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완결/중편] 형. 上
[완결/중편] 형. 上
나에겐.. 형이 하나있다.
형이라고는 하나 그를 본 것은 불과 1년도 채 되지 않았다. 나보다 1살 위인 그는 아주 아주 많이 아프다고 했다.
그는 어릴 때 외국에 살고 있다던 할머니 댁에서 살았다고 했다. 어릴 때부터 몸이 약했던 그를 어머니와
아버지는 어떻게 해서든지 고쳐 주고 싶었단다. 그래서 그 아이가 3살이 되던 해에 외국으로 병을 고치러 보냈다고 했다.
뛰어다니진 못해도, 살아만 있어주길 원했다고 한다. 고아였던 어머니가 젊은 나이에 아버지를 만나 결혼을 했고,
그들의 사랑의 첫 번째 소산물이었던 그는 불행히도 미국의 의학으로도 병을 완치 시키진 못했고, 부모님의 사랑을
원하는 어린 아이였던 나는 그런 형의 존재가 못마땅했다. 형이란 존재의 사진을 보며 간간히 눈물을 짓는
그녀의 모습은 아직 철이 들지 못한 나에겐 그저 미움의 대상이었다.
나는.. 그가 싫었다.
형을 맡아주시던 할머니가 어느날 갑자기 노환으로 돌아가시게 되자 형은 한국으로 돌아왔다. 겨우 2살 때 까지
함께 살았을 뿐인 형의 얼굴을 내가 기억할리 만무했고, 질투심 때문에 나는 형의 사진을 내미시는 어머니의
손길을 뿌리치며 투정을 부리느라 바빴기에 그의 얼굴을 한번도 본 적이 없었다. 어머니는 그런 나의 모습에 많이도
화가 나셨을 텐대도, 그저 빙긋이 웃으시며 '형에게 그러는거 아니야... 모르지? 형이 너 얼마나 보고 싶어하는지..'
그리 말씀하시는 모습에 나는 더욱 분노를 터뜨렸다. 차라리 그러지 말아라 화라도 내신다면 나를 사랑해 주지
않으신다고 미워라도 할텐데, 착하기만 했던 어머니와 아버지는 그저 그런 나의 투정을 다독여 주시기만 했다.
아직은 어린 나이에 거의 한국을 떠나 계시는 어머니가 미웠었다. 아버지는 매일 일로 바쁘셨고, 나는 커다란 집안에
혼자 방치 되어 있을 뿐이었다.
1년의 거의 대부분을 외국에서 보내시는 어머니가 가끔씩 한국으로 돌아 올 때는 단 몇 개월 뿐이었다.
그리곤 무어가 그리도 급하신지 나의 사진만을 잔뜩 찍어선 다시 외국으로 들어가시는 것이다. 처음엔 어머니가
외국에서 내 사진이라도 보시는 가보다.. 라고 생각했지만 나중에 알게된 사실은 달랐다.
나의 사진은 순전히 몸 약하다던 나의 형 때문이었다.
'형이 널 얼마나 보고 싶어하는지 모를꺼야.. 매일 니 사진을 들어다 보고, 또 보고.. 성격은 어떤지.. 키는
얼마나 큰지... 친구는 많은지.. 매일 매일 니 얘기만 한단다.. 니가 보고 싶다며 치료도 얼마나 열심히 받는지
모를꺼야. 후훗.. 동생보다 작으면 체면이 안 선다며 요즘은 매일 같이 운동도 한단다...'
하지만 어머니의 그런 말들은 나에겐 전부다 위선으로만 들렸다. 난 그런 그녀에게 항상 소리 치고 싶었다.
"어머니! 저도 아들이예요! 저도 어머니가 필요해요! 절 좀 봐주세요. 저도.. 저도 사랑해 달란 말이예요---!!"
하지만 난 나의 마음을 그녀에게 알리기 보다 삐뚤어진 행동으로 그녀를 아프게 했었다.
18살.. 고등학교 2학년에 막 진학하던 추운 겨울.. 그가 한국으로 돌아왔다..........
처음 그를 본 소감을 말하라면..........
'더럽게 크네.. 저게 진짜 아픈 인간 맞아?' 였다. 그는 180이 훌쩍 넘는 나 조차도 올려 봐야 할 정도로
큰 장신에 언뜻 보기에도 굉장한 근육질의 몸을 가지고 있었다.
무슨 미식축구 선수 같은 몸.. 딱 보기에도 건강이 넘치다 못해 흐르는 그의 모습은 나에게 더욱 곱게 보이지
않았다. 차라리 아프다면 진짜 아픈 사람처럼 병색이 완연한 모습이어야 하건만 그는 튼튼해 보였다.
거리농구 동아리 주장인 나보다도..
서늘한 눈매.. 굳게 다문 입술.. 어머니도 그렇다고 아버지도 닮지 않은 그는, 언젠가 한번 보았던 독립군
투사였다던 할아버지의 사진과 똑같이 닮은 얼굴이었다. 나와는 전혀 닮지 않은 모습.. 그런 그의 모습에 나는
더욱 괴리감을 느꼈고, 처음으로 상봉하게 된 그에게 인사 한마디 하지 않고 내방으로 올라가 버렸다. 그런 나의
모습에 당황한 듯한 어머니와 아버지의 외침이 들려 왔지만 난 듣지 못한 양. 쾅 소리를 내며 문을 걸어 잠궈 버렸다.
그가 한국에 와서 처음으로 한 일은 학교에 진학 하는 것이었다. 머리까지 좋았던 모양인지. 그는 단번에 검정
고시에 합격했고, 학교 생활이 하고 싶다는 이유로 나와 같은 학교에 진학했다. 한번도 학교를 다녀 보지 못한
그는 1학년으로 진학 하였고, 순식간에 학교내에 떠오르는 샛별이 되었다. 물론 그런 그가 나는 더욱 미웠고,
학교에서 그와 마주치더라도 아는 척도 하지 않았다. 그는.. 그런 나를 항상 먼 발치에서 바라 볼 뿐이었고, 그
역시 나에게 아무런 말도 걸지 않았다. 당연히 학교에서는 우리 두 사람이 형제라는 사실을 아무도 몰랐다.
그는 참으로 말이 없는 사람이었다. 항상 내가 보고 싶다며 조잘댔다는 어머니의 말과는 전혀 상반된 모습이었다.
물론.. 그 덩치에 조잘 댄다는 것이 어울리기야 하겠냐만은....
참으로 사내답게 생긴 그는. 항상 뭔가를 유심히 바라보았다. 물론 그를 일부러 피해 다녔던 내가 그가 무엇을
보는지 어떻게 알겠냐 만은 가끔씩 마주치거나 들리는 말에 의하면 작은 사진 같다고 했다. 서늘한 눈매...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 수 없는 깊은 눈동자. 굳게 닫힌 입술.... 그가 병자였음을 알려주는 유일한 증거인 흰 피부...
그는 참으로 흰 피부를 지녔었다. 그것은 한번도 햇빛을 받아 보지 못해, 마치 색소가 모두 사라져 버린 듯한
착각 마저 일으켰다. 하지만 그와 반대로 길거리 농구를 하러 다니거나, 친구들과 어울려 다니기 좋아했던 나는
조금은 시커먼 피부를 지녔었다. 그게 또 마음에 들지 않아 나는 그와 얼굴이라도 마주치기라도 하면 일부러
길게 인상을 썼었다.
19세....
어머니, 아버지가 돌아가셨다.
교통사고.. 이렇게 어이 없는 일이 있을 수가 있을까? 반나절 전 까지만 해도 평생 처음으로 가져보는 둘만의
결혼 기념일을 기뻐하며 문을 나서지 않았던가...?
난 망연자실해 질 수 밖에 없었다. 고아.. 고아가 된 것이다. 형제 한 분 계시지 않았던 아버지.. 천애 고아였던
어머니... 그와 나는 고아가 됐다.
침대에 머리를 쑤셔 박고 미친 듯이 울부짖었다. 아니.. 울부짖고 싶었다. 하지만 마치 무언가가 목구멍을 꽉
막아 버리기라도 한 듯, 끅끅거리는 소리만이 간간히 터질 뿐. 비명은 터지지 않았다. 그가 미웠다. 어머니,
아버지의 죽음이 그의 탓인 것만 같았다.
그가 오고 나서부터.. 모든게 엉망진창 뒤죽박죽으로 엉클어져 버린 것 같았다. 신경 쓰지 않으려 해도 그의
모습은 자꾸 나의 눈에 들어왔고, 듣고 싶지 않아도 그의 행동 거지, 하나 하나에 귀 귀울이는 내가 지겨웠다.
어머니, 아버지를 화장하고.. 그들을 강 위에 뿌리며 나는 울지 않았다. 어머니와 아버지의 잔해를 건드리지도
못하게 하는 나의 뒷모습을 깊이를 알 수 없는 눈으로 물끄러미 응시하는 그가 느껴졌기 때문이었다.
울지 않아.. 울지 않아.. 네 앞에선 죽어도 눈물 따윈 보이지 않을테다...!
난.. 이를 악물었다.
이런 일이 있을 수가 있나..? 집은 경매로 넘어가 버리고, 몸 하나 가눌 곳이 없게 되었다. 꽤 부유한 층에
속했던 우리 집은 이미 예전에 그의 병원 비를 대느라 파산 직전이었던 것이다. 그걸 간간히 유지하시던
아버지 마저 없는 지금.. 나와 그는 집 밖으로 내 쫓기게 되었다.
마지막이 될지도 모르는 밤.. 나는 내방에 들어와 또다시 눈물을 흘렸다. 답답해서 미칠 것만 같았다. 심장이
터질 것 같았고, 숨쉬기가 괴로웠다. 비명이라도 지르면 편안해 지련만.. 나는 또 아무런 소리도 내지 못하고
간간히 끅끅거리는 숨 넘어가는 소리를 낼뿐이었다.
그때... 그가 들어왔다.
서늘한 눈매..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 수 없는 눈... 그는 그런 눈으로 울고 있는 나를 가만히 응시하기만 했다.
미웠다. 머리가 돌아 버릴 정도로 그가 미웠다. 하지만 난 그저 울고만 있을 뿐. 그를 때리지도 못했고, 욕을 해주지도
못했다.
당장 이 방에서 나가라 소리 치고 싶었지만 나는 그저 입을 틀어막고 울고 있을 뿐이었다.
"흡...?!"
순간.. 나를 덮치는 거대한 그림자... 마치 어미의 젖을 찾는 짐승처럼 거칠게 탐하는 입술..
미친 놈.. 이 미친 놈.. 대체 뭐하는 거야..? 대체 이게 무슨 짓이야...? 혼란스러운 머리와는 달리 심장은
싸늘하게 식어버렸다. 항상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 수 없던 서늘한 눈을 감고 그는 전력을 다해 나의 입술을 탐하고
있을 뿐이었다. 너무도 절박해 보이는 그의 몸짓에 나는 그를 밀어낼 생각도 하지 않고 그저 그의 감긴 눈매를 바라볼
뿐이었다.
"하아...하아..."
어느새 그와 나의 몸이 침대에 뉘어져 있었고, 한참을 탐하던 나의 입술을 놓아준 그가 천천히 눈을 떴다.
서늘한 눈매... 단지 서늘한 눈매라고만 생각했던 것과는 달리 그는 매우 다정한.. 하지만 조금은 슬퍼 보이는
눈을 가지고 있었다. 하지만 한치의 흔들림도 없는 곧은 그의 눈매가 눈물에 젖은 나의 눈을 똑바로 응시하고 있었다.
생각보다 굉장히 맑은 눈.. 너무 맑아 나의 얼굴이 비칠 정도였다. 나는.. 그저 그를 바라보고만 있었다.
마치 고장이라도 난 듯 아직도 줄줄줄 새어 나오는 눈물이 창피하지도 않았다.
생각보다 훨씬 큰 손.. 열심히 운동을 했었다는 어머니의 말대로 흰 피부의 고와 보이던 그 손바닥은 잔뜩 굳은
살이 베겨 있었다. 조금은 거친 손가락으로 살살 달래 듯 나의 눈물을 훔쳐주는 손길이 왠지 조심스러워 보였다.
커다란 덩치를 한 그가 이렇듯 조심스러운 행동을 하는게 우스웠지만 나는 여전히 그의 눈만을 바라 볼 뿐,
아무런 말도, 행동도 하지 않았다. 나의 눈물을 가만히 훔쳐 주던 그가 다시 나의 입술을 탐했다. 처음과는
달리.. 조금은 부드러워진 행위...
"흐...음...."
그는.. 아마도 경험이 많지 않을 것이다. 하기사 병 때문에 병원 문밖을 나서지도 못했을 그가 경험이 풍부
하다면 이상한 일이겠지만... 너무 서툰 그의 키스에 나는 그저 눈을 감아 버렸다. 아무런 생각이 들지 않았다.
그가 나와 친형제라는 생각도 들지 않았고, 그가 밉다는 생각도 들지 않았다. 부모님의 죽음도.. 더 이상 살 곳이
없어졌다는 미래에 대한 막막한 두려움도 아무것도 생각나지 않았다. 아마도.. 나는 외로웠던가..?
어린 시절 항상 혼자 지냈어야 했던 나는.. 아마도 많이도 외로웠던 것이다. 그렇기에 난 내가 그토록 미워하던
이의 키스를 받고 있는 것이리라.. 서툰 몸짓으로 나를 달래 주려는 그가 조금은 고마웠던 것도 같다.
얼마의 시간이 지났을까..? 마치 할 줄 아는 일이라곤 키스하는 것 밖에 없다는 듯, 굶주린 듯 키스해 대던 그가
나의 위에서 내려오고. 우리 둘은 빛 바랜 천장을 보며 거칠어진 숨을 가다듬었다. 대체 얼마나 나의 입술을
물고 빨았는지 나의 입술은 잔뜩 부어있었고, 따끔 따끔 거리는 통증마저 느껴지고 있었다. 터지기라도 한
듯 비릿한 피맛까지 나는 것을 느끼며 나는 헛 웃음을 삼켰다. 그리고.. 순간 아...! 하고 깨달아 버린 사실...
나는 몸을 둥글게 말아 그를 등지고 누웠다.
젠장.. 대체.. 대체 무슨 짓을 한거지..? 내가 대체.. 내가..
나의 생각은 여기에서 멈춰질 수 밖에 없었다. 등 뒤로 나의 몸을 감싸 오는 따뜻한 온기.. 넓은 그의 가슴과
딴딴한 그의 팔이 느껴졌다. 나의 몸을 안은채 그가 나의 목털미에 얼굴을 묻었다.
'이.. 미친 놈..!!'
순간 욱! 하는 마음에 그를 떨쳐 내려 손을 올렸다. 하지만.. 그 순간 들리는 그의 목소리..
"걱정하지마... "
아마도.. 그의 목소리를 처음 듣는 듯했다. 아니, 몇 번인가 말하는 모습을 보기는 했지만 나를 향해 이렇게
말하는 것은 처음이었다. 그의 목소리는.. 마치 동굴에서 들려오는 메아리처럼 낮고 울림 있는 로우톤의 음색이었다.
단 한마디.. 단 한마디 뿐이었지만, 나는 왜인지 몰라도 안심하고 있는 나를 느꼈다. 그 어이 없음을 통탄하기도
전에 난.. 어느새 그의 품에 안긴 채 잠들어 있었다.
[완결/중편] 형. 中
나에겐.. 형이 하나 있다............
아주 작은 단칸 방이었다. 너무 오랜 되어 곧 쓰러 질 것 같은 그 집을 처음 본 순간 난 알
수 없는 충격에 휩싸였었다.
그것은 충격. 그렇다. 충격일 수 밖에 없었다. 커다란 집과, 정원이 딸린 집. 그런 집에서 한
번도 금전적인 부족을 느낀 적이 없었던 나였다. 하지만 마치 달동네를 연상 시키는 높은
언덕을 넘어 한참을 더위와 씨름하며 올라온 곳에 위치한 이 작은 단칸방은 지금 현재 나의
처지를 일깨워주었다.
'고아'... 더 이상 그들의 모습을 볼 수가 없는 것이다. 더 이상 나의 삶을 풍족하게 채워줄
존재가 없는 것이다. 우습게도.. 나는 단 일주일 만에 그들이 이 지구 상에서 사라졌다는 슬
픔을 극복해버렸다. 그것은 슬픔을 넘어선 분노. 왜.. 왜 먼저 죽어버렸나?! 라는 원망.
이런 곳에선 잠시도 살 수 없을 것이라는 부르조아 식의 역겨운 자만.
나는 죽어버린 부모 보다, 내 이 한 몸의 평온이 더 중요한 이기적인 아이었다. 하지만 그런
나와는 달리 그는 아주 평온해 보이는 표정이었다. 달랑 옷가지만 챙겨왔지만 이 높은 언덕
까지 혼자 짐을 떠 맡고 올라온 그였지만, 그는 전혀 힘들다는 표정이 아니었다. 아니, 힘들
기는커녕 평온한 듯한 얼굴이었다. 그런 그가 미웠다. 나는 지금 어떻게 이런 곳에서 생활할
까 막막하기만 한데, 저는 뭐가 그리도 착해 빠진 인간이라고 저리도 평온한 얼굴을 하는
것이냔 말이다.
사람이라면 무릇 자신의 안위가 가장 중요한 법이다. 하지만 그는 그런 내가 너무도 몹쓸
인간이라도 되는 양. 평온할 뿐이었다.
"이런 곳에서 어떻게 살아?! 그렇게 돈이 없어?"
욱하는 마음에 그에게 소리를 쳤다. 그는 나의 투정에 고개를 비스듬히 돌려 불만에 가득
찬... 아니, 어쩌면 경멸이 가득할 나의 눈을 또 그 알 수 없는 눈동자로 응시했다. 그리곤...
싱긋이 웃는 것이다. 그 순간 나는 그만 그 자리에 못 박힌 듯 굳어 버렸다.
처음 보는 그의 미소는... 뭐랄까...? 지금 내가 당한 처지를 잊게 만들 정도였다. 아니, 그 정
도가 아니라, 나는 지금 나의 처지를 잊어버렸다. 싸늘해 보이는 얼굴과는 달리 그의 미소는
너무도 순박해 보였다. 마치 막 촌구석에서 상경한 시골 청년처럼 순박하기만 해보이는 미
소.. 소음과 공해로 찌든 타락한 도시 청년이 된 듯한 기분.. 나는.. 내가 너무도 더러워 보였
다. 아무도 나에게 더럽다 욕하는 이는 없었지만 나는 이내 곧 내 자신이 혐오 스러워져 버
렸다. 그래서.. 그의 순진한 미소를 외면 해버렸다.
"미안해. 하지만 네 손에 물 한방울 안 묻히게 할게.. 그러니까 화내지마..."
그의 얼굴을 외면해 버리는 나의 모습을 무어라 착각 한 것인지는 알 수 없다. 하지만 그는
그 듣기 좋은... 어쩌면 내가 유일하게 좋아한다..라고 생각할 지도 모를. 그 듣기 좋은 목소
리로 조심스레 말을 걸었다. 조근 조근.. 소근 소근... 우습게도. 나는 그의 말이 마치 프로포
즈 같다는 생각을 했다. 언젠가 한번 보았던 드라마 속의 남자 주인공이 여자 주인공을 터
프하게 끌어 안으며 한 말이었다.
'네 손에 물 한방울 안 묻히게 할테니까, 나랑 결혼하자!'
물론 그때 나는 그의 말을 비웃었었다. 그럼 세수도 자기가 시켜주겠다는 거냐? 그래, 세수
까지는 그렇다 치더라도 화장실 갔다가 손을 씻을 때는 어찌 해야하는가?! 손도 대신 씻어
줄테냐?! 너무 웃기는 말이라며 코웃음을 쳤었던 나였다. 나는 좋아하는 여자가 생기면 절
대로 저런 멍청한 프로포즈는 하지 않을 것이라며 그를 비웃었었다. 하지만.. 바로 옆에서
들리는 그 대사는 우습게도 나의 마음을 조금 두근거리게 만들었다.
그가.. 나를 향해 프로포즈를 할 리가 없지 않은가?!
미치도록 싫었다. 지저분한 부엌은 신발을 신고 밖으로 돌아서 나가야 했고, 바로 그 옆에
지저분한, 살아 생전 말로만 들었을 뿐인 푸세식 화장실이 있었다. 세면장은 대문을 들어서
면 바로 그 옆에 초라하게 붙어 있을 뿐이었다. 이래선 샤워 따윈 꿈에도 못 꿀 일이었다.
매일 밤 샤워를 하던 버릇을 들였던 나로서는 너무도 감당하기 힘들 정도였다.
하지만 이상하게도.. 난 매일 같이 높은 언덕을 땀을 뻘 뻘 흘리며 올라 왔고, 끔찍 하리만
치 지독한 냄새를 뿜고, 가끔씩 튀어나오는 구더기 때들과 조금만 해가 졌다 싶으면 달려드
는 모기 때들의 습격을 받았지만 그 꿈에도 생각하기 싫은 화장실을 애용했다.
단 몇일이 될지도 모르지만 친구들의 집에서 편안하게 지낼 수도 있었지만 난 그 언덕 위의
초라한 단칸방으로 매일 같이 오르고 내렸다.
부모님의 타개 소식을 들은 친구들은 자신의 하숙집에서 함께 지내자며 나를 볼 때 마다 제
의해 왔지만 난... 왜인지 그 끔찍한 집을 떠날 수 없었다.
그가 무슨 일을 하는지 따위는 관심이 없었다. 하지만 그는 이 언덕 위의 집에 이사온 날
학교를 그만둬 버렸다. 그리고 매일 새벽 일찍 어디론가 나갔고, 내가 일어날 시간이 되면
돌아와 한 여름에도 뜨거운 물로 씻는 나를 위해, 내가 씻을 물을 데워주었고, 입맛이 까다
로운 나를 위해 항상 고기에 맛깔 스러운 반찬들을 대령했다. 그리곤 내가 학교에서 돌아오
기 전까지 밥을 해놓고, 마치 죽은 듯이 잠들어 있다가 내가 들어오는 소리라도 들릴라 치
면 급히 일어나 미리 준비해 놓은 반찬에 금방 따스한 밥을 해 내게 대령해 왔다. 밥을 먹
을 때마다 그는 조금 아픈 듯. 하지만 나에겐 전혀 내색을 하지 않으려 안간힘을 쓰며 숟가
락을 힘겹게 들었다. 언뜻 본 그의 손은.. 하얗고 고왔지만.. 운동으로 인하여 조금은 굳은
살이 베겨 있던 그의 손바닥은 온통 물집이 잡혀 그냥 보기에도 무척이나 아파 보였었다.
하지만 난 그에게 아프냐? 묻지 않았다. 무엇을 하느라 이렇게 손이 엉망이 되었느냐? 묻지
않았다.
그가 아파하건 말건.. 힘들어 하건 말건.. 매일 매일을 힘겨운 신음성을 내며 잠에 빠져 들건
말건.. 나는 관심 없었다. 관심도 없었고, 상관하고 싶지도 않았다.
하지만.. 나의 눈은 언제나 그의 물집 잡힌 손에 닿아 있었다.
처음으로 그의 눈물을 보았다. 그는.. 어머니, 아버지가 돌아가시는 그 순간에도 굳건히 그
자리를 지킬 뿐 눈물 따위는 보이지 않았었다. 그런 그의 모습이 너무도 차갑게 느껴져, 혐
오감 마저 일으킬 정도였지만 그는 끝내 눈물을 보이지 않았었다. 그는 집이 경매로 넘어가
게 되어 몸뚱이 하나 의지 할대가 없게 됐었을 때도 울지 않았었다. 그런 그의 눈물은.. 차
가울 꺼라 생각했던 나의 예상과는 달리 아주 뜨거웠고.. 미워 보일꺼라 생각했던 나의 예상
과는 달리... 너무도 처절해 보였다.
학교를 그만둘꺼라고 그에게 통보했다. 왜 이런 일을 그에게 보고 하고 있는지 나 자신도
알 수 없었지만, 어느새 나의 입에선 귀찮다는 듯 차가운 말이 쏟아지고 있었다.
"나 학교 그만 둘꺼야. 그렇게 알아.."
그는 아주 과묵한 사람이었다. 친구들 사이에선 꽤나 시끄러운 놈이지만 나 또한 그와 주저
리 주저리 떠들고 놀 만큼 그를 좋아하지도 않았기에 자연스레 우리 둘 사이에는 대화가 거
의 없었다. 그런 내가 먼저 말을 꺼낸 것이 놀라웠던 것일까? 그것도 아니면 내가 학교를
그만둔다는 사실이 놀라웠던 것일까? 그는 서늘하다고 생각했던 눈동자를 크게 뜨며 나를
응시했다. 요즘 들어 그의 새로운 모습들에 마치 큰 병이라도 난 듯 심장이 철렁 내려 앉을
때가 많았다. 놀라는 그의 모습에 또다시 철렁 내려 앉는 심장을 느끼며 속으로 욕설을 씹
둥댔다. 하지만.. 다음 순간 나는 심장이 내려 앉는 것 보다 더 한 충격에 그저 멀뚱히 서있
을 수 밖에 없었다.
"그러지마...."
세상에.. 울다니.. 울다니... 표정의 변화가 그리 다양하지 않은 그였다. 아주 아주 가끔씩 짓
는 미소 외에는 거의 무표정한 그의 얼굴이었다. 그는 눈물도 무표정하게 흘리는 구나.. 나
는 멍청하게도 그런 생각을 했다. 그는..무표정한 얼굴로 눈물을 흘렸다. 하지만.. 그 서늘한
눈동자 만은 너무도 처절한 빛을 뿜고 있었다. 찔끔찔끔 흘러 나오는게 아니었다.
살아 생전 이렇게 눈물을 흘리는 사람을 본 적이 없었다. 언젠가 나에게 차인 계집 아이도
이런 식으로 울지는 않았다. 그녀 외에 많은 계집들이 나에게 차이고 울어 댔었지만, 아무도
이렇게 이상한... 나의 심장을 들었다 놓았다 할 만큼 충격적이게 울지는 않았다.
그것은.. 아주 더러운 기분 이었다. 처음 느껴보는 그 느낌.. 그 이상한 기분.. 난 화가 났다.
이유가 뭔지도 알 수 없었고, 알고 싶지도 않았다. 마치 흐르는 샘물 같은... 그것은 끊임 없
이 맑은 물줄기를 흘려 보내고 있었다. 맑은 그의 눈동자가 눈물로 반들 거리자 심장께가
이상하게 간질댔다.
"...미..미쳤어?! 왜 울고 지랄이야?!!"
그의 눈물을 더 이상 보고 있을 수가 없었다. 미칠 것만 같았다. 뭐 이런 놈이 다 있을 까
싶었다. 난 그 눈을 외면해 버렸다.
"미안해.. 미안해.. 내가 다 미안해.. 그러니까.. 학교 그만 두면 안돼.."
뭐가 미안하다는 것일까...? 참으로 말이 없던 그 였다. 그는 마치 어린 아이의 순진한 말투
를 흉내내고 있었다. 귀여워 보여야 하겠지만 난 그냥 미칠 것만 같았다. 미안하다고 사과하
는 그가 미웠다. 뭐 이런 놈이 있을까 싶어, 실컷 두들겨 팼으면 싶었다. 하지만 난.. 그를
패지도 못했고, 학교를 그만 둘 수도 없었다. 그저 고장난 듯 미친 듯이 뛰어대는 심장만이
내가 어딘가 잘못 되도 크게 잘 못됐다는 사실을 일깨워주었다.
짜증이 났다. 울고 있는 그를 달래줄 생각도 하지 않고 나는 이불을 머리 끝까지 덮어 쓰곤
눈을 감아 버렸다. 이불 너머로.. 어떻게 울고 있는데도 저리도 담담한 말투가 튀어 나올까?
싶을 만큼 담담한.. 하지만 진한 슬픔이 녹아 들어있는 그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미안해.. 대학만.. 대학만 들어가. 그럼 너 귀찮게도 안할꺼야.. 그럴꺼야.. 그러니까.. 학교
그만 두지마..."
내 나이 20살...........
그 날 이후로 우리는 서로에 대한 스킨쉽이 없었다. 마치.. 무언가 씌인 듯이 내게 키스해
대던 그는 그 날 이후로 내게 전혀 손을 데지 않았고, 나 또한 그 일을 잊은 듯이 지냈다.
아니, 할 수만 있다면 나는 그 날의 그 일을 내 기억 속에서 지워버렸으리라.. 사내 새끼한
테 덮치듯 키스 당한 것도 더러워 죽을 것 같은데, 자신의 형이라니... 그것도 친형 이라니..
가끔씩 그 날 일이 떠오를 때 마다 벌겋게 달아 오르는 얼굴은 아마 분노 때문이리라..
마치 백미터 달리기를 온 힘을 다해 완주 했을 때와 같은 심장의 두근거림은 치욕 스러움
때문이리라. 그리고.. 내가 대학에 합격하던 날.. 비록 좋은 과는 아니었지만, 그가 그토록이
나 원하던 대학에 입학 하던 날.. 그는.. 또 다시 나에게 키스해 왔다.
합격 통지서를 받아 들고, 왠지 모를 흥분에 휩싸였었다. 원하던 대학이 아니었건만, 나는
합격 발표가 나자 환하게 웃었고, 축하 파티라도 하자며 나를 붙잡던 친구들을 뿌리치고, 나
는.. 집으로 향하고 있었다. 왜인지는 알수 없으나, 나는 추운 겨울 흰 입김을 뿜으며 숨이
차도록 오르고 또 올라 이제는 익숙해진 낡은 파란색 대문을 열었다.
그 순간 내 눈앞에 보인 것은 그의 뒷 모습.. 무슨 생각을 하는 것인지 그는 나를 등지곤 고
개를 숙이고 있었다. 무언가 보고 있기라도 한건가...? 귀가 밝은 그는 작은 소리에도 금방
잠이 깨거나 했다. 하지만 그는 낡은 대문이 내는 시끄러운 소음에도 그 사실을 알아 채지
못한 듯 무언가를 유심히 볼 뿐이었다. 그의 넓은 등을 바라보고 있자니 왠지 이상한 생각
이 들었다. 그것은.. 말로는 표현 할 수 없는 묘한 느낌이어서... 나는 그저 그의 등을 바라보
고 있었다. 흰색 털 스웨터가 그의 등을 감싸고 있었다. 어느새 내린 건지 보송 보송한 눈이
그의 검은 머리칼에 사쁜히 내려 앉았다. 그의 넓은 어깨에도 사쁜히 내려 앉았다. 내 심장
은.. 또다시 철렁.. 하고 내려 앉아 버렸다.
그의 등을 보다가 나는 괜히 기분이 나빠져 버렸다. 왠지.. 마른 듯한 모습.. 커다란 키는 여
전했지만.. 그의 뒷모습은 많이도 야위어 보였다. 그러고 보니 늘어난 흰색 스웨터 사이로
보이는 남자 답게 굵직한 목털미 또한 조금은 가늘어 보였다. 그동안 자세히 보지 못해서
몰랐는데.. 그는.. 1년 반개월 이라는 시간 사이.. 굉장히 말라 있었다.
"젠장...!"
속으로 씹퉁댄다고 생각했던 욕설이 입밖으로 나와버렸다. 그는 놀란 듯 흠칫 몸을 떨며 손
에 들고 있던 무언가를 급히 자신의 바지 주머니에 넣었다. 그리곤.. 천천히 나를 향해 돌아
섰다. 여전히 창백한 얼굴.. 하지만 조금은 그을린... 하지만 여전히 창백한 얼굴.. 조금은 그
을렸지만 여전히 창백한 얼굴... 여전히 서늘하지만.. 너무도 맑은 그의 눈동자가 나를 향했
다. 그의 얼굴은.. 굉장히 여위어 있었다.
"툭~!"
괜히 화가 나 손에 들고 있던 합격 통지서를 그에게 던져 버렸다.
"?"
놀란 듯.. 하지만 이내 허리를 숙여 땅에 떨어진 통지서를 줍는 그의 모습에 또 괜히 짜증이
나 내뱉듯이 말하곤 방으로 들어가려 몸을 돌렸다.
"합격했어."
하지만.. 나는 집으로 들어가지 못했다.
"읍?!"
어느새 나의 팔목을 부여잡은 그가 나의 입술에 키스해대고 있었다. 두 번째가 되는건가...?
그의 기습적인 키스를 받는 것이.. 그리고.. 나는 그 두 번째 에도 아무런 반항을 하지 못했
다. 열심히 나의 입술을 애무해주는 그의 감긴 눈... 서늘해 보이는 눈... 나는 그의 눈만을
응시 할 뿐이었다.
"하아...."
얼마의 시간이 지났을까? 꽤나 오랫동안 나의 입술을 탐하던 그가 천천히 입술을 떼어냈다.
은빛으로 빛나는 침이 가늘게 실로 이어졌다. 그는 나의 입술을 이제는 더 이상 곱지만은
않은 손으로 살살 닦아 주었다. 예전 나의 눈물을 닦아 주던 때와 전혀 달라지지 않은 지나
치게 다정한 손길.. 조심스러운 손길... 나는.. 그의 맑은 눈동자 만을 바라볼 뿐이었다.
조금은 진지한 그의 눈동자가 우스웠다. 하지만 난 웃을 수가 없었다.
"고마워... 이젠.. 귀찮게 하지 않을게..."
처음으로 보는... 그의 환한 미소.. 그 미소는... 눈부실 정도여서... 난.. 그만 눈을 감아버렸다.
감은 나의 눈 위로 차가운 눈이 떨어져 내렸다. 그리고.. 다시 한번 그의 뜨거운 입술이 느
껴졌다.
그는.. 그 날로부터 일주일 후... 대기업 회장 딸이라는 어여쁜 아가씨와 결혼 했다.........
강찬휘
[완결/중편] 형. 下
나에겐... 형이 하나 있다....
몇일 전부터 난... 심한 열병을 앓았다...
그것은 그가 결혼식을 하던 날 부터인 것 같았다. 마치 쫓기는 사람들처럼 그 부잣집 딸과
결혼을 하던 그는 결혼식장에서 수 많은 하객들을 향해 그녀와 영원한 사랑을 맹세하는 모
습 마저도 무표정했다. 서늘한.. 무표정..
그리고.. 어쩌면 그의 모습들 중에서도 가장 좋아한다.. 라고 할지도 모를 그 듣기 좋은 낮은
목소리로 주례사의 '영원히 사랑하겠습니까..?' 란 질문에 짤막하게 '네.'라고 대답했다.
그 순간부터 일 것이다. 나는.. 왜인지 알 수 없는 고열에 시달렸다. 슬픈 것 같지도 않았다.
아픈 것 같지도 않았다. 그와 그녀가 신혼여행을 떠난 날.. 나는 그 좁은.. 단칸방에 누워 하
루 종일 눈물을 쏟으며 심장을 부여잡고 있었다.
아름다운 여자였다. 묘한 색기까지 흐르던 여자였다. 무릇 사내들이라면 한번이라도 품에 안
아 보고 싶음 직한 아름다운 얼굴.. 거기에다 그녀는 몸매까지 예뻤다. 빵빵한 가슴 때문에
하얀색의 웨딩드레스가.. 그녀의 짤록한 허리 때문에 그녀의 새하얀 웨딩드레스가.. 볼록하게
선을 이은 유려한 엉덩이의 곡선이 그녀의 하얗디 하얀 웨딩드레스를 조금은 야하게 만들었
다. 순결해야 할 새 신부의 모습을 보며 난 알 수 없는 욕지기가 쏟아져 나올 것만 같았다.
'창녀...'
주례사의 '영원히 사랑하겠습니까..?'란 질문에 그 아름다운 얼굴과 몸매 만큼이나 새련된..
마치 노래라도 부르는 듯한 음성으로 '네.'라고 대답하는 그녀의 음성에 나는 욕지기가 쏟아
져 나올 것 같았다. 나는... 그녀의 행복해 보이는.. 어쩌면 순진해 보일 수도 있는 미소에 그
저 '창녀..'라는 말만 입 속으로 웅얼거렸다. 그녀는.. 그 보다 7살이나 나이가 많았다.
하지만 지나치리 만치 아름다운 그녀의 얼굴이 그와의 나이차이를 전혀 느끼지 못하게 만들
었다. 아름다운 그녀는... 그와 너무도 잘 어울렸다.
사랑의 맹세를 한 그들이 키스 하는 순간.. 나는 그만 '그날'의 일을 떠 올리고 말았다. 서툰
그의 입술... 마치 어미의 젖을 찾는 맹수처럼 내 입술을 끊임없이 갈구 하던 그 모습.. 그것
은 어쩌면 살아 남기 위한 사투처럼 보였었다. 하지만 지금의 그는.. 그저 그 서늘한 눈으로
그녀의 탐스러운 입술에 가벼이 입만 맞출 뿐이었다.
나의 입술을 물어 뜯을 듯이 탐하던 그 열성적인 모습은 온데 간데 없고, 그저 무미 건조한
얼굴로, 그녀의 입술에 가벼이 입을 맞출 뿐이었다. 우습게도 난.. 그런 그의 서늘한 눈빛에
우쭐해 하는 나를 느낄 수 있었다.
신랑, 신부 퇴장... 조금은 식상한 결혼 전주곡이 흐르고.. 그의 팔짱을 낀 그녀가 수줍게.. 혹
은 매혹적인 미소를 지으며 점차 나에게로 다가오고 있었다. 그녀의 집안의 분위기를 일깨
워 주기라도 하듯 야외에서 치루어진 결혼식장은 발 디딜 틈이 없을 정도로 혼잡했고, '신데
렐라' 공주가 아닌 '왕자'의 이야기로 언론에서 까지 취재를 나온 성대한 결혼식이었다. 사람
들의 틈에 끼지도 못하고, 그저 먼 발치에서 그들을 지켜 보고 있던 나는. 그와 눈이 마주
치자 조금은 웃었던 것 같다. 과연.. 나는 어떤 표정을 짓고 있었을까..?
서늘한... 감정이 담기지 않은 무미 건조했던 그의 눈동자가 조금은 촉촉하게 젖어들었다. 나
와 눈이 마주치자 그 눈은 조금은.. 슬프게.. 아니, 어쩌면 나의 입술을 탐하던 때와도 같이
조금은 탐욕스럽게 일그러졌다. 하지만 그런 그의 상태를 깨달은 사람은 나 뿐이었고, 수 많
은 하객과 기자들은 그런 그의 표정을 보지 못했다.
어쩌면 그것은 나만의 착각일지도 모른다. 그는.. 그의 표정만은 무덤덤했으니까..
'울지마...'
잘못 보았을까..? 그의 입술이 작게 달싹였다. 무슨 말인지 알아 들을 수가 없다.. 라고 생각
했을 때.. 그가 다시 입술을 열어 달싹였다.
'울지마..'
미친 놈... 나는 울고 있지 않아.. 네 앞에선.. 네 앞에선 죽어도 눈물 따윈 보이지 않을꺼다.
이 미친 놈아...
하지만 나는 그 말을 차마 입에 담지 못했고.. 갈증나는 눈으로 나를 바라보는 그가 부담스
러워.. 눈을 감아 버리고 말았다.
2틀..? 3일...? 얼마의 시간이 지났는지 알 수 없다. 나는 고열에 시달리며 아팠고, 그런 내
곁엔 아무도 없었다. 3일 동안 한끼도 먹지 않고 굶어서 인지, 정신 마저 혼미해졌다.
밥을 먹지 않으려고 한 게 아니다. 그저.. 그저 항상 나의 투덜거림을 받으면서도 맛깔스러
운 고기반찬에.. 단아한 마른 반찬을 내어오는 그의 모습이 보이지 않아서도 아니다.
그저.. 난 밥을 할 줄 모르기 때문이었다.
내색하지 않으려 했지만 지난 1년 반개월 가량을... 매일 동안 부르튼, 잔뜩 물집 잡힌 손을
가지고 힘겹게 밥을 퍼먹는 그가 곁에 없어서가 아니다. 그저.. 난 한번도 밥을 한적이 없기
때문이었다.
밥을 할 줄 모르는 난.. 그래서 그가 3일만에 나타났을 때.. 정신을 잃고 쓰러져 있었다.
처음으로 내가 꺼낸 말은 '미친놈..'이었다.
눈을 뜨니 제일 처음으로 보이는 것은 새하얀 천장.. 그리고.. 마치 부셔버릴 듯 온 힘을 다
해 내 손을 잡고 있는 그의 새하얀.. 하지만 조금은 검게 그을린.. 하지만 여전히 새하얀 그
의 커다란 손이었다. 눈 앞이 빙글 빙글 돌았다. 천천히 눈을 돌리자 눈에 들어 온 것은 온
통 눈물로 젖은 그의 맑은 눈동자 였다. 커다란 덩치를 해가지고... 서늘한 인상을 해가지고..
마치 어린아이처럼 울어대는 모습이라니.. 헛 웃음이 나오려 했지만, 그의 한마디에 난 그저
'미친 놈..'이라고 씹퉁댔을 뿐이다.
"죽지마.. 죽으면 안돼.. 죽으면 안돼...."
"왜.. 방에 쓰러져 있었어...?"
"....아팠어..."
"아..팠어...?"
"그래.. 아파 죽겠는데.. 곁엔 아무도 없어서..그래서 그냥 누워있었을 뿐이야.."
"왜.. 밥 안 먹었어...?"
"....................................................."
"왜... 밥...."
"내 손에.."
"?"
"내 손에.. 물 한 방울 묻지 않게 해준다는.. 어떤 멍청한 새끼 때문에...."
".............................................................."
그 지긋 지긋한 집에서 벗어났다. 정말 말로만 들었던 연탄으로 방안을 덮혀야 했던.. 그와
내가 누우면 정말 너무도 좁아.. 빌어 먹을 정도로 좁아서, 항상 자고 일어나면 그의 품에
안겨 잘 수 밖에 없었던... 뜨거운 물이 나오지 않아 항상 그가 뜨거운 물을 덮혀 줬던.... 가
끔씩 그와 함께... 뜨거운 물을 받아 놓고, 서로의 등을 밀어주던 작디 작은 부엌을... 다 벗
겨진 낡은 파란색 대문이 있던 그 집을... 벗어났다.
부잣집 딸과 결혼한 그가 제일 먼저 찾은 것이 내가 살 아파트였다. 그는 나와 살기를 원했
으나, 그의 조금은 절박해 보이던 부탁을 거절 한 것은 나.. 나는.. 그와 그녀가 살고 있는
집에서는 잠시도 있고 싶지 않았다.
별다른 이유따윈 없었다. 그저 싫을 뿐.. 그를 향해.. 예쁘게 웃는 그녀의 웃음이 싫을 뿐...
그와 한 침대에서 잘 그녀가 싫을 뿐.. 그의 입술에 키스하고.. 그의 아침 상을 봐줄 그녀의
모습이 싫을 뿐.. 그녀는.. 아마도 그와 섹스도 하겠지... 그저 싫었다.
그래.. 포르노도 아니고.. 실사를 그렇게 보는 것은 싫었다. 포르노 비디오라면 지겨울 정도
로 봤었다. 그와 한집에 살면서 둘이서 찍어댈 수 많은 포르노 비디오 들이 지겨웠을 뿐이
다. 그래서 난 그의 제의를 거절하곤 여전히 낡은 푸른 대문이 있는 언덕 위의 집에서 살기
로 했다. 하지만 그는 나를 위해... 정말 지나치게도 넓은... 너무 넓어 그 집에 들어설 때마
다 느껴지는 냉기에 내 마음이 얼어버릴 정도로 넓은 아파트 한 채를 내게 선물해줬다.
속이다 시원했다. 나의 까다로운 입맛에 맞춰 밥을 해주는 그 대신에 아침마다 밥을 해주는
아주머니가 있는 커다란 집은 정말 속이 다 시원할 정도였다. 내가 좋아하는 고기 반찬도
여전했고.. 내가 좋아하는 방금 한 밥도 여전했고.. 하지만 조금 더 많은 수의 반찬들이 식탁
을, 혼자 먹기 버거울 정도로 가득 메웠지만.. 난 시원했다.
한 여름에도 뜨거운 물로 씻는 나를 위해 항상 그 큰 덩치로 부엌에 쪼그리고 앉아 물을 덮
히는 그 대신, 뜨거운 물이 콸 콸 나오는 거대한 욕실이 있어, 난 속이 다 시원했다.
더 이상 구더기 떼라든지, 모기 떼에게 시달리지 않아도 되는.... 더 이상 더러운 똥 냄새가
나지 않는 깨끗한 수세식 화장실이 있어 난 속이 다 시원했다.
너무 좁아서.. 항상 둘이 꼭 끌어안고 자야 했던 좁은 단칸방이 아니라 방이 3개나 되는 커
다란 집에 속이 다 시원했다. 하지만.. 가끔씩 들어 올 때마다 느껴지는 냉기에.. 적막감에..
난 다시 예전.... 내가 아직은 어린아이 었고, 어머니는 항상 그 때문에 외국에 나가있던.. 항
상 바빴던 아버지는 몇 날 몇 일이고 집에 돌아오지 않았던.. 그때 그 시절이 떠올라.. 너무
도 외로워서.. 난 나의 새로운 집에 들어가는 대신, 새로 사귄 여자 친구들의 집에서 지냈다.
왜인지 몰라도 난 사람의 온기가 없으면 잠들지 못했다. 커다란 집에 혼자 남아 있는 듯한
외로움.. 대학 새내기가 되면 의례 그렇듯이 수 많은 술자리가 있었고, 항상 그 술자리에서
미친 듯이 술을 마시는 나의 모습에 이미 과 내에선 주당이라 불리웠다.
처음으로 사귄 여자는.. 나보다 1살 많은 같은 과 선배였다.
그녀는.. 그와 같은 서늘한 눈을 가지고 있었다. 그녀와 처음 자던 날.. 나는 알 수 없는 서
러움에 지친 그녀를 끌어 안고 엉엉 울었었다. 그녀는 그런 나의 모습에 다정하게도 나의
머리를 쓸어 주며 이렇게 말했다.
"외롭구나... 그렇지..?"
난.. 마치 누나 같이 다정한 그녀의 말에.. 울다 지쳐 잠들 때 까지 그녀의 포근한 가슴에 얼
굴을 기댄 채 울어댔다. 그녀의 집에서 살기 시작했다. 그녀와 함께 지내면서 나는 마치 어
린 아이라도 되는 양. 그녀가 모든걸 해주기를 원했다. 항상 고기 반찬에..금방한 밥을 달라
고 투정을 부렸고.. 뜨거운 물이 콸 콸 나오는 욕실을 두고도, 물을 덮혀 달라 투정을 부렸
다. 그러면 그녀는... 누군가를 연상시키는 서늘한 눈매를 조금 가늘게 뜨곤 빙긋이 웃었다.
그녀는.. 내게 다른 여자가 생기고도.. 그리고 그 다음 여자가 생겨도.. 나의 곁을 떠나지 않
았다. 그때 안 사실... 서늘한 눈을 가진 사람은.. 절대로 차갑지 않아.. 그와 반대로.. 너무도
따스해서.. 너무도 상처 받기 쉬워서.. 그 따스함을 서늘한 빛으로 갈무리 하고 있을 뿐...
그녀는.. 내게 다른 여자가 생겨도, 내가 원하면 언제나 나와 자줬고, 내가 울면 나의 눈물을
닦아주었고, 내가 술먹고 주정을 부려도 모두 모두 웃으며 받아 주었다. 마치.. 그 누군가를
연상 시키 듯... 그녀의 따뜻한 관심에.. 난 다른 여자가 생겨도 항상 그녀와 지냈고, 다른 여
자와 잠을 자도 항상 그녀의 집에 들어와 잠을 잤다. 그것은.. 마치 예전.. 그와 내가 함께
살았던 낡아버린 파란 대문 집과도 같은... 그런 것이었다...
그렇게.. 일년이라는 시간이 흘렀다...
그가 결혼을 하고 난 후.. 난 한번도 그를 찾아 가지 않았다. 혹시 그는 나를 찾았을 지는
모르나, 나는 그를 찾지 않았다. 나의 '그녀'와 함께 지냈다. 이젠 더 이상 밤마다 뜻모를 울
음이 터져 아프지도 않았고, 이 여자, 저 여자를 찾아 다니지도 않았다. 나는... '그녀'를 사랑
하게 되었다. 정착하고 싶었다. 아직은 어린 나이이고, 직장도 없지만 난 그녀와 함께 있고
싶었다.
"나랑.. 결혼해 줄래요..?"
나의 말에 그녀는 조금도 놀라지 않고.. 그저 빙그레 미소만을 지으며 내 입술에 가볍게 입
맞춰주었다.
"글세.. 어쩌면 니가 내게 청혼해 올걸 여지껏 기다려 왔을지도 몰라.. 하지만.. 지금의 너는
전혀 준비가 되어 있지 않아..."
부드러운 목소리로 나를 달래는 그녀의 말에 나는 가만히 고개를 끄덕였다. 나는 여전히 금
방한 밥에 고기 반찬을 달라고 투정을 부리고, 아직도 물을 덮혀 달라 투정을 부렸으며, 아
직도 잘 때 꼭 안아 달라 투덜대는 어린 아이었으니.. 난.. 그저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조금만.. 조금만 더 시간이 흐르고 난 뒤에 말이야.. 그때.. 니가 정말 준비가 돼었
다 싶으면, 네가 싫다고 해도 내가 억지로 결혼 할꺼니까.. 각오하라구..."
그녀가 너무도 사랑스러워..난.. 그때 아마도 울었던 것 같다..
그를 다시 본 것은 나의 집 앞이었다. 조금은 늦은 시간...그때 보다 더 말라 버린 모습... 조
금은 그을려 보였던.. 조금은 건강해 보였던 그을린 얼굴은 처음 그를 보았을 때 보다 더 창
백해 보였다. 오랜만에 집에 들렸던 나는 그의 모습에 그저 멍하니.. 아무런 말도 하지 못하
고 그의 뒷 모습만을 주시할 뿐이었다. 조금은 길어진 앞머리가 그의 하얀 이마를 덮고 있
었다. 그는..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 수 없는 서늘한... 하지만 너무도 맑은 눈동자로 내가 기
거하고 있는 아파트 15층을 주시하고 있었다. 그리고... 얼마의 시간이 흘렀을까..? 새벽 3시
쯤... 그는 가볍게 한숨을 내 쉬며 발걸음을 옮겼다. 나는... 그의 뒷모습에.. 이젠 다 낳은 줄
알았던 심장 병이 다시 도진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심장이 철렁.. 하고 내려 앉았다. 그것은
생각보다 너무도 아파서.. 난 그냥 그 자리에 주저앉아 심장 께를 부여잡고 흐르는 눈물을
씹어 삼킬 뿐이었다. 그리고.. 그 다음날.. 또 그 다음날.. 또 그 다음날.. 그는.. 항상 같은 시
간.. 같은 장소에서 나의 아파트를 바라보고 있었다. 대체..그는 얼마 동안이나 이런 일을 해
온 것일까?
그의 그녀를 만났다...
여전히 아름다운 그녀는.. 처음 그녀를 보았던 결혼식장에서 보다 더욱 아름다워져 있었다.
하지만.. 그녀 또한 조금은 초췌해진 몰골로 나를 마주 대하고 있었다. 그런 그녀의 모습에
묘한 쾌감이 솟았다.
"처음 뵐께요..."
그렇다.. 그녀의 입에서 나온 이 말한 마디.. 그녀와 나는 정식으로는 처음 만나는 것이었다.
"단도..직입적으로 말하지요... 그를 만나줘요."
"?"
"쿡.. 그래요.. 다 제 욕심에서 비롯된 일이예요. 그를 사랑했거든요.. 그 서늘한 눈.. 그 눈을
처음 보는 순간 저는 사랑에 빠져 들었어요. 그를.. 감당할 수 있다고 생각했어요. 아니, 어
쩌면 그것은 마치 미꾸라지처럼 걸핏하면 제 손에서 빠져 나가려 드는 그를 잠시만이라도
손아귀에 질 수 있다..라는 묘한 정복욕이었을 지도 몰라요. 하지만.. 아직도 그를 사랑하는
것은 진심이예요."
그녀의... 이야기를 이해 할 수가 없었다.
"그의... 아이를 가졌어요."
"?!"
"쿡.. 저는.. 이걸로 만족해야 하는 거겠죠... 쿠쿡.. 더 이상..그를 붙잡고 있는 다는건.. 그에
게나.. 그리고 나에게나.. 너무도 잔인한 일 일 꺼예요.. 그렇죠...?"
동의를 구하듯 내게 물어오는 그녀의 눈동자는 어느새 눈물로 잔뜩 젖어 있었다. 아름다운
얼굴.. 그와 유난히도 잘 어울리던 그녀..
"그....... 얼마 살지 못해요.. 물론 알고 있겠지만.."
"?!!!"
"길어야 1개월.. 이래요. 물론 알고 있었겠죠? 당신은.. 그의 연인이었으니까..."
뭐?! 무슨.. 대체 무슨 말인가?!! 그의 연인? 아니, 아니 그런 것 보다.. 그가.. 죽어?! 그가
왜? 대체 왜?! 조금 마르긴 했지만 그는 매일 같이 차가운 밤 공기를 쐬며 나의 집 아파트
에서 몇 시간이고 서있는데? 아니..아니.. 그보다.. 그보다..
"그와의 약속대로.. 지금 살고 있는 아파트..그리고 작은 가계하나는 차릴 수 있을 만큼의 돈
은 곧 당신에게 넘길께요. 당신... 참 부러워요.."
"자..잠깐만요..!!"
"아니.. 아무런 말도 말아요.. 당신이 한마디라도 하면... 난 화가 날 것 같으니까. 내 곁에 있
으면서도.. 항상 당신 얘기만 하는 그가.."
그녀는 거기까지 얘기하고는, 자기가 마치 비련의 여주인공이라도 되는 양 입을 틀어막고
카페를 뛰쳐 나갔다. 마치 한편의 희극을 보는 듯한 착각... 미친 듯이 웃음이 삐져 나올 것
만 같았다. 씨발.. 뭐야.. 저년.. 자기 할말만 하고....
"와장창--!!!"
내 손에 들려있던 유리잔이 거칠게 바닥으로 고꾸라지며 요란한 비명음을 내질렀다. 웅성거
리는 사람들.. 당황한 듯 달려오는 점원...
'씨발... 씨발.! 씨발!!!! 개 새끼.. 미친 놈! 지가 ..지가 뭐라고.. 씨발! 무슨 말인지 하나도 모
르겠잖아~!! 이 씨발.. 이 씨발...!!!!!!!'
다치지 않았냐는 점원의 말을 한 귀로 흘리며 만원짜리 지페를 손에 잡히는 대로 집어 아무
렇게나 던지며 나는 뛰었다.
'개 새끼.. 이 씨발놈..!! 넌 오늘 죽었어! 넌 오늘 죽었어~!!!!'
"하아..하아...하악...!"
거친 숨을 내쉬는 나의 모습에도 그녀는 아무런 말이 없었다. 누군가를 연상 시키는... 서늘
한 눈을 하곤..그녀는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나... 나...."
무슨 말을 해야하나...? 무슨 말을 어떻게 해야하나...? 그녀는.. 나..라는 말만 되뇌이는 나를
향해 그저. 빙긋이 미소지어 줄 뿐이었다.
그리곤.. 나의 입술에 가볍게 입맞추며..
"다녀와... 언제까지나 기다릴게... 하지만.. 너무 길게 기다리게 하면 안돼.. 알았지..?"
"퍼억~!!!"
오늘도 나의 집앞에 서있는 그를 보곤 다짜고짜 주먹을 날렸다. 커다란 덩치를 해가지곤, 조
금의 반항도 못하고 벌러덩 넘어지는 그 모습에 또 머리 끝까지 화가 치밀어 올라 나는 그
의 위에 올라타 미친 듯이 그를 때려댔다.
"이.. 이 씨발! 이 씨발! 이 씨발 놈아~!!! 이 개새끼! 이 개새끼!! 너 같은 새끼.. 너같은 새
끼..!!!"
얼마나 그를 팼을까..? 그의 흰 얼굴이 온통 피로 물들었고, 그의 입술이 터져.. 하지만 이상
하게도.. 아픈 것은 그일 텐데.. 때리는 사람은 나인데.. 울고 있는 것은.. 나였다.
한참동안 그를 두들겨 대도 아무런 반항조차 하지 않던 그.. 그가 그 커다란.. 손으로 나의
뺨을 감싸며..
"울지마... 울지마.. 제발..."
난.. 그의 목털미에 얼굴을 묻고는 엉 엉 울어 버릴 수 밖에 없었다.
우리는.. 그 좁디 좁은 집을 향해 올라가고 있었다. 한 겨울임에도 불구하고, 우리 둘은 땀을
뻘뻘 흘리며.. 그렇게 그 좁고, 가파른 길을 올라가고 있었다.
"넌.. 미친 새끼야..."
"그래..."
"그거 알어? 난 니가 무지 싫어..!"
"알아.."
"씨발 놈..."
"응.."
"나쁜 새끼.."
"응..."
"너 나랑 형제란거 알아?"
그제서야 나를 바라보는.. 나의 주먹질에 퉁퉁 부운 얼굴을 한.. 조금은 웃긴 얼굴을 한 그가
나를 본다. 그리곤... 빙긋이 웃는다.
"응..."
"씨발.....놈...."
"미안해..."
"개 새끼.."
"...정말 미안해..."
"엄마 아빠 돌아가셨을 때 울지도 않았던 새끼.. 너 무지 나쁜 새끼야.."
"알어.."
"씨발놈.. 내가 너 얼마나 싫어 하는지 알아?! 너 때문에 나는 매일 커다란 집에 혼자 있었
다구..!"
"미안..."
"미친놈.. 너 처음 봤을 때.. 씨발..."
"미안.. 하지만 ...."
어느새 올라온 낡은 파란 대문.. 우리가 나갔던 모습 그대로 그 집은 변함이 없었다. 여전히
색이 바랜 낡은 대문을 가지고 있었고... 여전히.. 쓰러질 것같은 작은 단칸방을 가지고 있었
다. 문을 들어서며.. 그가.. 조용히.. 그 큰 손으로 내 손을 맞잡아 왔다.
"하지만.. 말야..."
그는.. 온통 상처 투성이인 얼굴을 하고도 여전히 담담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여전히 서늘
한 눈매를 하고 있었는데.. 퉁퉁 부운 눈이 그 눈을 가려서 조금 아쉽다는 생각을 했다.
"하지만.. 난 너를 처음 봤을 때부터.. 아니, 처음 어머니에게.. 너의 이야기를 듣는 순간부
터.. 너의 사진을 본, 그 처음 순간부터.. "
잔뜩.. 터져서는 검은 피딱지가 앉은 그의 입술이 천천히.. 나의 입술로 내려 왔다. 미친놈..
아프지도 않아..? 처음은 부드러웠지만.. 점차 격해지는 그의 입술에.. 그의 애무에.. 나의 입
술은 저절로 벌어졌다. 마치 나를 삼킬 듯이 쳐들어 오는 그의 혀에.. 나는 그저, 풀려 지탱
하고 있기도 힘든 다리에 잔뜩 힘을 준채, 그의 옷깃을 부여잡고 있을 수 밖에 없었다.
사라락... 사라락.. 어느새 하늘에서 내려오는 하얀 눈송이들이 나의 눈가에 차갑게 내려 앉
았다. 그의 입술이 떨어져 나가고.. 격해진 숨결을 고르는 나의 귓가로.. 내가..어쩌면 그의
모든 것들 중 어쩌면.. 가장 좋아한다고 생각 하는 것일 지도 모를 그의 낮은 음성이 들려왔
다.
"...네.. 손에.. 물 한방울 묻지 않게 해줄게.... 나랑.... 결혼할래...?"
씨발놈.. 개새끼... 곧 .. 죽을 새끼가.. 곧...
"나... 고기 반찬에.. 금방한 밥.. 해줘..."
그의.. 처음으로 듣는.. 커다란 웃음소리가 내 귓가를 때렸다.
나에겐... 형이 하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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