤이 일급 호스트가 되지 못한다면, 승훈이 무릎을 꿇고 Ananomi 가족 전체 앞에서, 규철에게 압구정동을 떠난다고 맹세해야 한다. 이것은 정말 비열하고 속물적이며 또 한편으로 계산적인 내기였지만, 승훈은 크게 만족하고 있었다. 단 강지윤이 어쩔 수 없는 인간이라는 것을 염두에 두지 못했을 뿐이다. 3. 강지윤은 문제적인 인간이다. 승훈은 화를 참지 못하고 담배 끝을 질근 질근 씹는다. 그리고는 날카로운 눈매로 노려보며 입술을 비틀었다. 도대체 그가 잘 할 수 있는 일이 뭔지가 궁금해진 거다. “너는 자세부터 좀 고칠 수 없냐? 왜 그렇게 구부정하게 다니는 거야? 누가 널 때리기라도 한대?“ 부드럽게 염색한 머리카락을 쓸어 넘기며 거칠게 쇼파 아래를 걷어찼다. 룸 안에 불러들여진 지윤이 어쩔 줄을 모르는 표정으로 쇼파 안 쪽으로 더욱 몸을 움직인다. 그래봤자 도망갈 곳도 없는 녀석이 말이다. 내가 왜 그런 내기를 했을까. 승훈은 욕을 퍼부으며 담배를 바닥으로 던져버렸다. 오늘의 영업을 마쳤을 때, 승훈은 피곤에 가득한 눈으로 지윤을 룸에 불러들였다. 원하는 것은 명품의 가치를 지닌 주연과 규철의 아우디 승용차, 그리고 납작해지는 규철의 자존심이다. 자신은 다른 건 다 참아도 지고는 못 참는 성격이다. 축구 경기만 하더라도 우리나라가 지면 테이블을 뒤집어 업는 게 그의 승부욕인 것이다. 더군다나 어딘가 딴 세상에서 온 듯한 귀족적인 미모의 주연이 걸린 일이라면 더욱 그렇다. 인정사정 볼 것 없다. 오늘부터 당장 내기에 착수한다. 주어진 기간은 한 달이다. 길어봤자 그렇다는 것이다. “강지윤.” 보다 딱딱한 어조로 비꼬듯이 부른다. 그러나 녀석은 반응이 없다. 반응이라고 해봤자, 승훈이 부를 때마다 움찔거리는 녀석의 태도다. 말을 잘 들어줘야 할텐데..라고 생각하며 승훈은 쇼파에 앉은 지윤앞에 무릎을 구부리듯 몸을 낮춘다. 눈동자가 들여다 보일 정도의 거리가 되자, 녀석은 당황한 듯 고개를 휙 돌렸다. 자세히 본 적은 없지만, 사실 얼굴 자체로 보면 그렇게 볼품없는 것은 아니다. 전체적으로 마른 느낌을 주는 몸에 한 몇 년 전에 유행한 아저씨 잠바, 그리고 발목까지 밖에 오지 않는 후줄근한 청바지 때문에 드는 느낌이다. 살도 찌지 않은 몸이니만큼, 얼굴은 작고 갸름한 편이다. 눈을 들여다 볼 일은 거의 없었기 때문에 눈매나 다른 것은 잘 모르겠다. 이목구비만은 단정하고 반듯하다. 희망이 아주 없는 것은 아니잖아.. ..승훈은 짧게 헛기침을 했다. 지윤의 시선을 마주치려는 의도였지만, 역시 실패다. 가까워지는 승훈에 겁을 먹은 듯, 녀석은 점점 더 몸을 뒤로 사리고만 있다. 쇼파 끝까지 가면 어디로 도망갈지 문득 궁금해진다. “잘 들어, 강지윤.” “..드..듣고..있어....” “말 더듬거리지 말고 제대로 대답해. 형 한심해 보여.” “.................” 입술을 비틀며 비웃는다. 가까이서 본 적이 없는데, 갑자기 문득 새로운 모습이다. 조금 흐릿한 룸의 조명으로도, 그의 잘 뻗은 콧날과 긴 속눈썹이 느껴졌다. 생각보다 재미있는데..?..라고 중얼거리며 승훈은 짓궂은 태도로 그의 목덜미에 손을 올렸다. 흔히들 누군가를 위협할 때 쓰는 방식이다. 그러나 상대는 자신을 쳐다보는 것이 아니라, 예상 외의 반응을 보였다. 바로 손바닥 아래에서 움찔- 작게 요동하는 기분이 느껴진다. ‘눈을 맞춘다’라는 짧은 행동, 누구에게나 할 수 있는 친밀감 넘치는 행위에도 금방 겁을 먹는다. 지윤의 동생인 지석은 형이 많이 맞고 자라서 그렇다고 말했다. 태어나서 이십여년이 넘게 살았지만, 이렇게 한심한 녀석은 본 적이 없다. 그가 늘 어릴 때부터 땟국물이 흐르고 아이들의 놀림감이었다는 것이 결코 이상한 일은 아니다. 승훈은 그가 뒤로 몸을 뺄 수록 더욱 짜증이 났다. 성미가 급한 자신으로써는 그의 이런 태도에 조금의 동정도 없었다. 그에겐 지금 어떻게 하면 주연과 아우디를 얻을 것인가의 문제밖에는 생각할 것이 거의 없다. “너, 호스트 할래?” 마침내, 진지하게 의견을 물었을 때 갑자기 손 바닥 아래 목덜미가 소름이 돋는다. 그 어리석은 반응에 승훈은 목 너머로 작게 상대를 비웃는다.조금만 더 다듬으면 가망성은 있다. 아주 구제불능의 얼굴은 아니다. 그러나, 이 쭈삣거리고 자신감 없는 한심한 태도는 여전히 고쳐지지 않을 것이다. 승훈의 그 짧은 질문에도 대답하지 못하며 머뭇거린다. 인내심이 바닥나는 바람에 그의 목덜미를 좀 더 힘주어 잡을 때야, 한숨처럼 작은 소리가 들려왔다. 웅얼거리듯, 의미없는 대답이다. “..호..호스..............트...?..” “돈 많이 벌 수 있다구, 강지윤. 내가 보장하지. 지금 하는 것처럼 그렇게 볼품없이 안 돌아다녀도 돼..“ 그러나 여전히 머뭇거리는 기색이다. “내가 키워줄게, 형. 세상에 믿을 건 나 밖에 없다며?” 마지막에는 좀 더 잔인해졌다. 자신이 심한 말을 하고, 그를 언제나 심하게 대한다는 걸 알면서도 승훈은 주저없이 단호하게 비웃었다. 아주 꼬마 때부터 그는 늘 이 모양이다. 누가 자신을 비웃는다고 한들, 반격할만한 의지가 있는 사람도 아니다. “지금 하는 것보다는 훨씬 나을 거야. 기껏해야 접시 나르는 일 하려고, 나에게 일자리를 구걸했던 건 아니잖아, 그렇지?“ “........-!!!” 구걸이라니. 그건 어찌보면 가장 강력한 수치감이다. 더군다나 자존심 높기로 유명한 지윤의 동생, 그리고 자신의 친구 지석을 떠올리면 더욱 그렇다. 그 혈통을 조금은 떠올리듯, 그가 잔인한 그 한마디에 번쩍 고개를 돌린다. 충격을 받은 모양이다. 둥그런 눈 모양이 이번에는 피하지 않고 정확히 자신을 꿰뚫어본다. “.....!........” 그러나 이번에 놀란 것은 어쩌면 지윤 만이 아니었다. 웬지 모르게 쿵- 하고 마음 속에서 짧은 충격이 횡경막을 치듯 내려앉은 것이 오히려 승훈이다. 놀란 듯 크게 뜨여진 둥근 눈은 조금 예상 밖이었다. 맑은 갈색 눈동자가 갑자기 망연히 자신을 응시하고 있다. 눈동자 어디에도 일말의 의심같은 것은 없었는데, 긴 속눈썹이 드리운 그림자만이 조금의 음영을 더하듯 눈동자를 둘러싸고 있다. 승훈의 제안을 못 알아듣는 것처럼 살짝 미간을 찌푸리고 있었다. 묘하게도 그 모습은 조금 지윤을 생소하게 보이도록 조종했다. 그것은 갑자기 걷던 길에서 십만원 짜리 수표라도 건진 것처럼 일종의 싸한 쾌재를 부르게 만들었다. 갑자기 조금 놀란 까닭에 승훈은 아무런 생각없이 아무렇게나 마구 말들을 갖다 붙이기 시작했다. “지석이가 제대할 때까지 억지로 기다릴 필요도 없고 말야. 조금만 노력하면 멋진 옷들과 약속들, 그리고 손님들이 기다린다구. 강지윤. 형은 친구도 없잖아? 그 나이에 친구 하나 없다니..정말 쪽팔리지 않아? 기껏해봤자, 동생 친구에게나 일자리 구걸하러 오고 말야. 만약 내가 하라는대로 하면 손가락으로 셀 수도 없을 만큼 많이 사귀게 해 줄게.“ 이성적인 판단없이 흘러나온 말들이지만, 이 역시 잔인하다. 마치, 평상시 자신이 지윤에 대해 느끼고 있는 생각을 드러낸 것 같아 속이 조금 뒤엉켰다. 그러나 할 수 없잖아..라고 조금은 자기 위안을 할 뿐이다. 누가 뭐래도 그에게 친구가 없고 늘 따돌림을 받은 건 역시 자신의 탓이다. 이처럼 겁을 집어 먹고 떠는 듯한 태도에도 그 원인이 있는 거다. “.........너처럼..?..”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상스럽게 눈을 떼지 못하는 승훈을 향해, 잠시 마른 침을 삼키며 그가 되묻는다. 그것은 딱히 질문이라기보다는 그냥 확인과 같은 한마디다. 밀어붙이면 말을 듣는 성격. 그것이 한심스러운 강지윤의 본능이다. 그러나 그 순간에, 승훈의 사고는 한 0.5초 정도 정지했다. 마치 생각에 잠긴 것처럼, 그 질문을 던지기 위해 살며시 내리깐 그의 속눈썹을 음미한다. 사로잡힌 불쌍한 날짐승처럼 파닥이는 손바닥 아래 감촉을 즐긴다. 왜 인지 스스로 떠올릴 여유는 없었다. “...그래, 나처럼.” 나처럼, 아주 많은 여자들에 둘러싸이게 해 줄게. 원한다면 끝발 날리는 압구정동 날라리들과도 명함을 교환하게 될거야. 아무도 모르는 비밀을 쥐고 그들의 상대가 되어 줄 수도 있고, 그 사실에 쾌감을 느끼면서 자신의 부와 얼굴로 값어치를 메기는 거지. 속물적이라고? 속물적이지 않은 인간은 또 어딨어? “...............” 대답하지 않은 채, 지윤이 짧게 한숨쉬며 다시 고개 돌린다. ‘알겠다’라는 표시와 같다고 승훈은 깨달았다. 그 둥그런 눈동자는 다시 쿵- 하고 승훈의 갈비뼈를 한 대 치듯, 똑바로 쳐다보았지만 이내 눈길을 거둔 것이다. 이유를 알 수 없는 소름에 승훈은 팔꿈치부터 저릿해왔다. 그 바람에 그는 마치 물건을 다루듯, 지윤을 잡은 스스로의 팔을 재빨리 걷어낸다. 석연치 않은 찝찝한 기분 때문이다. 그런 종류의 찝찝함은 설명할 길이 없다. 승훈으로써도 왜 그런 기분이 드는지 알 수 없었다. 다만, 너무나 순식간에 밀어내듯 팔을 걷었기 때문에 밀쳐진 듯한 자세로 지윤이 멍하니 자신을 쳐다본다. 조금 전의 선명한 눈길이 아니라 다시 눈에 뭔가 한 겹 씌워진 듯한 멍청한 표정이다. 그럼 그렇지...라고 속으로 몇 번 욕설을 퍼 부은 후에, 승훈은 무릎을 털고 일어섰다. 강지윤은 아마 압구정에서 가장 별볼일 없는 특이한 호스트가 될지도 모른다. 그러나 자신은 힘을 내 볼 생각이다. 그 대단한 원주연은 이 압구정동에서 자신과 가장 잘 어울리는 여자인 것이다. 그런 여자를 절대 놓치고 싶지 않았다. 주연과 자신과 걸어가면, 모두가 자신들에게 ‘한 폭의 그림’같다라고 말할 것이 뻔하다. 그리고 그 여자의 재력 정도라면 자신은 이제 ‘겉모양’만 그럴 듯한, 이 호스트 생활을 때려치우고 크게 한 몫 챙기게 될지도 모른다. 그 정도면 승부를 걸어볼 만 하다. ****************** 그래도 역시다. 승훈은 지윤의 뒷모습을 보며 길게 한숨을 쉬었다. 자신이 이토록 참을성이 없다는 걸 깊이 생각하는 중이다. 역시 지윤을 볼 때마다 짜증이 나는 건 어쩔 수 없다. 깊게 후회하지만, 그래도 그는 자신의 다짐을 되새기려 애썼다. 뭐니 뭐니해도 길고 짧은 건 대봐야 능사다. 규철도 인정했듯이, 그가 그다지 말도 안 되는 얼굴이 아닌 만큼 돈들이고 공들이면 뭔가 한 껀 나올지도 모른다. 승훈은 그렇게 생각하며 휴일날 오랜만에 집을 나선 것이다. 대개의 경우 승훈은 휴일에는 절대 집에 있는 편이다. 매일 같이 외출에다가 노동을 해야 하는 것도 힘든데, 휴일까지 돌아다니는 것을 그는 좋아하지 않았다. 하다못해 여자든 남자든 섹스 상대가 있을 때도 그는 휴일에는 절대 집을 선택했다. 그런 자신이 모처럼 휴일에 집을 나선 것이다. 그것도 일요일은 영업을 하고 월요일에 쉬는 그들을 위해서 가게가 다 문을 연 오후 5시에 말이다. 처음 들어선 것은 헤어샵이었다. 머리 모양을 바꾸고, 그에 알맞은 옷을 사는 게 먼저다..라고 철칙을 가지고 있는 승훈이다. “못 보던 얼굴이네? 승훈군 친구?“ 이상하잖아..어울리지 않아..라고 말하며 단골 미용사가 웃는다. 그의 손에 들려진 머리 빗에 촛점을 맞추며 승훈은 어깨를 들썩였다. 미용사가 비웃는다해도 할 말이 없다. 세련되게 갈색 피부로 태운 자신의 손목을 내려다본다. 모 가수가 선물한 값비싼 롤렉스 시계가 6시를 가리켰다. 지루한 까닭에 목을 이리 저리 움직이며 그는 잡지를 들척인다. 저쪽에서 머리 손질이 끝나려면 한참 멀었다. 다짜고짜 예약해 놓고 지윤을 끌고 와서는 ‘세련되게 바꿔주세요.’라고 요구했지만, 단골 미용사를 믿는다. 아마, 승훈이 처음 머리를 한 곳도 이곳이었기 때문이다. 그는 처음 자신이 한 선택을 비교적 신뢰하는 편이었다. 단 한가지, 저 머저리 강지윤에 관한 것을 빼면 말이다. “다 됐어, 승훈군!” 흡족한 표정으로 손을 닦으며 미용사가 나왔다. 이른바 헤어디자이너라고 부르는 게 맞는 표현일테지만, 승훈은 언제나 자기 식대로 해석하는게 편한 타입이다. 그는 짧고 오만하게 ‘수고했어요.’라고 말하고 자켓을 집어 들었다. 카드로 그어도 어차피 지금의 자신에겐 몇 푼 안 되는 돈일테다. 누가 그랬던가. 한 국가에서 절대 망하지 않는 사업을 하고 싶다면 성(性)에 관련된 것을 하라고. 아마 자신이 지금까지 한 가장 멋진 선택 중에 하나가 바로 이 직업을 가진 것이다. 물론, 그래도 언젠가는 그만두고 더 높은 계급 상승을 꿈꾸지만 말이다. 어쨌든 이 직업은 다음 계급으로 올라가기 위한 발판과도 같다. 자긍심 정도는 가지고 있다. 카운터에 다가서며, 그는 돌아보지도 않고 일단 지갑을 꺼냈다. 그러자, 헤어디자이너는 뭐가 즐거운지 조금 크게 웃으며 승훈의 어깨를 툭툭 두들긴다. “확인 안 해 봐도 돼?” 확인이 뭐가 필요할까. 그래봤자, 강지윤이 어디가는 것도 아닌데..라고 중얼거리며 그는 마지못해 고개 돌린다. 디자이너의 어깨 너머로 조금 밝아진 머리카락이 나풀거렸다. 뭔가 눈꼬리에 걸릴 듯 말듯, 미려하게 스쳐간다. 가뜩이나 눈매가 날카롭다는 주의를 듣는 승훈이었지만, 조금 더 가늘게 뜨고 관찰하듯 그 나풀거리는 머리카락을 응시한다. 아마 헤어샵의 밝은 조명과 아직 지지 않은 해도 한 몫 더 했을지 모른다. “마음에 들어?” 그런 건 당사자에게 묻는 것 아닌가..라고 떠올리기도 전에 나풀거리는 뭔가의 실체를 깨달았다. 밝게 염색한 머리카락은 부드럽게 흔들었다. 이전의 강지윤이 아니라 뭔가 새로운 사람을 보는 환영이 들었다. 약 한 시간전까지 지윤은 답답할 정도로 마구 자란 머리카락을 무거울 정도의 검은 색으로 유지하고 있었다. 그러나 디자이너가 밝게 물들인 머리카락은 그의 부드러운 이마 선과 크지도 작지도 않지만 또렷한 눈매를 살려낸다. 승훈은 잠시 눈을 깜박였다. 맑은 피부라고 그 날 룸에 단 둘이 있을 때도 느끼고 있었지만, 실제로 디자이너는 그의 갸름한 턱선을 잘 살린 머리 스타일로 바꿔 놓았다. 색감도 적당했고, 스타일도 있어보인다. 승훈은 뭔가가 목에 탁- 걸린 기분이 들어 잠시 헛기침을 한다. “승훈군 친구라고 해서, 좀 더 신경 썼어.” 승훈이 뭔가 곤란한 얼굴로 자신을 돌아보자 디자이너는 웃음을 만면에 띄우며 어깨를 들썩였다. 마치, 이것이 최선을 다한 거야..라고 말하는 듯 보였다. “하지만 좀 이상하잖아? 저 친구라는 사람은 승훈군과 어울리지 않아.“ 그런 건 말하지 않아도 알고 있다. 워낙 어릴 때부터 달랐으니 말이다. 더군다나 나이들면서 지윤은 더욱 자신을 꾸미거나 스스로에게 손 대는 일이 없었다. 하지만 디자이너가 최선을 다했다는 것을 증명이라도 하듯, 지금의 그는 어딘가 모르게 빛이 난다. 다만 언제나 도망치는 듯한 그 표정만 빼면 말이다. “어울리지 않아요?” 저 한심한 인간과 내가 사귀는 것도 아닌데 왜 그런 말을 들어야 하나..라고 중얼거리며 승훈은 빙글- 몸을 돌렸다. 사실은, 방금 든 이상한 당혹감에서 등을 돌린 것이다. 디자이너의 항변은 그가 헤어샵의 문을 열고 나갈 때야 비로소 발꿈치에 떨어졌다. “어울리지 않아, 승훈군과. 지윤군은 좀 더 사랑스럽고 순수해 보여...“ 놀리는 듯한 어른의 말투. 승훈은 지윤이 차에 올라타는 것을 확인도 제대로 하지 않고 시동을 건다. 아까 침을 잘못 삼킨 듯, 목에 걸린 가시같은 답답함은 쉬이 가시지 않는 것이다. *********************** 그들이 승훈의 집에 도착했을 때는 거의 밤 10시를 넘긴 시간이었다. 헤어샵을 나온 이후로도 내내 승훈은 지윤을 데리고 압구정동을 돌아다녔다. 큰 샵에서 소문난 스타일 샵까지....아마 걸어서 갈 수 있는 모든 것을 발바닥 아프게 돌아다닌 것이다. 돌아올 때 그들은 손에 다 쥘 수도 없을만큼의 쇼핑백을 들고 있었다. 승훈군에게 그것은 ‘고작’이지만, 지윤에게는 나름대로 ‘너무’라는 양이 될 것이다. 그는 여전히 눈도 마추지 못하고 촌스럽게 말했다. “.......하지만, 이렇게 많이 사면....... ...나..나중에 너한테 어떻게 갚아.....” “갚는 건 바라지도 않아.” 조금 마른 체형이지만, 키는 절대 작지 않다. 아마 그 구부정하고 이상한 자세만 고치며 그는 괜찮은 몸을 가진 사내다. 문제가 있다면 쿨한 몸매를 갖춘 자신보다 훨씬 나긋해 보이는 목선이나 허리선이다. 어깨 선도 조금 차이가 있었다. 승훈이 단단한 몸을 가진 것에 비해, 그는 상대적으로 말라보일 뿐이다. 눈짐작으로 그의 몸을 재어 보며 승훈은 닥치는대로 옷을 샀다. 명품이라는 것을 누차 강조하며 그에게 몇 번 이름까지 알려주었다. 몹시 귀찮은 일이지만 필요했다. 일급 호스트가 되려면 그만큼의 눈높이와 자존심도 필요하다. 그것이 쓰레기라구?...아하. 사람들이 아무리 비난해도 소용없다. 그 눈높이를 돈 주고 사려는 인간들이 엄연히 존재한다는 것을 부정할 수 없으니 말이다. “........집으로 돌아갈..........게.” 승훈이 아무 말 없이, 피곤한 표정으로 아파트 문을 열자 여전히 쇼핌백을 소중히 감싸 들며 그가 말한다. 그 자신감 없는 한마디에 승훈은 와락 짜증이 났다. 아무래도 피로와 억지스러운 스케줄 때문이다. 그리고 샵에 갈 때마다 종업원들이 낯뜨겁게 내보내는 ‘사랑스러운 분이네요. 승훈군보다 어려요?’라고 묻는 그 찬사 때문이다. 사랑스럽다니.. 말도 안 된다. 물론 이름높은 헤어디자이너가 그의 얼굴에 어울리는 머리스타일로 바꾼 것은 인정한다. 또한 지윤의 얼굴이나 몸이 그렇게 말도 안 되게 엉망인 것도 아니다. 그러나 사람이 제 아무리 길고 날 뛰어도 원래 놀던 바닥이라는 게 있다. 그들은 뻔한 장사속으로 입에 침도 안 묻힌 채, 거짓말을 해대는 것이다. 혹시나 지윤이 그 말을 듣고 자신이 정말 ‘사랑스럽다, 혹은 멋지다’라고 착각하지나 않을지....사실은 거슬린다. 승훈은 귀찮아 죽겠다는 표정으로 몹시 심드렁하게 쇼파에 풀썩- 주저앉았다. 자신은 아무리 보아도 답이 안 나오는 인간 강지윤일 뿐이다. “밥 잘 해?” 대뜸 묻자, 지윤이 당황한 듯 뒤로 물러섰다. 어쩌면 알아차린 건 아닐까..하는 생각이 불쑥 들었다. 지윤과 거리를 걸을 때, 이상하게도 자신은 발걸음이 매우 빨랐다. 평소대로라면 그 스타일에 맞게 그는 결코 빨리 걷는 편이 아니다. 갑자기 문득, 이 신경쓰이는 존재와 쫓기는 듯한 기분, 그리고 한편으로 내기를 하게 된 스스로에게 화가 났다. 젠장..이라고 입술을 깨물며 승훈은 속으로 몇번 욕을 내던진다. 오늘은 일주일에 한번 있는 휴일이었다. 평상시 같으면 클럽에서 일하는 몇몇 녀석들과 놀거나 혹은 손님 들 중 속궁합 잘맞는 파트너를 만나서 한탕 즐겁게 즐겨도 시원치 않을 그런 휴일이다. 그런데 이 녀석 때문에 곱지 않은 시간을 다 뺏겼다. 이 가망성 희미한 일에 시간과 돈을 투자하는 자신도 짜증이 났고, 무엇보다 이 일의 원인이 된 당사자에게 가장 화가 났다. 가장 심각한 것은 자신이 지금 배도 고프고, 목도 마르다는 것이다. 속을 할퀴는 듯한 짜증 때문에 더 잔인해진다. 원래부터가 자신은 저질이고 나쁜 녀석이었지만, 강지윤의 어리숙하고 초라한 행색은 그것을 더 부채질하는 것이다. 괴롭혀주고 싶은 거야..라고 생각했다. 이런 부류의 녀석들을 보면 잔인할 정도로 비웃고 괴롭혀주고 싶을 만큼 자신은 저질인 녀석이다. 이른바 강지윤은 이해할 수 없는 부류의 인간인 것이다. “하긴, 형이 잘 하는 게 뭐가 있겠어.” “..........밥..밥 정도는...........” “혹시 알고는 있지, 형?” 은근하게 놀리는 투로 승훈은 입을 열었다. 자신이 뭐라고 한마디 꺼낼 때마다 뒷걸음치기에 바쁜 그를 보며 심술궂은 생각이 주리를 틀었다. 일부러 잔뜩 입술을 비틀며 승훈은 넌지시 비꼬아댄다. 아아..공격하고 싶다. 그를. 삐뚤어진 근성으로 상처 주고, 내 눈 앞에 보이지 않았으면 좋겠다라고 생각한다. 생활이 부담스럽다. 그가 내 눈 앞에 나타나면서부터 말이다. “아까 샵에서 사람들이 형보고 ‘예쁘네, 사랑스럽네’ 한 것들.. 물론 귀담아 듣고 있는 건 아니지?“ “..................” 그의 얼굴이 조금 붉어졌다. 하긴, 그런 칭찬을 받고 자랄 인간도 아니다. 아니, ‘예쁘다’라는 게 같은 사내로써의 칭찬으로 받아들일 일이라면 말이다. 승훈은 ‘멋있다’라는 말을 듣는 쪽에 속한다. 날카로워 보이는 생김새도 그렇지만, 우락부락하지도 않은데 강해보이는 눈매가 일단 그렇다. 적자생존, 약육강식이라고 배우지 않았던가. 강한 것은 약한 것을 짓밟게 되어 있다. 자신 역시 그런 룰에 충실하고자 하는 것이다. “착각하지 말라구, 강지윤. 주제파악 정도는 하고 살아야지, 안 그래? 형이 내 돈으로 머리하고 좀 바뀐 것 뿐이어서 사람들이 입바른 소리 하는거야.“ “..........아...알아...” “그래, 당연히 알아야지. 그 정도 눈치는 있어야지. 그럼 그것도 알고 있겠네? 오늘 말야..“ “...............” 얼굴부터 해서 목덜미까지 점점 더 붉어진다. 수치감을 느끼는 것이다. 살아있으면 이런 말들에 굴욕감을 가지는 게 당연하다. 승훈은 자신이 그를 도발하듯 잔인해지는 것에 일종의 쾌감을 느꼈다. 괴롭히고 싶은 이유가 있다. 도대체 죽었는지 살았는지 모르는 저 답답한 태도와 멍청해 보이는 눈매가 마음에 안 들기 때문이다. “오늘 내가 일부러 빨리 걸은 거 알고 있지, 형?” “.........아.....” 짧게 신음을 흐리듯, 그가 더욱 뒷걸음치며 쇼핑백을 꽉 끌어안는다. 그러나 이 정도의 막무가내 공격에도 그는 절대 눈을 마주치지 않았다. 은근히 더 솟아오르는 심술을 느끼며 승훈은 나른하게 웃었다. “나랑 같이 다닐 때, 절대 옆에서 붙지 마.” “.....................” “오늘 내가 일부러 빨리 걸은 건 그런 의미야. 형이랑 압구정동을 돌아다니면 쪽팔린다구. 나 같은 유명인이 형같은 사람하고 돌아다니면 얼마나 손해인지 알아?“ “..........-!!!!!!!!!!!!” 일순 그는 숨이 멈춘 것처럼 보였다. 살며시 통증을 느끼는 것처럼 잠시 쌕쌕거리는 숨을 쉬며 그는 말없이 도망치듯 현관문을 잡아당긴다. 그러나 승훈은 양보할 마음이 전혀 없었다. 이 정도 자존심 구겨지는 말에 반응이 없다면 애당초 가능성 없는 것이다. 호스트이든 뭐든, 무슨 일을 하느냐는 중요하지 않다. 중요한 것은 바로 자긍심이다. 긍지..말이다. 상품으로써의 긍지. “..........알겠어.” 희미하지만 조금은 선명한 대답. 뒤 끝이 살짝 떨리는 듯한 그 대답은 심한 모멸감을 느꼈을 그를 고스라니 드러냈다. 잠시 숨을 삭히는 것처럼 심하게 턱을 떨던 그가 재빨리 현관을 열고 뛰쳐나간다. 쿵-하고 문이 세차게 바람으로 닫힐 때까지, 승훈은 그 모습을 가만히 노려보며 쇼파에 앉아 있었다. 왠지 지금 상처 가득한 날짐승의 추락을 본 것 같아, 문득 마음이 싸하게 죄책감을 입을 기분이다. 웃기지도 않고 말도 안 되는 죄책감 말이다. 그리고 배가 몹시 고팠다. 4. 일단 스타일의 변화는 조금 성공한 것 같았다. 더 거슬리는 일이 있다면, 출근하기 전에 항상 전화로 지윤을 코디해야 한다는 것일 뿐. 그러나 머리 모양에서부터 발끝까지 역시 자신은 센스가 있는 인간인 걸 다시 확인받는다. 그런 식으로 날마다 체크 해 대고 잔소리를 해 대는 동안 꼬박 일주일이 흘렀다. 그 일주일 동안도 승훈은 자신이 나쁜 남자라는 것을 굳이 감추지 않았다. 보이는대로, 느끼는대로 성질을 내도라도, 지윤이 반격하지 않기 때문에 그 정도는 더욱 심했는지 모른다. 그러나 일주일 쯤 뒤에는 어느 정도 성과도 있었다. 막 출근해서 출근계를 체크하는 동안 사장이 입구에 들어섰다. “이야~..날이 갈수록 더더욱 몰라보겠는걸?” 자동차 키를 돌리며 들어오던 사장은 짧게 휘파람을 불렀다. 지윤을 룸서비스 맨에서 호스트로 이동하겠다고 말했을 때, 사장의 비웃음에 비하면 다소 속시원한 결론이다. 규철이 출근할 때는 조금 더 그 만족감이 깊어졌다. 규철은 조금 삐딱하게 웃었지만, ‘역시, 대단한걸’ 이란 식으로 승훈을 쳐다보았다. 쓰윽- 짙은 눈썹을 밀어올리며 승훈은 그에 응수했을 뿐이다. 사실은 예약 명단에 올라와 있는 대기표를 보느라 지윤은 그에게 딴 전이다. 오늘 예약에 그가 있었다. 언제나 ‘그’ 보다는 ‘그녀’를 선호하는 자신이지만, 요새 유일하게 마음에 드는 남자가 있다. 바로 롤렉스를 선물한 그 문제의 어린 가수다. 나이가 이제 21살인 그 녀석은 이 계통의 온갖 화려함은 다 보여주듯 과연 눈부신 존재였다. 녀석이 가진 성에 대한 집착과 난잡한 놀이기술은 아마 소속사에서도 눈감아 주는 것 같았다. 가끔 엄격하게 생긴 매니저와 함께 대동했는데, 녀석이 클럽에 들어오는 날은 매니저는 주로 복도에서 서성거리는 편이다. “강지윤...생각보다 더 괜찮은데?” 규철이 마치 놀리듯 웃으며 귓속말을 건넨다. 그리고는 고개 너머로 승훈이 찌푸린 채 집중하는 예약표를 들여다 보았다. “흐음... 오늘 니키 예약있어?“ 가수의 이름이 바로 니키였다. 가끔은 롤렉스라고 놀림감처럼 부르기도 했지만, 그의 가수로써의 예명이 바로 니키다. 본명이 뭔지는 아무도 관심없었다. 그렇다고 그가 미국땅이나 외국물을 한번도 먹어본 적 없다는 건 누구나 다 아는 사실이다. “이제, 그만 니키는 포기하지, 김규철.” 원래대로라면 니키는 규철의 손님이다. 나긋한 인상과 달콤한 눈매, 그리고 이 바닥에 오래 구른 사람은 한눈에 알아보는 절묘한 색기. 니키는 고 또래의 연예인답게 가늘고 탄력성 좋은 몸을 가지고 있다. 어찌보면 누군가 개발시킨 게 아닐까 싶을 정도로 완벽한 성감대와 절묘한 섹스 테크닉. 바로 돈을 주고도 하룻밤 즐기고 싶은 상대가 니키다. 그런 니키를 규철은 호스트 일급으로 자리잡은 승훈에게 이년 만에 빼앗기고 말았다. 어쩌면 그 때부터 였을지 모른다. 둘 사이에 이상한 라이벌 의식이 생긴 것은. 지금은 원주연이라는 여자를 놓고, 그리고 그 때는 니키라는 녀석을 사이에 두고 벌어지는 묘한 라이벌 의식. “니키는 이미 예전에 포기했어, 임승훈. 그 녀석의 난잡함을 당해낼 수가 없다구.“ “..흠..그럼 왜 남의 예약에는 관심을 갖는 건데?” “왜라니? 뻔하잖아? 예쁘기만 입혀놓으면 뭘 해? 강지윤을 누가 지명해주는데? 넌 쟤의 가치를 뭘로 팔건데? 상품을 만들고 꾸미는 게 다가 아니라구. 진열대에 전시해야지. 가장 잘 팔리게 말야.“ 니키의 예약에 들떠있어서 몰랐다. 자신이 이곳에서 그렇듯, 강지윤도 이젠 하나의 ‘상품’이 되어야 한다는 사실을 말이다. 그것이 때론 경매와도 같아서 누군가 가치를 높여주지 않는 이상은 이 바닥에서 오래 버티기 힘들다는 것도 말이다. “오늘 룸에 데리고 들어갈 거다, 김규철. 니가 걱정할 일 아냐.“ “아하~ 니키와의 그 난잡한 쇼에 저 순진한 청년을 구경시키겠다구? 그게 너의 방식이냐?“ “어차피 받을 충격이면 미리 겪는 게 낫지 않아? 어차피 경험해야 할 일이면, 남이 하는 걸 보면서 따라하는 게 훨씬 낫고 말야.“ 그 쯤에야 주의가 지윤에게로 기울어졌다. 지윤은 어딘가 안절부절 못하는 듯 사람들에게 둘러싸여 있다. 오늘은 조금 더 나아보인다..라는 것이 다소 유행에 엄격한 승훈의 견해다. 다른 사람들도 그의 변화를 즐기는 눈치였다. 조금은 젊고, 어리고, 또 한편으로 호기심과 호감이 동한 호스트들이 즐겁게 떠들며 지윤의 머리카락을 만지작거린다. 저런 관심도 생전 받아본 일없는 지윤이다. 녀석은 왠지 조금은 부끄러운 듯 피하면서도 살짝 웃었다. “......!.........” 갑자기 쿵- 하고 뭔가 귓전에 떨어진 기분이다. 승훈은 말없이 그 모습을 노려보며 예약명부를 쥐고 있었는데, 순간 누군가 걷어찬 듯한 기분이 느껴졌다. 그러고 보니 중요한 걸 알았다. 녀석이 웃는 것을 본 적이 없다. 그리고 그 사실이 몹시 거슬리고, 기분 나빴다. 샐샐 웃으며 자기에게 아부를 해도 될까 말까한데, 언제나 겁먹은 표정만 짓는다. “.........멋지네.” 규철이 씁쓸하게 옆에서 한마디 거든다. 웃는 순간의 표정이 뭐라고 말하기 힘들었던 것이다. 환한 웃음이 눈가로 퍼져갔는데, 가늘게 샐쭉해지는 눈초리가 어딘지 야해보였다. 그러면서도 쑥스러워하는 듯한 그 표정은 절묘한 대조를 이룬다. 자신의 눈으로 보지 않았다면 아마 믿지 않았을 것이다. 마치, 은밀하게 유혹하게 적당하게 달아나는..그런 느낌 말이다.어쨌든 아주 짧은 순간에 드는 느낌이었기 때문에, 승훈은 이내 까맣게 잊었다. 그러나 규철은 ‘거 봐라~’라는 식으로 자신을 돌아본다. “내가 말했지, 임승훈.” “.................” “너는 한번 당해봐야 한다고.” 쿵쿵- 거슬리는 신경소리가 머리를 울려댄다. 다른 호스트 한 녀석이 뭐라고 저질스런 농담을 입에 담자, 멀리 떨어진 지윤이 더욱 입매를 둥글게 그리며 다시 웃었다. 역시 이유를 모르게 쓸쓸한 듯한 미소였고, 또 부끄러운 듯한 흐트러짐이다. 승훈은 아마 그 순간에도 한번 겪었듯, 짧게 니키에 대해 살짝 잊고 있었다. 그리고 기분이 몹시 나빠졌다. 목이 마른 것이다. ***************** “쟨 뭐야?” 오늘은 왠일인지 니키와 매니저가 함께 방 안에 있다. 지윤의 겁먹은 듯한 표정을 보면서도 승훈이 싸늘하게 어깨를 밀다시피 같은 방안에 들어서고 있었다. 매니저는 가까이서 처음본다. 물론 처음 볼 때부터 사람을 깔보는 듯한 눈길은 여전했지만, 오늘은 까만 썬그라스 아례에 그 단호한 시선을 감추고 있다. 니키도 보기 드물게 예쁜 녀석이지만, 매니저도 한 인물 한다. 불만은 없지만, 딱히 재미있다는 듯 턱으로 지윤을 가리키며 니키가 양주를 한 입에 턴다. ‘쟨 누구야’라고 묻지 않는다. 말 그대로 ‘쟨 뭐야’라고 물었다. 이유는 간단하다. 이곳에서는 모두가 상품이기 때문이다. 상품에 인격이라는 건 거추장스러운 단어다. “새로 들어온 호스트야.” 승훈이 아무렇지도 않게 대답하며 니키의 옆에 주저앉는다. 얼핏 보니 시간으로 치며 밤 11시를 훌쩍 넘겼다. 이대로 니키는 새벽 한 두시까지 마시다가 호텔로 가자고 조르거나 혹은 룸에서 끝짱을 볼지도 모른다. 늘 있어왔던 일이다. “어딘가 낯이 익은 얼굴인데? 예쁘네. 뭐.. ..내 타입은 아니지만.“ 니키는 안기는 것을 선호하는 쪽이다. 그것도 이제는 펠라라든지 그런 가벼운 패팅에는 전혀 만족을 못 느낀다. 마치 내도록 발정난 암코양이처럼 가르릉거리며 온갖 자극적인 것들을 찾아 헤맨다. “야, 너 앉아!” 반말로 대뜸 소리를 지르며 니키가 지윤을 윽박질렀다. 그 모습을 보면서도 승훈은 가만히 있는다. 당연히 자신이 니키 옆에 앉으면 지윤은 매니저 옆에 앉으리라 생각했다. 그러나 역시 이 촌닭 쑥맥은 어쩔 줄을 모르며 두려운 표정으로 입구에서 버티고 있다. “바보 아냐? 이젠 Ananomi 에서 대충 얼굴만 보고 뽑는가 보지?“ 무대에서 어린 팬들의 환호성을 받는 아이돌 스타 답지 않게 힐쭉거리며 니키가 웃었다. 이럴 때의 니키는 어딘가 어린애 같아 눈쌀을 찌푸리게 만든다. 그러나 그는 손님이고, 승훈은 상품이다. 상품이 손님에게 뭐라고 말할 수 있는 룰은 세상에 없다. “앉아, 강지윤.” 승훈이 짜증난다는 듯 말하자 그 때서야 쭈삣거리며 매니저 곁에 앉았다. 여전히 과묵한 매니저는 썬그라스 너머로 표정도 보이지 않은 채, 술잔을 들어 올린다. “헤이~ 이봐..너 할 줄 아는 거 뭐 있어?“ 어쩌면 니키가 좋은 이유는 니키와 자신이 같은 과의 속물이기 때문이다. 어린아이같이 유치할 정도로 이기적인 속물. 저질의 대명사들 말이다. 니키는 한 눈에 지윤이 짜증스럽고 거슬리며 또 한편으로 그렇기 때문에 자기보다 약하고 괴롭혀도 좋다라는 걸 알게 된 모양이다. 승훈의 넥타이 매듭을 손가락으로 잡아당기며 니키는 깔깔거리듯 지윤에게 물었다. 맞은 편의 지윤은 얼굴이 점점 붉어진다. 꼭 엊그제의 일처럼 시선을 마주치 못하고 파르르 떨었다. 그에게는 이 단순한 유희가 너무나 자극적일 수 있다. 갑자기 승훈은 궁금해졌다. 과연 지윤이 세상에 대해 아는 것은 뭐가 있을까. 성에 대해 아는 것은? 섹스에 대해 알거나 겪은 일은? 입이나 맞춰 본 일 제대로 있을까? 그 망할 놈의 떨고 있는 듯한 움추림 외에 녀석이 할 줄 아는 게 과연 뭐가 있을까! “쟤, 말 못해?” 니키가 답답한 듯, 그리고 비웃듯 승훈의 얼굴을 가까이 하며 물었다. 목이 성감대인 녀석은 벌써 목언저리가 야릇한 색기로 물들어있다. 잔뜩 돋아있는 소름이 애무를 기다린다. 어서 사내의 거친 혀가 쓸어가고 물어뜯기를 바라는 것처럼 이제 단 물이 오를 때로 오른 녀석이다. 혀를 내밀듯, 살짝 목선을 따라 쓸어가며 키스해본다. 이런 식의 자극을 녀석은 좋아했다. 하물며 자신보다 약하고 힘없는 지윤같은 상대 앞에서 즐기는 놀이라면 더욱 자극적일게 뻔하다. 승훈은 니키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