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캐롤라이나 1부
밍키넷 0 8,171 2023.08.21 13:52
캐롤라이나 1부



   천사님의 깃털이 쏟아지는 건지도 모르겠다. 
하얀 깃털에 포근히 잠기는 발목을 물끄러미 내려다 보며 한동안을 가만히 있었다. 

   차갑다.
입에서 하얀 김이 새어나온다. 화이트 크리스마스라면 좀 더 따뜻해 져도 될 텐데. 왜 이렇게 차가운 걸까. 고개를 들어보니 누나가 날 웃으며 보고있다. 다만 누나의 순한 눈매만은 잔뜩 흔들려서, 웃는 것도 우는 것도 아닌 애매한 태를 띈다. 


   하얀자위가 금방 빨개진다. 누나의 눈이 사정없이 눈물을 떨군다.
조용히 다가와 날 와락 껴안는 두 팔에 난 조용히 말했다. 

  "두려워하지마. 누나가 좋아하는 안개꽃도 노란 카나리아도 언젠가는 하늘나라에 가는 법이잖아."
  "넌 내가 아니잖아. 살 수 있으니까 그렇게 말하는 거야. 그렇지?"
  "아니."
  "그러면? 너도 날 따라와 줄 꺼야?"

  누나는 예정된 죽음이란 공포앞에서 마음에도 없는 말을 내뱉은 것이리라. 하지만 난 진심을 담아 말했다.

  "아니. 내가 그곳에서 기다리고 있을게."





  나에겐 어머니가 없었다. 아버지도 없었다. 
배냇머리 시절부터 날 먹이고 입히고 재운 것은 누나 뿐이었다. 누나는 나의 어머니고 아버지였다.
  누나는 내게 말을 하지 않았지만, 난 어릴 적 어느 땐가부터 부모가 우릴 버렸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게 어떤 이유인지는 알 수 없지만, 한가지 확실한 건 누나는 날 키우기 위해 온갖 궂은 일을 다 했다는 것이다.
  못난 부모에게 버림받은, 가진 것 없는 열 여섯살의 소녀. 특출한 재주도 가진 것도 없는 미성년자가 넉넉한 돈을 벌 방법은, 학교를 그만두고 미성년자 출입금지의 유흥업소에서 일하거나 몸을 파는 것뿐이었다. 
  난 그렇게 헌신적인 누나 손에서 자랐다. 
날 버렸다면 훨씬 좋은 삶을 살 수 있었을텐데 그렇게 하지 않는 누나에게 언제나 고마웠다. 가난에 찌든 삶이었지만, 온갖 진흙물은 누나가 뒤집어썼다. 헌데 에이즈라고 한다. 

  쓰러지듯 바닥에 드러누으니 곰팡이 쓴 천장이 날 무심하게 내려다본다. 언제부터 그랬던 걸까. 누나의 몸 어딘가가 저 곰팡이 쓴 천장처럼 변해가고 있는데, 왜 난 몰랐던 걸까. 
  서글픔보다 치밀어 오르는 것은 차가운 두려움. 
왜 그런 더러운 병 따위 걸려버린 거야! 누나가 없으면 난 어떻게 하라고! 나 혼자 세상의 진흙물을 뒤집어 써야 하는 거야? 보호해 주고 감싸주는 사람 없는 이런 좁고 곰팡내나는 방에서 혼자 아등바등 살기 위해 악을 써야 한다고? 

  미안해 누나!
누나가 죽는 것을 슬퍼해야 하는데, 비참해질 내가 더 가여워 누나! 자신이 없어. 누나 없는 세상에 사는 게 죽는 것 보다 두려워.
  심장이 터질 듯 치밀어 올랐던 격정이 북받힌 고함으로 사라지고, 비틀거리며 더러운 부엌으로 가서 과도를 뽑아 들었다. 섬뜩한 은빛에 짐짓 소름이 돋는다. 찌르고 나면 후회할 지도 모른다. 누나가 에이즈라는 것을 알고 난지 두 시간도 채 되지 않았으니까.
  하지만 이 때가 아니면 난 죽지 못 할 거야. 이 비정상적인 광기와 두려움은 곧 냉정한 이성과 치밀어 오르는 슬픔에 침몰되어 버릴 것이다. 난 칼날을 내 쪽으로 하여 거꾸로 쥐고 눈을 감았다. 손이 부들부들 떨린다. 죽어야 돼. 죽어야 돼. 죽어야 돼. 

  "불쌍한 아이구나."
  "누구야!"

  놀라 눈을 뜨니 흰 수염이 얼굴을 풍성하게 덮고 있는 왠 백인 할아버지가 애처로운 얼굴로 날 물끄러미 쳐다보고 있었다. 빨간 산타모자에 빨간 장화? 잠시 넋을 잃은 사이 배불뚝이 노인은 내 손목을 쳤다. 화끈한 통증에 앗하는 순간 노인은 바닥에 떨어진 칼을 주워들었다. 그러자 마술처럼 공중에서 칼이 사라져버렸다.

"아무리 슬퍼도 목숨을 끊으면 안 된단다 얘야."
"상관하지 말고 나가주세요!"

  남의 집에 무단침입한 주제에 이제는 여유롭게 뚱뚱한 엉덩이를 바닥에 붙이기까지? 헛웃음 밖에 나오지 않는다. 아까 전까지의 처절했던 심정과 비장한 각오는 다 풀려버려 맥이 빠진다. 저 사람 때문에! 이제는 죽지 못할 텐데!

  "오호. 내가 끼어들어서 억울한가 보구나."
  "나가 주십시요!"
  "못 하겠다." 
  "예?"

  노인은 한 번 뜸을 들이더니 이렇게 말했다.

  "라인(螺人)이 네가 죽으면 내가 슬플테니까 말이야."

  내 이름을 어떻게? 이런 내 마음을 아는지 노인은 천천히 그가 누구이며 나를 어떻게 아는 것인지 설명하기 시작했다. 어느새 그의 손에 나타난 따뜻한 우유 한 컵을 내게 건네며. 

  그의 이름은 산타클로스, 나이는 너무 많이 먹어 세얼리기를 그만 두었다고 한다. 직업은 착한 어린아이들에게 선물을 나누어주는 것인데, 크리스마스에 산타가 직접 방문하는 아이들은 아주 적은 수의 아이들 밖에 되지 않는다고 한다. 실상은 요정들과 루돌프들이 대부분의 아이들에게 선물을 주러 가는 것이다. 

  십년 전 산타클로스는 선택받은 백 명의 너무나 착한 아이들을 만나러가기 위해 크리스마스 날 마차를 타고 움직였다. 그는 스위스부터 시작해서 북해, 지중해, 아메리카, 아프리카를 거쳐 인도양을 지나 마침내 아시아까지 왔는데, 유난히 잠이 짧아진 요즘 사람들 때문에 시간이 모자라 그만 백 번 째 아이를 만나지 못했다. 그래서 산타클로스는 백 번째 아이를 내년에 만나기로 하고 북극으로 돌아갔다.

  그러나 다음 해도 그 다음 해도 산타클로스는 백 번 째 아이를 만나지 못하고 돌아가야만 했다. 그렇게 미뤄진 게 십 년. 

  그 아이가 바로 나라고?
잠시 이 할아버지가 미친 게 아닌가 싶었다. 하지만 산타클로스는 그 뚱뚱한 몸으로 공중부양을 해서 날 믿을 수밖에 없도록 만들었다.

   "네가 언제나 신경이 쓰였단다. 혹시 실망하지 않았을까, 산타를 믿지 않게 되는 것은 아닌가하고 말이야."
   "그래서 십 년 전에 내가 달라고 빌었던 선물을 주려고 왔다 이건가요?"

  웃기지도 않아. 이미 열 여섯살인 내가 여섯 살짜리가 가지고 놀던 걸 받아봐야 좋아할 이유가 없잖아. 

   "아니 아니. 이미 큰 네가 로보트를 가지고 싶어할 리는 없다고 생각 했단다. 네가 필요로 하는 것을 주려고 했는데 이제와 보니 네가 무엇을 원하는지 알 것 같구나."

   내 비웃음에 배알도 좋게 웃는다. 불쾌해져서 퉁명스레 물었다.

   "그래, 제가 지금 필요한 게 뭐예요?"
   "누나를 살리고 싶지?"
   "!..살릴 수 있나요!"

   바닥에 급히 앉아 그의 두 어깨를 잡고 흔들었다. 누나만 살 수 있다면 뭐든지 할 수 있어. 뭐든지!

   "너희 누나가 죽으면 다른 세계에서 태어날 거다. 여기처럼 사람이 살아가는 곳이지. 만약 네가 누나대신 그 곳에 가면 누나는 죽지않고 이곳에서 살게 된다. 그렇게 되면 네 누나는 너의 복을 대신 물려받고 너는 다른 세계에서 네 누나가 얻을 복을 받게 된다."
   "예?"
   "운명은 정해지지 않는 법이지만 사람이 타고나는 행운은 정해져 있는 법이지. 너는 운이 좋은 편이고 네 누나는 운이 지독히도 나쁜 아이라...네 누나가 그토록 고생한 것에 비해, 너는 고아원에 버려질 위기에서 벗어날 수 있었던 거지."
   "그걸 어떻게..."
   "내가 어떻게 나쁜 아이와 착한 아이를 구분할 수 있겠니. 그건 세상 방방곡곡에 살고있는 요정들이 아이들에 대해 알려주기 때문이란다. 그 중에는 너와 네 누나 이야기도 있었어."

   산타클로스는 익살맞게 한 쪽 눈을 찡긋거렸다. 

   "네 누나는 이곳에서 너무나 불행했기 때문에 그 세계에서는 운이 좋아질거다. 하지만 다시 태어나기 때문에 모든 것을 잊게 되겠지. 자신이 불행했던 것도. 그렇게 되면 같은 영혼이라도 다른 사람과 같은 것이 아니겠니."
   "제가 다른세계에 가면... 전 이 몸으로 가는 건가요?"
   "그래. 너도 누나도 행복해질 거다. 물론 네 누나의 죽음을 그대로 받아들이고 이 곳에서 지내도 좋다. 그 때는 내가 너에게 풍족한 재산을 주마. 어떻게 할 테냐."
   
   풍족한 재산과 누나의 죽음. 낯선 곳에서의 삶과 이곳에서의 삶.
답은 금방 나왔다. 의지하던 누나가 없어진다는 자체가 두려운 거니까. 아아, 무서워 누나. 하지만 아무리 멀리 있어도 누나가 살아만 있다면. 날 기억하고 있다면.
   미안해 누나. 이기적인 날 용서해 줘. 
누나가 모든 것을 잊고 다시 태어난다면 더 행복할지도 모르는데. 미안해! 미안해!

   "누나를...살려주세요."
   "역시 착한 품성은 변하지 않았구나."

   산타가 손가락을 한 번 휘두르자 놀랍게도 벽 한 쪽이 커다란 벽난로로 변했다. 산타는 벽난로 밑으로 몸을 집어넣더니 내게 손짓을 했다. 내가 그 손을 잡자마자 산타는 엄청난 속도로 날 잡고 위로 솟구쳤다. 몸이 순간 납작해졌다는 생각이 든 순간, 우리는 어느새 하늘 위를 날고있는 마차 위에 앉아 있었다.

  눈에 익던 허름한 골목과 집들이 마치 장난감처럼 보인다. 
    
   "가자 루돌프! 공간을 뛰어 삼십 번 째 세계로! 이호!"

   루돌프는 한 번 히잉히잉 웃더니 이리저리 몸을 흔들었다. 난 떨어질까 놀라서 마차를 세게 붙잡았지만 산타는 즐겁다는 듯이 껄껄 웃기만 할 뿐이었다. 

   마차는 쉴 새 없이 하늘을 날았다. 저 아래로 책과 텔레비전에서나 보았던 넓은 태평양과 섬들도 지나갔다. 가는 길에 히말라야산맥도 보고 갠지스 강과 미시시피 강도 보았다. 불빛 찬란한 뉴욕과 영국의 런던, 독일의 룩셈부르크와 프랑스의 파리도 구경했다. 크리스마스의 도시들은, 불빛에 마치 살아있는 듯 반짝였다.

   그렇게 쉴새 없이 날아서 멀미 때문에 머리가 어질어질 할 쯤, 하늘에서 놀라운 것을 보았다. 얼음으로 덮인 하얀 땅 위로 마치 색색의 배일을 흔들어 놓은 듯한 광경. 

   아름다워.

   "오로라는 다른 세계로 가는 통로지. 무지개도 그렇지만, 무지개는 너무 좁아서 말이야."

  우리는 오로라 사이를 날기 시작했다. 이게 꿈은 아닐까. 
색색의 오로라가 우리의 머리위로, 아래로, 옆으로 흔들리고 있다. 손을 뻗으면 그 색에 물들지는 않을까. 뻗어보았지만 손에는 아무것도 묻어나지 않는다. 시리도록 차가운 바람만이 내 손을 찰싹이고 도망갈 뿐.

   또다시 얼마쯤 지났을까. 
갑자기 보이는 것은 거대하게 우거진 침엽수림과 하얀 눈밭이었다. 그리고 비현실적으로 커다란 두 개의 달. 

   시리도록 새하얀 달 두 개가, 창백한 얼굴로 날 내려다본다. 

   "이 곳은 이제 밤이 되었나 보군."

   산타는 그러면서 곰방대를 입에 물었다. 내 감상을 방해했는데도 본인은 전혀 깨닫지도 못하는 눈치다. 

   "여기가 삼십 번 째 세계인가 하는 곳인가요?"
   "그래. 우리가 날고 있는 이곳은 엘위론왕국이지. 동화속에서나 나오는 왕과 왕자들이 있는 곳이란다. 물론 이건 동화가 아니라 현실이니까 조심해야 할거야. 자! 그럼 슬슬 왕도로 들어가 볼까!"

   마차는 하늘에서 내려와 땅위를 달리기 시작했다. 덜컹거림이 심해서 울렁거림을 간신히 참고 있는데, 마차는 거대한 성문 앞에서 멈춰 섰다. 그러자 영화에서나 본 것 같은 갑옷을 입는 두 남자가 커다란 창을 들고 다가와서 뭐라고 외친다. 

  산타는 그들을 향해 딱딱하고 강한 발음의 언어로 뭐라 말했다. 
두 남자는 한참이 지나서야 우리를 통과 시켜주었다. 

   "뭐라고 한 거예요?"
   "손자가 아파서 급히 왔다고 했지. 마을에는 사제가 없으니까 말이야. 헤일론의 사제는 의사나 다름이 없단다. 그러고 보니 내 정신도 참!"

   산타는 먹으라면서 빨간 알약 하나를 내게 주었다. 그것을 입에 넣자마자 스르르 입 안 에서 녹는다. 으. 너무 쓰잖아! 

   "엘위론 말을 이제 할 수 있을거다. 그것도 완벽한 표준어로."

  이제는 산타가 무슨 말을 해도 놀랍지 않다. 대단하다는 생각밖에는.
산타의 말대로 난 길거리를 지나가는 이상한 옷차림의 사람들이 하는 말들을 이해할 수 있었다.

   도시는 매우 가지런했다. 곳곳에는 길다란 횃불이 서 있었고, 경사가 급한 지붕을 가진  이층 이상의 집들이 빼곡히 들어차 있었다. 길가에는 구멍이 뚫려 있었는데 아마 하수구인 것 같다. 산타는 마차를 커다란 건물 앞에서 세웠다. 그리고는 따라오라고 했다.

   나와 산타는 커다란 건물 안으로 들어섰다. 
건물은 매우 넓었는데, 빽빽한 문서가 들어찬 거대한 책장들이 여럿 있고 커다란 책상에서 여러 사람들이 뭔가 열심히 일을 하고 있었다. 산타는 그 중 한 사람 앞으로 가더니 헛기침을 크게 한 번 했다. 그러자 서류를 보는데 정신 없던 남자가 고개를 들었다.

   "집과 땅을 양도하려고 왔소."
   "성함은?"
   "캐롤 산타클로스요."
   "어느 분에게... 혹시 저 분입니까? 이리 오세요."

   집과 땅을 양도하다니? 산타는 날 향해 빙그레 웃기만 한다.
남자 앞에 산타 클로스와 나란히 서자 남자는 내게 두 장의 서류에 서명을 하고 손도장을 찍으라고 했다. 인주 비슷한 것에 엄지손가락을 찍어 지문을 남기고, 서명을 했다. 남자는 고개를 갸웃거린다.

  "본 적이 없는 글자군? 다른 나라에서 오셨는가 보지요. 엘위론어로 다시 한 번 밑에 적어주십시오."

  고민할 틈도 없이 신기하게 머릿속에 글자가 떠오른다. 
'라인'이라고 서명을 하자 남자는 '성도 쓰셔야.' 하고 재촉한다. 산타클로스의 속삭임에 할 수 없이 앞에 캐롤이라고 쓰자, 남자는 그제야 군말 없이 커다란 도장을 쾅쾅 찍었다. 

  대체 왜? 누나를 살려 준 것으로 크리스마스 선물은 끝난거잖아?
산타는 날 데리고 건물을 나오더니 다시 날 마차에 태우고는 어디론가 움직였다. 산타의 흥얼거리는 캐롤을 듣다가 결국에 소리 높여 묻고 말았다. 

   "왜 이렇게까지 도와주는 거예요!"
   "그럼 널 처음보는 곳에 내버려두고 그냥 갈 줄 알았니? 그냥 십 년간 널 기다리게 한 값이라고 생각해라. 그리고 말이야. 허허허. 돈 보다는 누나를 선택한 네가 마음에 들어서이기도 하단다."
   "그건 누나를 위해서가 아니라 절 위해서...!"
   "이유야 어쨌든 넌 누나를 죽게 할 수 없었던 것 아니니. 그렇지? 어쿠. 우리 루돌프도 그렇다고 고갯짓을 하는 구나!"

   마차는 한참을 더 신나게 달리더니 우리가 지나쳤던 성문을 빠져나와 다시 하늘로 치솟았다. 마차는 왕도에서 그리 멀지 않는 작은 숲으로 향하더니 숲 안으로 들어갔다. 숲 안 호수를 지나 마차가 내려선 곳은 하얀 벽돌로 지어진 집 앞이었다. 

   이 층의 아담한 집은 마치 유럽에서나 볼 법한 그런 집이었다. 집 앞에는 그네가 걸려있고, 앉을 수 있는 벤치도 있었다. 이게 내 집이라고? 곰팡내 나는 셋방이 아닌, 이런 집이 내 거라고?

   "왕도의 '하인상회'에 네 이름으로 돈을 맡겨 두었다. 또 집에 찾아보면 보석이랑 돈이 조금 있단다. 내일은 사람들이 찾아와 이것저것을 할 테니 알아두고."
  "감사합니다."

   기뻐해야 하는 것도 그렇지가 못하다. 얼떨떨한 것도 있지만, 이런 곳에서 누나랑 같이 살 수 있으면 얼마나 좋을까하는 생각에. 

   "넌 여기에서 삼 계급인 중인이다. 여기는 신분제니까 조심하도록! 그러면 이제 영영 볼 일은 없겠구나. 행운을 빈다."

   산타는 그 말을 끝으로 마차를 타고 사라졌다. 난 산타가 준 열쇠를 들고 한동안 마차의 뒷모습만 지켜보았다. 누나는 지금 뭘 하고 있을까. 내가 사라졌다고 울지 않았으면 좋겠는데.





   욘은 투털거리기를 계속했다. 돈 있는 것들의 하는 양은 이미 알고 있지마는 왜 구태여 도시와 어중간하게 떨어진 곳에 집을 짓느냔 말이다. 그 탓에 애꿎은 사람 고생시키고 말이야. 
  욘은 '하인상회'에 소속된 청년으로 정신나간 의뢰인 때문에 여러 잡역부들과 함께 고급 가구와 식료품들을 마차에 싣고, 왕도와 가까이 있는 호수의 숲으로 가는 중이었다. 호수의 숲은 또한 왕도에 사는 귀족들이 자주 찾는 곳이라, 귀족이라도 마주치게 된다면 골치 아프기도 하다. 

   그래서 욘의 심기는 영 좋지 않았다. 안가겠다고 버티다가 상사에게 타박 맞은 것도 한 몫했다. 욘은 투덜투덜 대다가 옆에 앉아서 한 곳에 조심히 놓인 의자를 보며 눈을 빛내는 존의 머리를 한대 쳤다. 

   "왜 때려!"
   "보기 애처롭다. 어차피 가지지도 못할 것, 보고 있으면 뭐하냐?"
   "그래도 꿈은 가지라고 있는거야. 혹시 아냐. 내가 쉰 살 정도 되었을 때는 이런 의자에 앉아 품위있게 술 한잔을 하고 있을지."
   "아서라. 개꿈은 빨리 깨는 게 좋아."
   "야! 넌 꼭 내 무지개 빛 환상에 초를 처야 직성이 풀리냐!"

   으르렁대는 욘과 존을 보며 주위 사람들은 큭큭 웃어댔다. 그 중 상자 위에 앉아있던 콧수염 사내가 한심하다는 듯 혀를 찼다.

   "네 놈들은 싸움으로 시작해 싸움으로 끝나는 게 하루 일과로구나. 그만 해라. 엉? 덩치만 커다란 것들이 맨날 앙증맞은 말싸움이라니. 쏠린다 쏠려!"
   "예예~ 그만 합죠. 그런데 형. 이거 쓰는 사람은 누구야?"

   존이 잔뜩 기대에 찬 눈으로 콧수염 사내를 보자 사내는 피식거렸다.

   "예쁜 아가씨는 절대 아니니까 안심해라."
   "쳇. 뭐야."
   "의뢰인이 그러던데 몸이 안 좋은 도련님이 호수의 숲에 있는 저택에 산다고 하더군. 중인 계급의 소년인데 부모도 없는 것 같고, 대신 물려받은 유산은 꽤 되는가 보지? 혼자 살 건가봐. 그걸 봐서는 내성적인 것 같고."
   "헹. 결론인즉 부모 잘 만난 중인 남자애가 이걸 혼자서 다 쓴단 거잖아."

  잔뜩 배알이 꼴린 욘이 빈정거리는 말투로 말을 이어갔다.

  "이 가구 값만 다 합쳐도 우리 같은 사람이 십년을 살아도 될 돈이야. 아우. 진짜 짜증나네."
  "넌 그렇게 매사에 부정적이냐? 어쨌든 그 도련님이 이렇게 우리 상회 물건을 사니까 장사가 되는 거잖아. 넌 그럼 돈 있는 사람들이 근검 절약해서 상회가 폭삭 망했으면 좋겠어?"
  "어휴. 그래. 넌 쉰 살이 되서 돈 있는 사람이 될 입장이라 이거지?"

  또다시 으르렁대는 두 사람을 보면서 콧수염 사내는 포기했다는 듯 어깨를 으쓱이더니 앞을 바라보았다. 멀리서 하얀 집 한 채가 아른거리고 있었다. 귀한 하얀 돌로 지어진 집이, 그 주인이 얼마나 고상한 취향을 가졌는지, 얼마나 재력이 있는지 알려주고 있었기에 콧수염 사내는 욘과 존을 비롯한 사람들에게 주의를 단단히 시켰다. 

마차가 집 울타리 앞에 멈춰 서자 사내는 존과 욘을 데리고 집 앞에 서서 소근거렸다.

   "다시 한 번 말하지만..."
   "알았다구."

  사내는 욘의 퉁명스런 대꾸에 헛기침을 크게 한 번 하고는 문을 탕탕 두드렸다.

   "하인 상회에서 왔습니다!"

   한참 뒤에 문이 삐꺽거리며 열리자 욘은 '얼마나 잘난 상판인지 보자'하는 생각으로 문을 뚫어져라 노려보았다. 무서워 보이는 자신의 눈에 놀란 기색이 조금이라도 보이면, 두고두고 뒷담을 까 주리라. 하지만 문이 열리고 한 소년이 모습을 드러낸 순간 욘은 차마 눈에 힘을 줄 수 없었다.

   칠흙같은 새까만 머리카락에 풍성한 속눈썹 사이로 짙은 음영이 드리워진 검은 눈동자. 특이한 디자인으로 된 붙는 옷으로 드러나는, 너무나 가느다란 뼈대와 날렵한 체구. 그 뿐만이 아니다. 귀하게 자란 도련님답게 얼굴에는 잡티하나 없었다. 입술은 창백한 붉은 색이었다. 

  약간은 지친 듯한 기색으로, 그러나 너무나 품위 있고 당당하게 서 있는 소년의 모습에, 욘은 감탄하고 말았다.

   "전 제온이라고 합니다. 가구와 식료품, 그외 여러 물품들, 잡역부들을 데리고 왔습니다. 지금 일을 시작해도 되겠습니까?"
   "예. 일은 언제쯤 끝납니까."

   완벽한 엘위론어라는 게, 소년이 하는 말을 두고 하는 소리일 것이다. 왕도의 귀족이나 구사할 법한 완벽한 발음에 욘은 멍해지고 말았다. 중인이라고? 천만에. 왕족을 해도 되겠어. 

   그 날 욘은 소년에게 말을 붙이려다 쓰잘데기 없는 소리만 몇 개 하고는 좌절하고 말았다. 일을 다 마치고 돌아오면서 존에게 비웃음을 잔뜩 들은 것은 당연한 일일 것이다.




  



   꿈에서 누나를 보았다.
내가 사라져서 잔뜩 걱정을 하고 있던 누나는, 의사로부터 뜻밖의 말을 듣고는 기뻐하고 있었다. 의사는 오진이 있었던 것 같다며 누나가 에이즈에 걸리기는커녕 매우 건강하다고 말했다. 누나는 기쁜 소식을 가출한 내가 돌아오면 알려줘야겠다는 생각에 부풀어 있는 듯 보였다.

   저기 앞에 누나가 있는데. 
난 여기서 한발 짝도 움직일 수 없어. 그래도 누나가 살아서 행복하면 그걸로 만족할 수 있어. 누나가 내 행운을 다 가진 채 행복하게 살 수 있다면. 난 여기서 누나의 행운을 가지고 살아갈게. 누나는 날 대신해, 난 누나를 대신해 살아가는 거야. 

   눈을 뜬 순간 내가 울고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누나가 죽는다는 것을 알았을 때도 나오지 않던 눈물이, 깨끗하고 이 멋진 커다란 집에 나 혼자 있을 뿐이라는 것을 철저하게 깨달은 순간. 
  눈물을 닦고 비틀비틀 몸을 일으켰다. 어제 많은 사람들이 고치고 깨끗하고, 아름답게 만들어 둔 내 집은 한없이 황량하게만 느껴진다.  

   푹신한 침대에서 일어나 커튼을 걷으니 환한 빛이 틈새로 새어들어 눈을 찌른다. 이 곳에서의 두 번째 아침. 
   그래. 이렇게 한 없이 안으로 침몰할 수만은 없어. 이제 혼자서 이 낯선 곳에서 살아야 하니까. 우선 당장 이 곳에서 입는 옷부터 사자.
   그런 생각에 집을 나섰다. 서울의 겨울처럼 차가운 바람이 내 귀와 손을 괴롭힌다. 눈 사이 드러난 맨 땅을 밟으며 어제 온 사람들이 남겨놓은 흔적을 따라 걸었다. 덕분에 길을 잃을 것 같지는 않다.
   얼마나 걸었을까. 
가는 길에 호수를 지나 한 한 시간쯤은 걸은 것 같다. 버스가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아니, 이곳에서는 버스대신 말이지.

   어느새 주위에 있던 울창한 나무들이 사라지고 회색 빛 성문이 보인다. 전과 같이 서 있던 병사는 나와 여러 사람들이 지나치는데도, 수레만을 검사할 뿐 사람에겐 별다른 제지를 가하지 않았다. 아마도 짐 검사만을 하는 듯 싶다. 

  성안을 들어서니 전의 조용한 분위기가 아닌, 잔뜩 활기에 찬 분위기가 느껴졌다. 밤과 낮의 차이인 걸까? 장사치들의 커다란 목소리가 여기 저기서 들리고, 긴 옷을 입은 사람들이 정신 없이 오가고, 한 구석에서는 잔뜩 때와 가난에 찌든 얼굴을 한 어린 거지들이 눈을 빛내며 지나가는 사람들을 쳐다보고 있었다. 그들을 사람들은 경멸어린 눈으로 본다. 

  여기서도 빈부의 차는 어쩔 수 없구나. 
   
  몇몇 사람들이 날 이상하다는 듯이 흘끔거리는 것을 의식하며, 사람들에게 물어 옷가게를 찾았다. 그 중 안내해주겠다는 한 아이를 따라 나서려는데, 그 아이보다 잘 차려입은 여자아이가 갑자기 나타나 욕을 하며 아이를 내쫓았다.  어안이 벙벙해서 보고 있자니, 아이는 도망가듯 골목으로 사라져 버린다. 여자아이는 아까의 험악한 표정은 간데없이 날 보며 방긋 웃었다.

   "나으리. 절 따라오세요. 옷이 필요하다고 하셨죠?"
   "왜 저 아이를 내쫓은 거지?"
   "그야 사기꾼이니까요. 저 녀석은 나으리 같은 분을 꾀어다가, 허름하고 별 볼일 없는 가게로 모신 뒤 웃기지도 않는 가격으로 물건을 팔아먹는다구요. 저 녀석의 꾀죄죄한 상판 보셨죠?"

   그런거였구나. 산타가 주고 간, 청바지 주머니에 있는 돈을 나도 모르게 매만졌다. 여자아이는 날 데리고 이리저리 길을 누비더니, 한 건물 안으로 들어갔다. 내가 따라서 들어서자 한 중년 여자가 반갑게 맞는다. 

  여자는 어떤 식으로 옷을 맞출까 하는 말 밖에 묻지 않았다. 아마 여기는 사이즈 별로 지어진 옷이라는 것 자체가 없는지도 모른다. 하긴, 과학이라는 것과 동떨어져 보이는 이런 곳에 의류 공장이 있을리도 없고, 그렇기 때문에 미리 만들어진 옷이라는 것도 없을 테
지.

   여자는 줄자로 내 몸 여기저기를 재면서 쉴새 없이 재잘거렸다.

   "재단사 생활 삼십년 만에 이런 옷은 처음이네요. 헌데 호수의 숲에 있는 저택에 배달해 드리면 된다고요?"
   "예."
   "호호. 죄송하지만 하인을 보내시면 안될까요? 거긴 저희 같은 사계급이 들락거리기엔 좀..."
   "혼자삽니다. 하인은 없어요."
   "어머! 안 되요!"

   안 된다니?
여자는 내 의문을 속시원히 풀어주었다. 성 밖에 있어서 도적이나 갖은 외적이 쳐들어오면 병사들의 도움도 받지 못하기 때문에 혼자 사는 것은 위험하다는 것이다. 게다가 내가 사는 곳은 귀족들이 많이 들락거리는 곳이기 때문에, 더 그렇다는 것이다. 
  
  다만 여자는 어쩐지 귀족들에 관해서는 더 이상 언급을 하지 않았고, 나도 딱히 캐묻고 싶은 기분은 없기에 좀 어두워진 마음으로 여자가 하인이나 노예를 사라고 충고하는 것을 묵묵히 듣기만 했다. 

   나보다 윗 계급의 사람이라. 굽신거려야 하는 건가? 아무리 빈부차가 있어도 모든 사람은 평등하다고 정해놓던 민주주의 사회에서 자란 내가, 엄격한 신분제 사회의 일원이 되어버렸으니. 당황스럽지 않다면 거짓말이다. 그들을 만나면 어떻게 해야되지? 

  일주일 후에 하인을 시켜 옷을 찾으러 오라고 하는 것을 흘려들으며 옷가게를 빠져나오자, 아까 전의 여자아이가 조르르 따라왔다. 여자아이는 당돌하게 손을 내밀었다.

   "수고비 주세요! 돈에 따라 노예시장이나 인력시장에 안내해 드릴 수도 있어요!"
   "노예시장? 인력시장?"
   "예! 노예시장은 노예를 사고 팔구요, 인력시장은 갖은 일을 하려는 사람들을 뽑는 곳이예요."

   아까전 옷가게 주인의 말이 귓가에 아른거렸다.
하지만 돈은 방금 다 써버리고, 보석밖에 남아있지 않은데. 망설이다 청바지에 넣어둔 스니커즈 한 개를 꺼내 여자아이의 손에 쥐어주었다. 이게 뭐냐고 투정을 부리던 아이는, 내가 한 개를 까서 녀석의 입에 넣어주자 곧 눈을 함지박만하게 뜬다.

   "이거! 그거죠! 왕족들이나 귀족들만 먹는 그거요!"
   "그거라니?"
   "맛있어! 선생님 말이 맞았어. 공주님, 왕자님들은 이렇게 맛있는 걸 먹는다고. 좋아요! 이건 엄청 비싼 거죠? 제가 오늘 나으리 길 안내는 책임질께요. 아니, 길안내뿐만 아니라 뭐든지 하죠! 그런데 한 개 더 없어요?"

   몇 백 원 하는 스니커즈의 가치를 너무 높게 잡는 거 아냐? 헛웃음을 짓다가 한 개 더 녀석의 손에 쥐어주었다. 아이는 함박웃음을 짓더니 따라오라며 내 앞으로 달려나갔다. 






   노예를 살 생각이 있었던 건 전혀 아니다.
사람이 같은 사람을 사고 판다는 것이 궁금했기에 잠시 구경만 하려고 했을 뿐, 인력시장인가 하는 곳에서 하인 몇 만을 고용하려고 했다. 평등사회에 살던 내가, 그것도 가난에 시달리던 내가, 내게 굴종하는 사람을 보며 마음이 편할 일은 없는 것이다. 더불어 노예제도는 말도 되지 않는 거니까. 

  흥정하는 사람들 틈에 끼어, 손과 발이 묶인 채 줄줄이 서 있는 사람들을 바라보았다. 마치 새벽시장에 신선한 생선을 경매하는 사람들처럼, 사람들은 저마다 소리 높혀 가격을 부르고 자신과 같은 사람을 사고 팔고 있었다. 줄에 손발이 묶인 채 길게 서 있는 사람들은 
마치 노끈에 묶인 생선들같다. 

   흥정은 놀랍도록 빨리 진행되었다. 
누군가 한 명을 지목하고 적당한 가격을 부르고 나면, 개미의 더듬이처럼 쭉 뻗은 수염의 노인이 서류에 뭔가를 끄적이고 손짓을 한다. 그러면 삼두근 이두근으로 무장한 우락부락한 장정 몇이, 지목 당한 사람을 새로운 주인에게 넘기는 것이다. 넘겨지는 사람들은 그게
당연한 것이라 생각하는 듯 더없이 순한 양처럼 굴었다.

   말도 안 돼. 
이보다 잔인하고 폭력적인 광경이 어디 있을까. 인간으로서의 가치를 무너뜨리며 인간을 물건 취급하는 것이야말로 진정한 폭력. 이미 저 사람들은 그 폭력에 길들여져 인간 아닌 인간이 된 거겠지. 

   난 이것을 어떻게 할 생각은 없다.
저들은 내가 아니니까. 또한 나 같이 작은 개인이, 그것도 이방인이 이 세계의 시스템을 어떻게 할 수는 없어. 

   "나으리. 안 사세요? 제가 골라볼까요?"

  반짝이는 눈으로 날 올려다보는 여자아이. 이런 아이까지 사람을 물건으로 보다니. 문득 돋는 소름에 도리질을 치며 자리를 피하려고 하는데, 개미더듬이를 닮은 수염의 노인이 어느새 내 앞에 서서 날 빤히 바라보고 있다. 내가 인상을 쓰자마자 그는 뜬금없는 말을 한다.

   "보겠소?"

   무슨 소리지? 노인은 재차 말했다.

   "좋은 물건들이 따로 있는데 보겠냔 말이오. 저런 하(下)품은 눈에 안 차는 듯해서 하는 말이요."
   "아니요, 사양하겠습니다."
   "한 번 보기나 해요. 이 쪽으로."

   생각도 없는데 왜 멋대로 날 휘두르려고 하는 것인지. 화가 났지만 안 오고 뭐하냐는 듯한 노인의 눈빛에 아이와 함께 노인의 뒤를 따랐다. 노인은 노예시장의 뒤편에 있는 건물로 날 이끌더니 곧 건물 안 계단으로 내려갔다. 

  건물의 눅눅한 공기가 정말 불쾌하다.
인상을 쓰면서 내키지 않지만 계단을 밟았다. 

  지하에는 온통 쇠창살이 박힌 감옥이 여러 개 있었다. 아니, 감옥이라기보다는 우리가 정확할 것이다. 인간을 가두고 사육하는 우리. 
  그곳을 지키던 남자 여럿이 노인을 보고 인사하는 것을 보니, 노인은 이 거대한 우리의 주인인 것 같다. 우리에는 여러 남자와 여자들이 따로 격리되어 있었는데, 그들은 사람이 오건 말건 신경을 쓰지 않는 눈치다. 노인은 수염을 쓰다듬으며 팔을 좌우로 휘둘렀다.

   "자. 이게 다 제법 괜찮은 물건들이오. 어떤 것을 원하오? 칼 제법 쓰는 놈? 아니면 잠자리 기술이 기막힌 계집? 원하는 데로 말해 보시오."
   "아니요. 저는 이만 돌아가는게..."
   "어허. 이런 중(中)품도 차지 않소? 좋아. 그럼 좀 더 걸어야겠군. 아아, 가겠다는 말은 그만해요. 보고 나서 결정해. 내가 장담하지. 내가 이래뵈도 노예상에서는 유명한 안목을 지녔으니, 이런 내가 고른 상품들이 눈에 안 찰리가 없소. 그건 분명 만족스러울 거요."

  들은 척도 하지 않고 계속 걷기만 하는 노인 때문에 분통이 터졌지만, 나가기가 애매해서 어쩔 수 없이 노인을 따라 계속 걸었다. 계단을 한 계단 더 내려가자 번듯한 문 하나가 보였다. 그 앞에는 지하 이층과 마찬가지로 우락부락한 남자 몇이 보초를 서고 있었다. 남자는 노인의 명에 문을 열었다.

  문을 열자마자 코끝에 느껴지는 짙은 꽃향기. 
그것은 방 안 곳곳에 새워진 저 붉은 꽃나무 때문일 것이다. 그 사이 풍성한 흰 양탄자위로 한 때의 미남, 미녀들이 저마다 휴식을 취하고 있었다. 그들은 아까 전까지의 노예들과는 비교도 할 수 없을 정도로 깨끗하고 아름다운 차림새로 바닥에 드러눕거나 앉아있었다. 

   "어떻소? 이게 내 최고의 상품들이지."
   "정말 예쁜 사람들이예요. 그렇죠, 나으리?"

  여자아이는 내 곁에서 호들갑을 떨었고, 노인은 빨리 선택하라는 듯 내게 눈웃음을 쳤다. 
노인의 쭉 찢어진 눈이 더할 나위 없이 혐오스럽다. 당신 눈에는 저렇게 예쁘고 잘 생긴 사람들이 그저 물건으로만 보이는 건가? 

  아름다운 사람들이라는 생각과 함께 밀려드는 혐오감에 등을 돌렸다. 
내 누나도 저렇게 아름다웠어. 내겐 하나뿐인 누나였지만 물건 취급당했지. 
그 때 나직한 목소리가 날 잡아끌었다.

   "절 데려가십시요."

  여자와 남자들 사이에 거만하게 앉아있던 소년. 마치 자수정을 으깨어 놓은 듯한 보랏빛 머리카락에, 차가워 보이는 보랏빛 눈동자가 인형같다. 소년은 당당한 걸음으로 내 앞에 다가왔다. 

   데려가라니. 자신을 사란 말인가?

   나보다 키가, 한 주먹만큼 큰 녀석을 올려다보았다.
그러자 소년은 더 없이 매혹적인 미소를 작게 흘리며 내 손을 끌어 입을 맞추었다. 







  매혹적인 블레탈의 외모와 냉정한 태도는, 귀족들뿐만이 아니라 같은 노예들 사이에서도 너무나 마력적인 것이었다. 

   그래서일 것이다. 
악명 높은 노예상 자바도 블레탈을 함부로 팔지 못했다. 거만하고 아름다운 소년은 열 여섯 살에 자바의 노예가 된 후, 어느 곳으로도 팔리길 거부했다. 그리고 이 년간, 이 곳에서 상급 노예들의 우두머리로 자리잡았다.

   블레탈은 오늘도 무료하게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있는 것이라고는 얼굴만 잘난 노예들밖에 없는 이곳에서는 할 게 그다지 많지 않다.
몸을 섞거나, 이야기를 하거나. 하지만 그것도 한 두 번이지. 또한 수다를 떠는 건 영 블레탈의 취향과는 거리가 멀었다. 

   그 때 굳게 잠겨져 있는 문 너머로 뭔가 시끄러운 말소리들이 들렸다. 
블레탈은 자신에게 들러붙어 있던 미녀, 미남들을 뿌리치고는 허리를 일으켜 문을 뚫어지게 쳐다보았다. 한 번씩, 장삿날이 아닌데도 자신들을 사려고 오는 사람이나, 자바에게 돈을 주고 노예들과 하룻밤만 즐기기 위해 오는 자들이 간혹 있었다. 

   '분명 살 찐 돼지새끼겠지. 보석을 잔뜩 옷에 붙힌.'

   블레탈과 비슷한 생각인 듯, 곁에 있던 미남 미녀들도 일그러진 얼굴로 문을 뚫어져라 쳐다보았다. 아무리 돈에 사고 팔리는 처지이지만 이왕이면 괜찮은 사람의 밤시중을 들었으면 하는 게 노예들의 심리니까.

   하지만 문이 열리고, 개미새끼(그들은 자바를 그렇게 부른다)가 누군가와 함께 들어 온 순간. 블레탈의 잔뜩 경멸어린 눈동자는 금방 그 빛이 대번에 변해버리고 말았다. 블레탈은 개미새끼와 함께 들어오는 한 소년을 뚫어져라 바라보았다.

   이상한 옷을 입은 소년은 창백하고 지친 얼굴색을 띄고 있었다.
놀랍게도 타자리하국에서나 볼 수 있는 새까만 머리카락과 눈동자를 지니고 있어, 타자리하 사람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지만 그건 아닌 것 같다. 저 아기의 것처럼 고와 보이는 맑은 상아빛 피부는 타자리하 사람의 윤기 나는 갈빛이 아니었으니까. 

  저 귀하게 자란 듯한 소년은, 생긴 것과는 다르게 잠자리를 상당히 밝히는지도 모른다. 그렇지 않다면 자신과 같은 상품의 노예를 사러 올 이유도 없는 것이다. 그리고 분명히 자신을 선택하겠지.

   저 소년이라면 괜찮다는 생각을 문득 한 블레탈이었다. 
하지만 소년의 시선은 자신을 무심히 스쳐지나갔다. 아니 블레탈 뿐만 아니라 다른 노예들도 관심 없다는 듯 바라볼 뿐. 이제는 숫제 돌아가려고 하는 것이 아닌가. 

   그래서였을 것이다. 괜히 짜증이 난 것은.

   "절 데려가십시요."

  개미새끼와 주변 노예들이 경악어린 눈으로 자신을 바라보건 말건, 블레탈은 자리에서 일어서 소년에게 다가갔다. 가까이서 내려보니 더욱더 매력적인 소년의 검은 눈동자를 바라보며, 블레탈은 소년의 손을 잡아끌었다. 

   자신과 비슷한 나이의 소년이라기엔, 굉장히 가냘픈 손이다.
블레탈은 소년의 손에 키스를 하고는 다시 소년을 바라보았다. 귀하게 자란 듯한 이 소년은 잠자리 노예같은 것은 애초에 생각에도 없던 것인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더욱 좋은 게 아닌가. 자신이 소년에게 밤의 쾌락을 가르쳐 주면, 소년은 자신에게 푹 빠져 헤어나지 못하게 될 것이다. 노예의 부와 권력은 주인의 총애에 따라 결정되는 법. 

   자바의 말투를 보아하니 귀족은 못 되는 중인인 것 같지만, 자바는 귀족이나 왕족이 아닌 바에야 그리 굽신거리는 바가 없는 걸 보면, 이 소년이 중인이래도 상당한 재산을 가지고 있다는 뜻 아닐까. 재산 없고 권세 없는 허우대만 좋은 대부분의 귀족보다야 상당한 재산을 가진 중인이 훨씬 낫지 않은가. 

  소년의 눈동자가 일순간 흔들린다 싶었다. 
자신의 뜻대로 될 것이다. 블레탈이 확신하는 순간 소년이 입을 열었다.

   "이 소년을 사겠습니다."






   살짝 양도 서류를 보고 알아낸 새로운 주인의 이름은 캐롤 라인이었다.
자신은 그렇다 치더라도 자신의 덤으로 따라온 하급노예들의 옷을 테론-고급 옷을 전문으로 파는 엘위론에서 유명한 의상실-에서 맞출 정도로 부자인 새주인은, 이상하게도 데려온 하인이 한 명도 없었다. 또한 갓 마시장에서 산 말을 도통 타고 갈 생각을 하지 않는 게 아닌가. 

  본래 노예라는 게, 주인에게 함부로 말을 걸만한 위치가 아닌 관계로 블레탈은 주인을 따라 묵묵히 걸었다. 하지만 유난히 창백한 새 주인의 얼굴을 보고, 블레탈은 한 마디 할 수밖에 없었다.

   "말에 타시지요."
   "탈 줄 몰라."

   이게 왠 소리인가. 중인 이상의 사람들은 대부분 말을 탈 줄 아는데.
특히 실무직에 많이 종사하는 중인들은 말을 타고 이리저리 돌아다닐 때가 많은 걸 아는 블레탈로써는 황당하기가 그지없었다. 중인들은 머리가 좋아 여기저기서 찾는 이가 많은 것이다.

   블레탈은 하는 수 없이, 하급 노예가 쥐고있던 말고삐를 빼앗은 뒤 훌쩍 말 위로 올랐다. 그리고는 라인의 손을 붙잡아 위로 끌어올렸다. 새주인은 당황하는 듯 싶더니, 이내 곧 자신의 허리를 감아온다.

   다른 노예들을 거들떠보지도 않은 채 자신의 등을 감은 새주인의 팔만을 의식하며 말을 몰았다. 자신도 그렇지만 특히 저런 하급노예같은 경우, 하는 게 힘을 쓰는 무식한 짓거리 뿐이니 체력이 딸릴 이유가 없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그들이 지칠거라는 생각도 들지 않았다. 

   그렇게 도착한 주인의 저택은 놀랍게도, 귀족들의 놀이터나 마찬가지인 호수의 숲 깊숙한 곳에 위치하고 있었다. 게다가 집을 이루는 건 귀한 흰 돌. 

   블레탈은 주인을 따라 집에 들어섰다. 이상하게도 집은 사람의 온기하나 없이 조용하기만 했다. 하인은? 노예는? 그리고 주인의 가족은? 보통 새로운 주인을 맞으면, 그 집의 집사가 나서서 이것저것을 가르쳐 주고 지시하기 마련인데.

   "일층의 빈방과 욕실을 쓰도록 해. 난 위층의 방과 욕실을 쓰니까."

  그 말만 하고서 위층으로 가 버린 새 주인.
마침내 어떤 상황인지 블레탈은 깨달았다. 새 주인은 이런 곳에서 하인하나 없이 혼자서 지내고 있었던 것이다. 






   내가 어쩌자고 그런짓을. 
내가 물건처럼 사버린 사람들을 일층에 내버려두고, 돌아보지도 않은 채 이층으로 올라온 것은 지독할 정도의 부끄러움 때문이었다. 

   평생을 팔려 산다는 것과, 하룻밤을 팔며 산다는 것을 제외한다면, 팔리는 것은 누나와 같은 사람들인데. 특히 그 애. 보랏빛의 머리카락과 눈이 굉장히 아름다웠던 녀석. 그 소년은 내 또래가 틀림없었는데.

   혹시 나도, 또래의 친구들이 굽신거리는 것을 즐기던 녀석들을 부러워했던 게 아닐까. 그렇지 않다면 내가 그 녀석을 산 이유가 없다. 아무리 충동적이었다지만. 그런 놈들처럼 다른 사람들이 내게 굽신거리는 것을 보며 즐거워하고 싶어했던 것일까. 

  한참을 뛰는 가슴을 붙잡고 침대에 앉아있는데, 문 두드리는 소리가 들렸다. 분명 내가 돈으로 산 사람들 중 하나임에 틀림없다. 당황해서 아무 말도 못하고 문만 바라보고 있는데, 문이 열리더니 그 녀석이 들어왔다. 굉장히 잘 생긴, 보랏빛의 소년.

   "죄송합니다. 아무런 말씀이 없으셔서 허락없이 들어오고 말았습니다."

   또래의 내 앞에서 바닥에 무릎을 꿇는다. 이런 걸 보고 싶었던 거야, 이라인? 

   "일어서."

  참다못해 말하니 한 마디 불평도 없이 자리에서 일어선다.
어쩌면 저렇게 할 수 있을까. 또래인 내 앞에서 무릎꿇는다는 게 화날텐데도. 

   "기분나쁘지 않아?"
   "무엇이 말입니까?"

   한참만에 말을 꺼낼 수 있었다. 

   "너와 나는 나이가 비슷한 것 같은데."
   "아닙니다. 노예중에는 나이가 많은 분을 섬기기를 원하는 이들도 있사오나, 저는..."

   녀석은 잠시 입을 다물었다가, 날 똑바로 올려다보았다.

   "주인님을 흠모하게 되어, 이리 섬기기를 자청한 것입니다."

  이해를 못 한다. 어쩌면 노예제가 당연한 이 세계의 사람들에게, 그들이 당연히 누려야 할 자유와 평등. 그리고 그것을 빼앗겼을 때의 분노를 이해하라고 하기엔 무리일지도 모르지. 그렇다면 그들이 날 미워해야 할 이유도 내가 미움받아야 할 이유도 없는 것.

  허탈함에 한동안 멍해졌던 것 같다.

  "...이름이 뭐지?"
  "블레탈입니다."
  "난 라인. 주인님이라고 하지말고 라인님으로 불러."

   그래. 그냥 받아들이기로 하자.
생활관과 가치관, 그리고 모든 제도가 한국과는 전혀 다른 이곳에서, 나 혼자 내가 가지고 있는 사고방식을 고수한다면 나만 괴로워질 뿐이니까. 어차피 낮에 노예시장의 모습을 외면하려고 했던 나니까. 할 수 있어. 난 이기적이니까. 







   내가 산 사람들을 받아들이기로 작정했지만, 그건 생각처럼 쉬운 일은 아니었다. 블레탈을 제외한 세 사람. 노인인 샘과 두 소년 피에, 흄은 욕실을 사용하는 것도, 화장실을 사용하는 것도 잘 하지 못했다. 내가 뭐라고 하기 전까지 변은 집 밖의 뜰에서 보고, 씻는 것은 비누도 없이 그저 물을 퍼서 한 번 뒤집어 쓸 뿐, 그것으로 끝이었다.

  게다가 내가 눈 앞에 보이기만 하면 허리를 굽히고, 차마 내 눈도 마주치지 못했다. 내가 뭐라 물으면 당황해서 더듬대며 말하고, 내 인상이 조금만 안 좋아진다 싶으면, 바닥에 절을 하면서 용서해달라고 빌었다. 그것 때문에 한동안 신경이 곤두서기도 했다.

  식사 또한 그렇다. 내가 기껏 차려놓고 먹으러 오라고 하면, 식당으로 들어올 생각을 않는 것이다. 그들의 말로는 주인님과 같이 식사를 하는 것은 있을 수 없단다. 결국 세 사람은 거실에서 알아서 먹도록 하는 수밖에 없었다. 블레탈은 나와 같이 잘만 먹는데 말이지. 그래, 블레탈은 틀리다.

   잠시 포크를 놓고 물끄러미 바라보니, 곧 보랏빛 눈을 마주쳐온다.

   "...하실 말씀이라도?"

   고개를 젓고 다시 먹는데 집중했다.
능동적이고, 뭔가 살아있다는 느낌. 그것이 블레탈과 다른 세 사람을 확실히 구분 짓는다. 다른 사람들은 내게 먼저 말을 건네거나, 질문하는 일이 없으니까. 사람들이 시키는 데로만 하던 그들이기에, 자유의사라는 게 거의 마비되어 있을 법도 하지만, 그렇다면 왜 블레탈은 이렇게 틀린걸까. 

   식사를 마친 뒤, 종이와 연필을 들고 집 밖으로 나갔다. 
예전에 본 이곳 사람들의 말이 있었지만, 날씨가 추운 탓인지 그 귀족인가 하는 것은 이 근처에서 전혀 볼 수 없으니, 거리낄 건 없겠지.

   내가 본 책에 의하면, 이곳 엘위론은 상당히 북쪽에 있는 추운 나라라서, 여름이 아니면 산 정상에 있는 눈이 녹지 않는다고 한다. 그 정도로 추우니 지금 막, 겨울의 초입에 들어선 이 때에는 사람들이 바깥활동을 자제하는 것이다.  

   한참을 걸어 호수 앞에 앉았다. 
하얗게 표면이 얼어붙은 호수와 눈밭은, 주위를 둘러싼 굵고 높은 침엽수들과 한데 어우러져, 너무나 아름답다. 그 덕에 잠시 또 멍하니 있었다가, 서둘러 화판을 무릎에 올리고 며칠 전부터 시작한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다.

   엉덩이에 깔린 눈으로부터, 차가운 한기가 스며들었지만 오들오들 떨면서 연필을 계속 놀렸다. 내 연필 움직임에 따라 신비로운 호수와 눈밭이 화폭에 담길 때마다, 가슴이 아려와서 한숨이 나온다. 그 때 내 어깨에 부드러운 망토가 내려앉았다.

   "추우실까 하여..."

   고개를 돌리니 블레탈은 이미 저 쪽으로 걸어가고 있었다. 
언제 따라왔던 걸까. 이런 친절은 누나외의 사람에게는 받은 적이 없었는데. 고마움보다는 당황스러움에 한동안 망토자락을 들여보고 있다가, 자락을 쥐어 모았다.  

   그렇게 그림을 계속 그리다가, 잠시 언 손을 들어 입김을 불었다.
그리고 내가 공을 들여 그려놓은 그림을 보다가, 그것을 가지고 자리에서 일어섰다. 벌써 하늘에 붉은 빛이 감도는 것이, 또 밤이 오나보다. 뭐, 겨울이니까 밤이 짧은 것은 당연한 일일테지.

   망토를 몸에 덮어썼는데도, 이 지독할 정도의 추위는 어쩔 수 없는 것 같다. 어쩐지 일어나니 더 추운 느낌에, 손에 입김을 쬐며 서둘러 집을 향해 걸어갔다. 빨리 가지 않으면 사방이 껌껌해져버려 앞을 볼 수 없을 것이다. 전등하나 없는 이 우거진 숲의 밤은, 내가 살던 대도시의 밤과는 차원이 다른 흑야(黑夜)니까.  

   조금씩 들려오는 야생동물의 울음소리를 의식하며 숲길을 걸어갔다. 보통 때 보다 내가 늦게까지 그림을 그렸던 것일까. 내가 집 가까이 다다르기도 전에 해가 저버려, 그만 사방이 어두컴컴해 지고 말았다. 보이는 것이라고는, 나무로 보이는 회색빛의 잔영들. 

  어떻게 해야 하지? 이대로 갔다가는 나무에 부딪히거나, 다칠지도.
아니 그걸 떠나서, 길을 찾을수가 없잖아. 

  당황스러운 마음에 손을 뻗어 나무를 더듬으며 앞을 가려는데, 조금 멀리서 불이 갑자기 확 피어올랐다. 놀라서 잠시 멈칫했는데, 횃불에 잠시, 보랏빛 머리카락이 아른거렸다.

   "블레탈?"

  그가 걸어서 내 앞에 서자, 하얀 얼굴이 타닥타닥 타오르는 횃불에 드러났다. 섬세한 얼굴과 길고 우아하게 뻗은 속눈썹. 그 안에 자리잡은 차가운 보랏빛의 눈동자. 아름답다라는 건 이런 녀석을 두고 하는 말이겠지. 남자에게 쓰기엔 뭐한 단어지만.

   "...기다렸습니다."
   
   그러고는 아무 말 없이 앞장서는 블레탈.
기다렸다는 것은, 날 마중나왔다는 소리일까. 

   헌데 왠지 얼굴이 창백해 보인다. 혹시 추운 건가? 그러고 보니 겉에 아무것도 두르지 않았잖아. 그렇군. 
  내가 두르고 있는 망토를 내려다보았다. 생각 없이 둘러서 느끼지 못했는데, 내 것이 아닌 블레탈의 것인 것 같다. 하긴, 노예인 블레탈이 함부로 주인인 내 방에 들어갈 수 있을 리가 없지. 

   이렇게 추운 날씨에도, 주인을 위해 하나뿐인 망토를 내어 줄 정도로 신분의 격차란 큰 것이란 말일까. 왠지 안타깝다는 생각이 들면서도, 고맙다. 여기서는 당연하게 노예가 해야 하는 일인지도 모르지만. 

  그렇게 블레탈과 난 한 걸음 서로, 거리를 둔 채로 집으로 향했다.
집 가까이 가니, 집 문 앞에 횃불을 든 세 인영이 어른거린다. 좀 더 가까이 가니, 두 소년과 한 노인이 날 보고 반색을 하며, 허리를 굽힌다. 그들은 내게 허리만 굽힐 뿐이었지만, 알 수 있다. 날 걱정했던 거다.

   "고맙다."
   "당치도 않습니다요, 주인님!"

   역시나. 내 말에 늙은 노예 샘이 화들짝 놀라며, 손을 저었다. 





   어제처럼 화판과 종이를 들고, 집 밖으로 나왔다.
문을 열자마자 확 밀려드는 찬 기운에, 잠시 몸을 부르르 떨다가 기분 좋게 맑은 공기를 음미하려고 노력했다. 하지만 너무 추워서 곧 포기해 버리고, 몸을 웅크리고 말았다. 

   호수로 가서 여느때와 같은 장소에 자리를 잡고,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다. 이제 조금만 하면 이 좋은 경치가, 화폭에 다 자리잡기 때문에 평소보다 좋은 마음으로 시작해서 정신없이 집중했다. 추워서, 손가락이 얼어 중간에 호호 불어야 했지만, 회색빛의 선 하나 하나가 이루어져 나무와, 하늘과 눈 덮힌 호수가 되는 그 기쁨은 추위를 잊게 만든다. 

  기분이 좋기도 하거니와 어차피 어제 배경은 대략 다 마무리지었기에, 너무나 빨리 자리에서 일어나게 되었다. 등을 돌려 집으로 돌아가려는데, 나무 뒤에 한 소년이 앉아있는 게 보였다.

   "블레탈?"

   내가 부르자마자, 블레탈은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서서 더할 나위 없이 당당한 자태로 내게 다가왔다. 걸음에 따라 흔들리는 굽슬친 보랏빛 머리카락이 더없이 화려하다.

   "거기서 뭐했던 거지?"
   "혹시라도 산짐승이나 도적이 나타나지 않을까 하여 살피고 있었습니다."

   산짐승, 도적이라니. 그렇다면 날 지키고 있었다는 건가?

   "어제도?"
   "예."

  얼굴이 창백해 보여. 내가 두르던 외투를 벗어주려고 하자, 블레탈이 내 손을 잡았다. 왠지 약간 화난 것 같다면 착각일까.

   "제 걱정은 하지 마십시요."

  그러면서 내가 들고 있던 것들을 한 손에 들은 뒤, 남은 한 손으로 내 손을 잡고 집으로 향하는 게 아닌가. 왠지 어색한 마음에 잡힌 손을 빼지도 못했다. 그 때 블레탈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라인님은 화가이십니까?"

   한 때 그런 꿈을 꾼 적은 있지만.

   "그렇게 보여?"

   씁쓸하게 웃으며 말하니, 고개를 끄덕인다.
내 기분을 좋게 하려고 한 거짓말이든 진심이든 간에, 처음으로 나에대해 물었다는 게 기쁘다. 블레탈이 아무리 세 사람에 비해 다르다고 해도, 주인과 노예로서의 거리를 지키고 있는 것에 대해서는 변하는 게 없어서, 사실 쓸쓸했으니까. 그러고 보니 나도 블레탈에 대해 아는 게 없잖아.

   "너는 뭔가 잘 하는 게 없어?"

   잠시 주저하다가 물으니, 블레탈이 조용히 답했다.

   "...검과 글을 조금 압니다."

   검이라니.
아무리 이 세계에 대한 지식이 없는 나지만 음지에서 일하는 누나를 둔 나이기에, 블레탈이 무슨 용도로 노예시장에 있었던 것인지는 짐작하고 있다. 외모가 빼어난 사람들을 최고로 값을 매겨서 한데 모아 두었다는 것은, 생각할 수 있는 이유가 한 가지 밖에 없는 것 아닌가. 바로 하룻밤의 쾌락을 위해서 말이다. 

   그런 블레탈이 검을 안다니?

   "저는 원래 이년 전까지만 해도 무투회를 위한, 카바예란이었습니다."

   카바예란?
블레탈은 그 말만 하고 입을 다물었다. 왠지 더 이상 말하고 싶어하지 않는 것 같다. 그 바람에 다시 분위기는 냉랭해져 버리고, 우린 아무 말 없이 집으로 향하기만 했다. 그 때 차가운 뭔가가 얼굴위로 떨어졌다. 

  하얀 눈이 내리고 있었다.





   갑자기 날 데리고 뛰기 시작하는 블레탈 때문에, 난 멋도 모른 채 따라 뛸 수밖에 없었다. 폐로 차가운 공기가 들어와서 힘들기 짝이 없었지만, 블레탈은 지치지도 않는 듯 하다. 더 이상은 무리야. 블레탈의 손을 뿌리치고 바닥에 주저앉아 숨을 몰아쉬었다.
그러자 블레탈이 내 앞에 자신의 등을 보여주는 게 아닌가.

   "어서 업히십시요."
   "헉헉...헉... 왜, 왜 이렇게...헉헉... 뛰어가야..."
   "어서요!"

  힘들어 죽겠는데, 이유도 알려주지 않고 소리를 치다니.
화가 나지만, 일단 블레탈의 말대로 블레탈에게 업혔다. 그러자 블레탈은 지치지도 않는 듯이 날 업고 집을 향해 뛰어갔다. 집 안으로 뛰어 들어가자마자, 반색을 하는 샘과 피에, 흄이 보였다. 

   "다행입니다, 주인님! 다행입니다!"
   "대체..."

   다들 왜 이러는 거야?
블레탈의 등에서 내리자마자, 블레탈은 지친 듯한 모습으로 한쪽 벽에 기대어 서고, 피에와 흄은 문을 꼭꼭 잠근 뒤 한숨을 내쉬었다. 난 의아함에 그들을 보다가 그들이 평소와 다름없이 제 할 일을 하는 것을 보고는, 그냥 주방으로 가기로 했다. 어쨌든 저녁식사를 준비해야 하니까 말이다.

   저녁식사가 끝난 지 한 참 후, 늦은 밤 무렵이 되어서야 난 왜 그들이 낮에 그런 반응을 보였는지 이해할 수 있었다. 굳게 잠겨진 나무로 된 창문이 쉴새 없이 덜컹거려서, 의아함에 열자마자 엄청난 눈보라가 내 방안으로 들이닥치는 게 아닌가. 그 바람에 커튼이 쉴 새 없이 날리고, 방안에 있던 책이 바닥에 떨어졌다. 겨우 겨우 안간힘을 다해 창문을 닫고 나니, 그제야 내 방안이 조용해졌다. 뭐, 이미 엉망이 된 건 어쩔 수 없지만. 

   한숨을 내쉬며, 이미 사정없이 눈이 떨어져서 축축해진 바닥을 보았다. 그 뿐만이 아니다. 탁자에 있던 책은 저 쪽으로 가고, 팬은 어디로 갔는지 보이지도 않고, 곱게 침대위에 자리잡은 이불은 사정없이 밀려나 있고. 가장 싫은 건, 따뜻했던 방안이 순
식간에 추워졌다는 것이다. 

   이불을 침대위로 끌어올리고, 떨어져 있던 책을 탁자위에 올린 후 의자에 앉았다. 다시 책을 읽으려고 하니, 자꾸 덜컹거리는 창문소리 때문에 집중할 수가 없었다. 별 수 없이 한 켠에 세워 두웠던, 화판과 종이를 가지고 방에서 나와 일층으로 내려갔다. 

   거실에 다다르니, 활활 타오르는 벽난로에서 타닥타닥 타오르는 소리가 들린다. 장작의 불꽃에 밝게 어른거리는 빛을 보니, 역시 생각했던데로 그림을 그리기엔 적당한 장소인 것 같군. 

   앞에 쭈그려 앉아 겉에 모포를 두르니, 내 방보다 훨씬 따뜻하기까지 하다.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으며 그림을 펼치는데, 누군가의 인기척이 느껴졌다. 고개를 드니, 블레탈이다. 

  나처럼 놀랐는지, 잘 생겼다는 말로도 부족한 아름다운 얼굴이 보기 좋게 굳어져있었다.

   "안 자?"  
   "불을 지키러 왔습니다."

  그러고는 난로 앞에서 불쏘시개로 이리저리 장작을 움직이는 게 아닌가. 그런 블레탈을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연필을 잡고 빈 공간에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다.
   블레탈은 불쏘시개를 내려놓더니, 불을 지킨다는 것 때문인지 내 뒤 멀찍이 앉았다. 신경이 쓰여 등을 돌려보니 마치 모델 같은 모습으로 바닥에 앉아있다. 추울 텐데. 

   "내 옆에 앉아."

  말을 하니, 그제야 블레탈이 긴 다리를 움직여 내 옆에 앉았다.
다시 그림을 한창 그리기 시작하는데, 사람의 골격이 하나씩 잡히기 시작할 쯤, 블레탈의 나직한 미성이 들려왔다.

   "누구를 그리시는 겁니까?"
   "사랑하는 사람."

   내가 사랑하는 나의 누나. 이제는 평생 볼 수 없는, 하나뿐인 나의 가족. 정신없이 기억 속에 남은 누나의 그림자를 쫓으며, 스케치를 했다. 가느다란 체구, 약간 안짱끼가 있는 다리, 갈색의 웨이브진 머리카락, 잘 입는 종아리까지 오는 원피스까지.

   "너는 좋아하는 사람 없어?"

   그림을 그리며 물으니 대답이 없었다. 흘낏 바라보니, 왠지 아까 전보다 표정이 더 차가워진 것 같다. 무슨 생각을 하는 걸까. 

   애써 블레탈에게로 쏠리는 신경을 가다듬으며 그림을 그리는 데에만 몰두했다.
그렇게 아주 오랜 시간이 흐른 것 같다. 다정한 검은 눈동자를 마지막으로 그림이 완성되자 눈물이 날 것만 같다. 
   내가 그림에 재주가 있어서 다행이야. 
욕하고 저주했던 재주인데. 이 재주 때문에 누나의 모습을 잊을리는 이제 없는 거니까. 








   어젯밤 몰아치기 시작하는 눈보라는 잠잠해질 생각을 않는다. 이렇게 된 이상은 책으로 하루를 때우는 수 밖에 없지만, 쉴 새 없이 덜컹거리는 문 때문에 결국 포기해 버리고 말았다. 별 수 없이 일층으로 내려가자, 피에와 흄이 벽난로 앞에서 뭔가를 하는 게 보였다. 

  잔뜩 무언가에 몰입하고 있는 모습에, 굳이 방해하고 싶지 않아 조용히 다가가니, 그 때 마침 동글동글한 나무로 된 구슬이, 내 발치에 굴러왔다. 그것을 허리 숙여 주으니, 피에와 흄이 잔뜩 겁먹은 표정으로 고개를 숙인다. 이런, 결국 방해하고 만 건가?

   "무슨 게임이야?"

   둘은 입만 우물거릴 뿐 말하지 못했다. 내 눈치를 보는 건가. 

   "화내지 않으니까 걱정하지 말고 말해."
   "정말이죠 주인님?"

   내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환히 웃는 흄의 등을 치는 피에.

   "죄송합니다, 주인님! 일은 안 하고 놀기만 한 저희를 벌해 주십시요!"
   "아니야."

  예전과 다를 바 없는 반응이긴 하지만, 흄이 처음으로 내 앞에서 긴장을 풀었다는 게 이렇게 기분이 좋을 수가 없다. 피에는 여전히 얼굴색이 안 좋았지만 흄은 내 시선에, 좋아라 바닥에 굽혀 앉아 구슬을 이리저리 튕기며 신나게 떠들어댔다. 내가 덩달아 중간에 이것저것을 묻자 그제야 피에도 조금 긴장이 풀린 모양이다. 
   나중에는 나도 끼어 구슬치기 게임을 하기 시작했다.
어차피 심심했던 참이기도 하고, 이 기회에 피에와 흄과 친해져 보자는 생각에 한 구슬치기 게임은, 내가 어릴 때 하던 룰과 별반 다르지 않았다. 단지 구슬이 예쁜 유리로 된 것이 아니라, 나무로 깎은 겉에 무언가를 칠한 것이란 게 틀릴 뿐이지. 

   "주인님, 정말 잘 하시네요?"

   흄의 감탄에 조용히 웃었다. 
전기세가 아까워 텔레비젼도 마음껏 보지 못했던 나로써는, 구슬치기나 딱지치기, 피구나 축구, 술래잡이 같은 것 밖에 놀게 없었다.

   "아주 어릴 때만 하고 그만뒀는데, 용케 그 때 실력이 남은 모양이네."
   "중인분들도 이런 걸 하십시까?"

   피에가 궁금하다는 듯이 끼어들었다. 나야 잘 모르니 이렇게 말할 수 밖에.

   "잘 모르겠지만, 난 어릴적에 구슬을 가지고 놀았어. 다만 이런 나무로 된 구슬이 아니라, 유리로 된 구슬이었지."
   "귀한 유리로 된 구슬이란 말입니까?"
   "굉장히 멋질 것 같네요!"

  대체 뭘 어떻게 상상하는 것인지. 유리구슬이라고 해 봤자 몇백원 하던 거였는데. 하긴 여기선 유리가 귀할 수도 있겠다.

  그런 이야기를 끝으로 우리의 게임은 계속되어, 흄의 승리로 끝이 났다. 또 한 판 할까 고민하고 있는데, 샘이 등장하면서 별 수 없이 포기해야 했다.

  "요 녀석들! 놀려면 방에서 놀 것이지, 게다가 주인님과 이런 걸 하다니!"
   "샘. 난 재미있었으니까 괜찮아. 내가 하자고 한 거니까."

  내가 이렇게 말을 하는데도 샘은 피에와 흄의 머리를 억지로 숙이게 하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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