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았던 눈을 힘없이 떠보니 눈앞에 보이는 건 온통 하얀색뿐이다. 손을 대보면 만져질 것만 같은, 백색의 벽. 순간, 머릿속에 의문이 떠오른다. 여기가 어디일까. 그 생각을 하자마자 뭔가 무서운 느낌이 등골을 훑고 지나간다. - 기억해서는 안돼. 마치 명령처럼, 그리고 나 역시 그래야만 하는 것처럼 강압적인 소리가 머리 속을 빙빙 돌아다닌다. 그래, 이것은 기억해서는 안 되는 사실이다. 그러나 본능의 외침과는 달리 계속 무언가가 떠오르려고 한다. - 하얀 종이. 그 위에 적힌 건..... 숫자? 안돼. 기억해내서는 안 된다. 뭔가 무서운 사실이 기다릴 것만 같다. 나를 상처 입힐 수 있는 사실. 나를 절망시킬 수 있는 사실. - 숫자 위에, 붉은 색 원이 그려져 있다. 분노를 담아 그은 것 같은, 격렬하고도 거친 붉은 선이 겹겹이 쳐져 있다. 눈앞의 하얀 전경과 그 붉은색의 선이 대조되어 하나의 형상을 만들어간다. 기억해서는 안돼. 기억해서는...... ".......형, 오늘 개학인데 학교 안가? 벽에 머리 박고 뭐해? " 거실의 하얀 벽에 머리를 박고 한참 동안이나 정신병자처럼 중얼거리고 있는 형의 모습이 안타깝게 다가왔는지, 현수가 조용히 말을 걸었다. .......씨파아아아악!!! 기억해내고 말았다! 기억하기 싫었는데! ------오늘이 개학이라는 사실을! 내 고뇌의 매체가 되기도 했던 탁자달력이 내 발 밑에서 구르고 있었다. 오늘 날짜엔 빨간 사인펜으로, 그리고 일명 분노의 필법으로 마구 갈겨놓은 동그라미가 나를 비웃듯이 삐뚤삐뚤하게 그려져 있었다. 오늘이 개학이라니! 어제 저녁, 그 사실을 차마 인정할 수 없어 "하하~ 하룻밤 자고 나면 분명 꿈일거야....." ....라는 문법도 단어도 맞지 않는 대사를 중얼거리고 나서 기절하듯이 잤는데, 절대로 깨고 싶지 않은 나를 당연히 이해 못하신 아버지의 발길질이 내 얼굴을 뭉개고 나서야 겨우 잠에서 깰 수 있었다. (아버지의 증언(?)에 따르면, 내가 이불에 딱풀로 붙여놓은 것 같이 붙어있었다고 한다) 게다가 이번 개학이 어디 보통 개학이신가. 선배님 가라사대, 사나이의 인생에 있어 세 번의 빡세고 빡도는 절차가 있는데 그 한번은 군대요, 다른 한번은 연애요, 나머지 하나는 남고에서의 3학년이라고 하지 않았던가! 공부를 안 해도 정신적인 피로가 몰려온다는 말도 안 되는 변명이 실현될 수 밖에 없다는 고3! 일명 지옥으로의 초대! 가뜩이나 싱숭생숭한데, 일주일전에는 사악남궁이라는 별명을 가진 어떤 징한 놈이 전화를 걸어 나를 놀려댔다. - 으하하하~ 강현승~! 너 문과 간다면서~? 네 싸늘한 감성에 무슨 얼어죽을 문과야~? 그냥 이과로 오지~? ....이래서 사람들이 살인충동을 느끼는구나! 바락바락 악에 받친 대꾸를 하고 전화를 끊으니 다음엔 시끄럽다는 일갈과 함께 아버지의 갈색 슬리퍼가 뒤통수에 작렬했다. 아아아, 회상하니 참 억울하고도 서글펐던 하루였구나. " 좋은 아치이임....." 바로 내일이 개학인 현일이가 나와 똑같은 죽상을 하고 거실에 나타났다. 눈 밑이 시꺼먼걸 보니 밤잠을 설쳤나보다. 그럴 만도 하지. 저 놈도 이제 중3이니까..... 그것도 나 때문에 아무도 시키지도 않고 바라지도 않는 상위성적(그것도 만점이라는 무시무시한 점수를!)을 향해 달려가게 생겼으니..... 내가 아무리 공부하지 말라고 멱살을 잡고 두들겨 패도 녀석은 끝까지 손에 잡은 문제집을 사수하며 '안돼! 마지막 8번 문제만 풀면 된단 말야~!'...라는 전혀 어울리지도 않고 괴이하기까지 한 범생의 대사를 지껄이며 발악을 해대서 나와 현수가 뜨거운 비애의 눈물을 흘리게 만들었다. 그리고 그 모습을 지켜보시던 아버지는 - 꼴값들을 하는구만...... 이라는 대사를 하심으로서 우리 세 명의 아름다운 형제애를 단숨에 꼴값으로 추락하게 만드셨다. " 형, 늦겠다. 어서 밥 먹어. " " 그으래...." " ......교복 다려줄까? " " 그으래...." " ......" " 밥맛 좍 떨어지게 무슨 븅딱짓거리냐?! 빨리 시원하게 처먹지못해! " " 시원하게 처먹으라니 그건 또 뭡니까! 고3이 시작되는 첫날인데 좀 이해해주면 안돼요?! " " 우라질 놈! 너 혼자 고3이냐? 너랑 같은 고3인 네 친구놈들은 네놈과는 달리 아마 지금쯤 신나게 숟가락질하고 있을거다! " 사실이다. " 에이씨~! 남들은 아들이 고3이면 첫날부터 일부러 발소리도 안내고 걸어다닌다는데 아버진 뭡니까!" " 얼씨구~! 딴 집은 아들이 고3이면 첫날부터 문제집에 얼굴박는다던데 네놈은 대체 뭐냐?! " " ......" 이기지도 못할 말싸움은 왜 시작해서는.....아버지에게 뻔한 한판을 당하고 묵묵히 숟가락질을 하고 있으니 이번엔 현일이가 아버지를 향해 불만스럽게 말했다. " 수험생이 집안에 둘이나 있으면 뭔가가 달라져야 할 거 아녜요! 우리도 용돈 올려줘요! " " 크하하하~ 이놈이 아침부터 나를 웃기네? 기각! " " 공부 열심히 하면 될 거 아녜요! " " 그 공부가 너희를 위한거지 날 위한거냐? 기각! " " 청소년은 돈 쓸 데가 많단 말입니다! " " 공부만 한다면서 돈 쓸 데가 어디 있다는거야? 기각! " " ......." 내일이 개학이라 시간도 널널하고 고2로 올라가는거라 집안 누구도 태클을 안 걸어 공부에 대해 별로 신경을 안 써도 되는 이 무식한 집의 차남이자 그나마 제일 인간다운 내 동생 현수는 그저 묵묵히 계란프라이를 뒤집고 있을 뿐이었다. 전쟁 같은 아침식사를 끝내고 아버지는 어느 때와 같이 늦지도 않았는데 '늦었다'라는 말을 연발하시며 출근하셨고, 나도 가방을 메고 등교를 했다. "날씨 우라지게 좋구마......." 밖으로 나가니 상쾌하고 시원한 아침공기가 더욱 나를 슬프게 했다. 씨바....다른 학교는 개학이 내일이나 내일모레던데 왜 우리학교는 오늘이야! (많은 중고등학생들은 자신의 학교만 개학을 빨리 한다고 생각한다) 우울하게 터덜터덜 걸으면서 율무거리 중앙 횡단보도를 걸으니 누군가가 뒤에서 큰소리로 나를 불렀다. "저기! 잠깐만요!" "응?" 뒤를 돌아보니 우리 학교 교복을 입은 두 소년이 내 쪽으로 헐레벌떡 뛰어오고 있었다. 생김새가 진짜 비슷하게 생겨먹은 걸 보니 형제가 틀림없었다. "흐와, 흐와, 살았다. 이놈의 길바닥에 도통 같은 교복이 보여야 말이지. 지존고 맞죠?" "맞는데요." "진짜 미안하지만 우리 좀 주워가요! 둘 다 길치라서, 분명히 3일전에 다녀왔는데 가는 길이 도대체가 기억이 나야 말이지?" "........." ....3일전에 갔다 왔다면서 벌써 까먹다니......가는 길이 복잡한 것도 아니건만....... 그런데, 처음 볼 때부터 눈에 거슬리는데 한 놈 등에 맨 저 길다란 막대기는 대체 뭐냐? 흰 보자기로 둘둘 감아놔서 정체는 알 수 없지만 묘하게 신경에 거슬린다. 학교에 저런 거 매고 가도 되나? "전 중간에 서점에서 책 좀 사러 가야 되거든요. 그쯤 되면 학생들이 많이 지나가니까 그냥 그 사람들 따라가면 되요." "아, 예! 감사합니다! 무조건 따라갈 수 있기만 하면 됩니다!" .....씩씩해서 좋다고 해야 할지, 하는 말마다 왜이리 박력이 있냐? 셋이 이런 저런 이야기를 하면서 걷다 보니 곧 서점이 나타났고, 두 사람은 나를 향해 두 손을 힘차게 흔들며 '다음에 또 봐요'라는 의미의 인사를 대단히 박력 있게 한 다음 학생들 사이로 사라졌다. "우왓- 사람 졸라 많네!" 입학식과 개학식이 같은 날이기 때문에 반 편성표가 붙어있는 중앙게시판 앞은 그야말로 인산인해라는 말이 딱 어울릴 정도로 인간들이 바글바글해서 발 디딜 틈조차 없었다. 잠깐, 3학년 편성표는 어디 붙어 있는거냐! 여긴 2학년 쪽이잖아, 젠장할~! 잘못 왔다! "푸웩! 저, 저기! 3학년 편성표는 어느 쪽 입니까?" "3학년이요? 아, 선배님! 잘못 오셨습니다, 오른쪽으로 더 가세요!" 이러다 깔려 죽겠다! 그야말로 '허우적' 대면서 겨우 3학년 편성표 쪽으로 다다르니 아주 익숙한 낯짝들의 동급생들이 우글우글 모여 편성표를 보고 있었다. "아, 씨바! 4반이면 담임실이랑 제일 가까운 데잖아! 좆됐다, 씨팍!" "문과가 몇 반부터 몇 반까지지? 1,2,3,4.....어, 금년엔 문과 반이 더 많잖아?" "어떤 새끼가 내 발 밟았어! 죽을래!" "그 거북이 등껍질 같은 발 좀 밟았다고 뭔 일 나냐!" 와글와글......시끌벅적....... 전쟁터가 따로 없구만. 작년 선배들은 좀 점잖았던 것 같은데 설마 선배님들도 학기초에는 이런 모습이었을까? 그나저나 난 어느 반이냐, 문과니까 1반에서 4반까지만 찾으면 되지? 열심히 게시판을 뒤져보고 있는데 누군가 내 어깨를 탁 쳤다. "야, 강현승! 오랜만이네." "응? 어! 이 새끼, 장윤영 아냐?" 이마의 창상이 보일 듯 말 듯 하게 가려져있는 모습, 내 예전의 룸메이트 장윤영이 내 뒤에 서 있었다. 오랜만에 보니 졸라 반갑다! 방학 중이라서 몇 번밖에 못 봤는데, 그때보다 키도 좀 더 큰 것 같고, 표정도 많이 밝아진 것 같다. "너 문과였냐, 이과였냐? 몇 반 걸렸어?" "너랑 성현이만 문과고 다 이과잖아. 난 7반이고 시호는 8반, 진우는 불쌍하게도 8반이다." "크하하하! 남궁이랑 같은 반이잖아! 근데 넌 그걸 또 징하게 다 찾아봤냐?" "이과 쪽 찾아보다가 어쩌다 보니 눈에 다 밟히더군. 문과는 못 봤으니까 얼렁 찾아봐." 윤영이랑 열심히 게시판을 뒤적이며 찾고 있는데 또 익숙한 목소리가 뒤쪽에서 나를 불렀다. "어이~강현승! 방학은 잘 보내셨나?" "잘 보내긴 개뿔이......너 예체능과지? 찾기 쉬워 좋겠다. 반이 2개밖에 없으니....." "좋긴 뭐가 좋아, 이제 내 화려한 몰잠(몰래 잠자기)세월은 다 갔어. 문과랑 이과는 한 반 당 50명씩인데 우리 예체능과는 한 반에 30명밖에 없으니 이거야 원....." 화려한 경력덕분에 당연히 예체능과로 들어간 현성이는 실력을 인정 받아 방학 전에 이미 축구부 차기 주장 자리를 따 놨다고 한다. 음, 저 놈이 없으면 정말 쉬는 시간이 배고파 질텐데 말야. 맨날 쉬는 시간마다 매점에 갔던 동지였으니..... "야, 임마! 안 찾아? 계속 내가 찾고 있잖아!" "아, 그거 찾아준다고 눈깔이 빠지냐?! 딴 놈들 다 찾아줬으면서 내 꺼 하나 더 찾아주면 어디가 덧나!" "그 놈들은 내 꺼 찾다가 어쩌다 보니 찾은 거지! 지성현은 2반이다, 넌 2반엔 없어." "에이, 성현이랑 한 반 되면 편한데....." 그러고보니 2반은 예전에 지언선배가 다니던 반이네. 설마 미친개가 성현이 담임이 되는 건 아니겠지? 뭐 그 인간이야 누가 담임이 되던 그 페이스가 무너지겠냐만은. 몇 번 더 뒤적여보니 3반 구석에서 드디어 내 이름이 나왔다. 작년에 같은 반이었던 애들이 몇 명이나 있나 찾아보려고 했더니 교내 스피커에서 재학생들은 배정된 반으로, 신입생들은 운동장으로 모이라는 시호의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부회장이 없으니 아마 다음 주에 새 회장을 뽑을 때까지는 학생회 임원들이 학생회장 일을 분담하겠지? 이러고도 잘 굴러가니 참 대단한 학교라니까. (게다가 왜 학생회장은 꼭 3학년이어야 하는 건지. 다른 학교는 2학년을 뽑는데.....) "야, 그럼 나 간다. 오늘 하루도 상쾌하게 보내보자!" "헛소리 하네. 졸다가 걸리지나 말아라!" "3학년 만세~!" "쪽팔려, 이 새끼야! 하지 마!" 윤영이와 현성이랑 헤어지고 내 새로운 반인 3반으로 달려가자니 왠지 모르게 가슴이 두근거린다. 새 학년 새 학기는 언제나 설렌다지만 3학년이라 그런지 특히 더 한 것 같은데. 그나저나 이진우 이 자식은 어딜 박혀있길래 보이지가 않아? 나중에 8반에 한번 가봐야겠다. 남궁과 같은 반이 된 진우의 표정이 궁금하기도 하고..... 드르륵- "지금쯤 큰형님은 새로운 반의 문을 열고 있겠군......" "그런 식의 극도로 초월한 예언자 같은 말투는 그만둬라. ......그리고 그 손에 들린 단어장 좀 치우고....." 아버지가 출근하고 큰형이 등교한 후 동생들은 다시 자기도 뭣해서 거실에 앉아 차를 마시고 있는 중이었다. 한 손에 찻잔을 들고, 다른 한 손에는 단어장을 들고 영어단어를 외우는 동생의 저런 모습은 정말 엽기적이기까지 하다고 현수는 감히 생각했다. 친형인 자신도 익숙해지기 어려운데 도진이는 어련할까. 작년, 방학이 시작될 때쯤 현일이가 血의 아지트에서 문제집을 풀었다는 사실이 血의 멤버들에게는 어마어마한 사건으로 다가왔고, 도진이는 한 밤중에 현수에게 전화를 걸어 - 작은형님! 작은형님은 뭔가 아시죠?! 저 인간이 왜 저러나요? 제가 아무리 우리 조장 속을 썩였어도 저런 식의 징벌은 너무 하잖습니까! 제가 밤마다 무서워서 잠을 못 자요! .....라면서 거의 울부짖듯이 하소연을 했고, 폭풍 속에서도 바위처럼 요동치지 않기로 유명한 치현이마저도 정말 골 때린다는 듯한 목소리로 - 혹시 집안에 무슨 일이라도 생긴 게 아닙니까? 조원들이 지금 난리입니다. 우리 조장이 무슨 쇼크를 먹어 정신이 나간 게 분명하다고...... 좀 말려주세요, 형님! 제가 하도 걱정을 해서 위장병에 걸렸습니다! .....라면서 청원을 해오니.......예전 같았으면 유일하게 말릴 사람은 현승 뿐이었는데, 이번엔 아무리 현승이 어르고 달래고 때려도 도무지 말을 안 들으니 이걸 기특하다고 해야 할지 고집스럽다고 해야 할지, 매우 난감한 현수였다. "아, 그러고 보니 너 그거 알아? 며칠 전에 우리 동네에 외국인 이사온 거." "응? 외국인? 나 한번도 못 봤는데?" "나도 밤에 쓰레기 버리러 갔다가 우연히 본 거야. 이삿짐 집에 들여놓자마자 어디론가 차타고 가던데? 그래서 아직 본 사람이 많이 없을걸." 한 밤중이었는데도 반짝거렸던 금발을 가진 외국인 가족. 얼핏 봤지만 다 상당히 젊어 보였다. 하여간 별의 별 사람이 다 오는 동네라고 현수는 생각했다. "으익?" 헉, 그럴 의도는 아니었는데 문을 열자마자 정말 깜짝 놀라 이상한 소리를 내고 말았다. 지금 내 눈에 보이는 저 사람은.......금발?! 이 검디 검은 한국학교에 웬 금발?! 다른 학생들도 나와 같이 황당한 심정인지 맨 끝자리에 앉아있는 한 외국인 남학생을 보며 수근 대고 있었다. 정말 영화에서나 나올 것 같은 금발에 허여멀건 한 피부! 진짜 외국인이다?! "어이, 뭔가 말 좀 걸어봐야 되는 거 아냐?" "뭐라고 해? 우리 영어실력이 거기서 거긴데!" 걱정된다는 듯이 몇 명의 학생이 수근거렸다. 하지만 이런 술렁거리는 목소리들이 저 녀석에게는 좀 괴롭지 않을까? 내가 과감하게 성큼성큼 그 녀석 쪽으로 걸어가자 반 애들이 뭔가의 기대를 했는지 모두 내 쪽으로 시선을 집중했다. 이런 상황전개에 놀랐는지 고개를 들고 의아한 듯이 나를 쳐다보는 푸른 색의 눈동자가 이질적으로 느껴졌다. 녀석을 향해 내 입이 용감하게 열린 순간! "에.......헬로우?" .................썰렁. 순간, 차디 찬 바람이 우리 곁을 스쳐 지나가면서 순식간에 한랭전선이 형성됐다. 나를 바라보는 동급생들의 눈에는 ? 그럼 그렇지.....라는 눈빛이 떠올랐고, 곧이어 ? 역시 너도 우리 반 될 자격이 충분하구나.... 라는 눈빛으로 체인지 되서 나를 매우 쪽팔리게 만들었다. 젠장맞을, 차라리 가만 있을걸! 죽도록 후회하는 가운데, 그 녀석의 파란 눈동자가 재미있다는 듯이 흔들리더니 녀석이 입을 열었다. "......문디 자슥아, 내 한국말 할 줄 안다마!" 쨍그랑------------!!!!!! 소리 없는 효과음이 반 전체를 흔들고, 학생들 얼굴에 경악스러운 표정이 하나 둘씩 떠올랐다. 나 역시 뒤통수를 해머로 맞은 듯 말을 못 잇고 버벅대야 했다. 정말 이 상황을 딱 두 글자로 표현하라면, 정말, 「깬다」-----!! ------------------------------------------------- Punch Drunk Love(2) -위험한 기숙사 2부- "와- 날씨 좋다아- 내일이 개학이란 게 너무 아쉬운데?" "지금까지 실컷 놀았으면서 뭘. 이제 공부도 슬슬 해주는 게 학생의 도리지." "........" 하여간 말을 못해요. 속으로 궁시렁 대면서 이지는 마당에 던져진 신문을 주우러 갔다. 방학동안 이지는 머리카락을 좀 잘랐고, 이나는 머리카락을 좀 길러서 지금은 안경과 표정만 빼면 쌍둥이답게 똑같았다. "아, 그러고 보니 이나야, 너 얼마 전에 여기 이사 온 외국인 봤어?" "외국인이라고? 참 별의 별 사람이 다 오는구나. 어딘데?" "12번인가 13번인가, 하여간 그 라인쪽이야. 그런데 되게 재밌더라." 며칠 전, 슈퍼에 가다가 만난 금발의 아저씨를 떠올리며, 이지는 자신도 모르게 킥킥 웃었다. "생긴 건 되게 멋지게 생겼더라구, 한 40대 초반으로 보이는데 이 아저씨가 나보고 뭐라고 한 줄 알아? 엄청나게 유창한 사투리로 이러는거야! -아따, 참 귀여운 아가씨로구만요! 멋 좀 하나 물읍시다? 이 근방에 혹시 슈퍼있을랑까요? 그 잘생긴, 게다가 외국인이 그런 말투를 쓰니까 너무너무 골때리더라구~!" ........조용. 정적이 흐르는 가운데 내가 힘겹게 입을 열었다. ".......한국말 할 줄 안다고?" "이 시키가 대가리가 구딘나,(굳었나) 내가 한국말 못했음 여(여기) 있겠냐!" 크억! 정말 적응 안 된다! 물론 나도 지방어에 대한 편견은 없고 수많은 지방 친구들이 있지만....... 저 반짝거리는 금발에! 여자애같이 하얀 피부에! 하늘색 같은 투명한 푸른 눈동자에! 전체적으로 봐도 남자인 내 눈으로 봐도 영화배우 뺨치는 외모를 가진, 그것도 외국인이 저런 골 때리는 사투리를 쓴다는 건 정말이지 골 때리는 일이 아닐 수 없다! "그.....그래, 당연히 한국말을 할 줄 아니까 여기까지 왔겠지...... 아니, 근데 왜 외국인인 주제에 표준말을 안 배우고 사투리를 배운건데! 게다가 도대체 어느 지방 사투리야 그거?!" "내가 어예 아노?! 울 아부지가 내 어릴 때 하도 이 지방 저 지방 돌아댕겨서 그 아새끼(어린아이) 대가리에 몽땅 다 쥐박혀서 다 섞여뿔따아이가! 나도 같은 말 할 때마다 딴 단어가 나와서 돌아뿔겠다!" "왜......왜 니놈 아버지는 그 어릴 때 서울만 안가고 딴 데만 돌아 다니신거냐! 말투가 너무 골때리잖아! 차라리 억양은 어눌하더라도 표준어를 배우지 그랬어! 네 외모에 표준어만 배웠으면 아무 여자나 다 넘어올텐데!" "치아라, 자슥아! 언어란 게 대충 알아처먹기만 하면 되는 거 아이가! 게다가 날 진짜 사랑하는 가시내라면 내가 무슨 말을 해도 다 사랑해 줄게 아이가!" 헉! 이 놈 외국인 맞아? 사상이 묘하게 동양적이다. 게다가 저 이상한 사투리를 계속 듣고있자니 익숙해지는 기분이 든다! 녀석은 나를 보며 씩 웃더니 손을 내밀었다. "내도 안다, 나 같은 외국놈이 이런 말 쓰면 이상하게 보인다는 거. 그래서 사람들이 나 참 많이 피댕겼는데(피해다녔는데) 닌 안그러네? 니 참 맘에 든다. 이름이 뭐꼬?" "현승이다, 강현승. 그러는 네놈의 이름은 뭐냐?" "우람, 이우람이다." "........." .........이름도 안 어울린다......... 하지만 차마 그 소릴 할 수도 없고, 녀석이 내민 손을 잡고 나도 씩 웃었다. 이름도 말투도 안 어울리는 놈이지만 같이 지내면 심심하진 않을 것 같은 예감이 든다. "어이! 강현승, 또 같은 반이네?" 이 목소리는.......뒤를 휙 돌아보니, 절대로 이름이 알려져서는 안되는, 옛날의 반장 녀석이 나를 보며 싱글대고 있었다. "우람아, 인사해. 내 친구인데, 이름이 밝혀지면 안되는 놈이니까 아마 이번에도 우리반의 반장이 될 거야." ".......? 뭔 소리고? 하여간 잘 부탁한데이. 내 이우람이라고 한다." "잘 부탁해, 아까 너희들이 대화하는 걸 다 들어서 덜 쇼킹하다. 그나저나 강현승, 우리 반 담임이 누군지 알아?" "응? 누군데? 너 벌써 알아냈어?" "아까 교무실 갔다가 그 인간이 일부러 직접 알려주더군." 드르륵- 반장놈의 말이 끝나자마자 앞문이 힘차게 열렸다. "자- 제군들- 3학년이 된 소감은 어떠신가-?" 저......저 인간은..... ".....원래 담임을 안 맡으려고 했는데, 3학년 담임 지원자가 하도 적어서 저 인간이 맡은거래.....동기는 아름답지...." 반장의 목소리가 들리긴 한데 뭐라고 하는지 못 알아듣겠다. 오 하나님! 난 3학년 내내 작년 선생님인 김지현을 그리워하며 살겠구나! 저 인간은 날 장난감으로 밖에 안보는.....수학선생 정인환이 아니신가~! "앞으로 잘 지내보자, 제군들!" 이 말을 딱 하고 날 딱 쳐다보는데 눈빛이 딱 이거였다. - 네놈이 있으니 내 담임생활이 심심하진 않겠다! 으으윽, 정말 고3 시절이 심심하진 않겠군. 책상을 쳐다보며 한숨을 푹푹 쉬고 있는데 정인환이 교탁 위에 하얀 박스 하나를 얹어놓았다. "일단, 번호부터 정하자. 가나다라 순서나 키 순서로 하면, 혹시나 수학문제풀이에 걸렸을 때 부모님이 주신 성이나 키에 애꿎은 불만을 터뜨릴 수도 있잖냐? 그러니까 공정하게, 자기가 뽑은 숫자에 책임을 다하도록- 그리고 어떤 일에 걸리더라도 남 탓은 안하도록, 숫자 1번부터 51번까지 적은 종이를 넣어놨으니 돌려가면서 뽑아라!" 헉, 저 인간이 말하니까 왠지 그럴 듯하다. 저 선생님의 사상이 보이는 말인데? 하얀 박스가 1분단부터 4분단까지 돌아가고 모두에게 흰 종이가 쥐여졌다. "어, 난 12번이네. 맨날 키 순서대로 해서 40번대 아니면 50번대였는데 이거 신선하네! 야, 닌 몇 번이고?" 옆자리에 앉은 우람이가 들 뜬 목소리로 말을 걸자 내 손에 들린 종이를 천천히 폈다. ".....33번....." 3학년 3반 33번....... "우와, 그럼 닌 공책이나 교과서에 「3333 강현승」이라고 써야 되는기라? 참 오지게 외우기 쉽구마! 축하한다 야!" "........놀리냐, 지금?" "자자, 거기 조용하고. 오늘은 간단히 말하고 끝내겠다." 정인환이 헛기침을 몇 번하더니 진지하게 말했다. "알다시피 고3이란 건 그 자체만으로도 빡세다는 걸 다 알 것이다. 하지만 이것도 사회에 나가기 위한 과정이니 남자구실 하고 싶으면 알아서 허우적대라! 공부를 열심히 하라는 말보다 패배자가 되지 말라는 말을 하고 싶다. 패배자란 건 노력도 안하고 포기하는 족속들을 일컫는 것이지. 우리 반에선 절대 그런 놈들을 허용하지 않을 것이고- 만약 생긴다면 난 선생으로서 사랑의 매질을 할 것이고, 제군들은 친구로서의 우정의 다구리를 선사해야 함이 마땅할 것이다. 혼자 용되려고 하는 놈들도 마찬가지다! 공동체로의 의식, 그리고 자네들은 모두 친구라는 걸 염두에 두고 선의의 경쟁만을 하길 바란다." 오오오, 역시 정인환이야. 재수없는 놈들은 척살하겠다는 우리 가족의 사상과는 좀 틀리지만 재수없는 놈을 갱생시키자는 사상은 우리 엄마랑 좀 비슷하네. 학생들이 모두 약간 감탄한 눈으로 바라보니 정인환이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했다. "......눈깔들에 다 니스칠했냐? 그만 쳐다봐라! 자, 그럼 광고하고 끝내자. 보충수업은 다음주부터고, 야간자율학습은 다다음주부터다. 보충수업 시간표는 내일 프린트로 나눠 줄 거고, 새 교과서는 내일 수업 끝나고 나눠주니까 도망가지 말고 자리에 다 붙어있도록." 종례가 끝나고 복도로 나가서 창문 밖을 보니 이미 신입생들은 입학식을 끝내고 교실로 들어갔는지 운동장이 텅 비어있었다. 서클들은 내일부터 바쁘겠구만, 서클홍보를 해야 할테니. 새로운 반 아이들과 (그리고 예전에 같은 반이었던 몇 명과) 인사를 하고 이야기를 조금 나누다보니 다른 반 애들보다 하교가 늦어져 버렸다. 설마 8반, 벌써 끝난 건 아니겠지? 가방을 어깨에 매고 급히 뛰어가고 있으니 2반 뒷문에서 성현이가 나오고 있었다. 이 녀석 역시 오랜만에 봐서 그런지 분위기가 좀 더 성숙해진 것 같다. "어, 현승아. 오랜만!" "축하한다, 강현승의 옆반이 됐음을! 이왕이면 같은 반이 됐음 더 축하했을텐데." "하하, 이것만으로 만족하지 뭐. 나중에 기숙사에 놀러 와라. 지금 진우한테 가는 거지? 빨리 가 봐, 아마 다른 반들은 이미 종례 끝났을 걸." ....하여간 눈치도 빨라요. 곧 성현이는 손을 흔들며 교무실 쪽으로 가 버렸다. 그나저나, 2반도 거의 가버렸잖아, 정말 딴 반 다 가 버린 거 아냐 이거! 좀 조급해져서 발에 속력을 붙여 후다닥 뛰기 시작했다. 으, 쓰벌! 왜 7반과 8반은 3층인거야! 예체능반도 아닌데~! 탁탁탁탁탁...... ".....조장, 벌써 이게 몇 달째야. 나에 대한 징벌이라면 이제 그만둬 줘. 나 정말 충분히 반성했다구.....이건 너무 가혹하잖아~!" 눈에 띄일 정도로 살이 쭉 빠진 도진의 모습은 보는 이의 동정을 불러 일으킬 만큼 가련해 보였다. 오늘도 어김없이 한 손에 문제집을 들고 나타난 현일의 모습에 도진은 경기를 일으킬 만큼 노이로제에 걸려 있었다. 언제 한번 조원 김경민이라는 놈이 '우와~이제 우리도 엘리트다워 지려는 건가요? 공부 잘하는 조장을 두면 우리도 좀 격이 올라가지 않으려나?'.....라는 말을 눈치도 없이 해대는 바람에 그 날 분노한 도진에게 개박살 당해야 했다. 모든 일에 담담하던 치현마저도 이 일만큼은 정말 익숙해지기 어려웠는지 아지트의 탁상에서 문제집을 풀고 있는 현일을 발견할 때마다 '흠칫' 놀라야 했다. 그러나 정작 현일은 담담했다. "무슨 헛소리야, 내가 공부한다고 언제 血의 일을 소홀히 한 적 있냐? 아무 지장도 없는데 왜 야단이야?" "지장이 없긴 왜 없어, 조원들의 사기를 죄다 떨어뜨려 놓고선!" 퍼억!!! 딴 건 다 변해도 이건 안 변하는지, 울부짖는 도진의 얼굴에 현일의 운동화가 직격으로 내리박혔다. 치현은 이런 광경이 차라리 정답게 보인다는 사실에 눈물을 흘려야 했다. "이런 젠장, 나도 하기 싫단 말이다! 관둘 수 있는거면 진작에 관뒀지! 나 좀 내버려둬!" "뭐야, 조장. 혹시 아버님께 약점 잡힌거라도 있어?" 약점 정도냐? 내 형님의 사랑이 잡혀있는데! 차마 이 말을 하지 못하고 현일은 애꿎은 도진에게 분노의 한방을 다시 날려야 했다. 현일 역시 죽도록 공부하기 싫었다. 특히 작년, 문제집을 시작했을 때 받은 그 스트레스는 정말 말로 표현 못할 정도였다. 그러나 어쩌랴! 제발 하지 말라고 말리는 큰형님을 보자니 오히려 더 해야겠다는 마음이 생기고, 작은 형은 예전엔 큰형님 편 들다가 이제는 ?형 일은 형이 알아서 할거야, 제발 좀 하지 마라. 우리가 언제 너 공부 못한다고 구박이라도 했니? ? 이러면서 내 편을 드니 형님들께 미안하기도 하고 고맙기도 해서 오기로 문제집에 얼굴을 박는 걸 수차례 했더니 이젠 손에 단어장이 없는 게 허전할 정도였다. 게다가 제일 중요한 건..... -뭐 사줄까 막내야~ ......정말, 몇 차례나, 시도 때도 없이, 막 불러도 그야말로 '나비처럼' 춤추며 날아오는 인간 이진우 때문에 이젠 이 공부를 그만두면 난 인간도 아니라는 생각밖에 안 드는 현일이었던 것이다. 사정을 모르는 사람들은 그저 경악만 할 수밖에. 그 때, 아지트의 문이 열리며 멤버 몇 명이 우르르 들어왔다. "다녀왔습니다- 조장, 우리 구역에서 언놈들이 지존고의 쬐끄만 놈이랑 싸우고 있길래 한차례 뛰다 오는 중입...." 빠악-! 현일의 손에 들려있던 붉은 색 영한사전이 굉장한 소리를 내며 한 놈의 얼굴에 박혔다. 아버지 강건한은 검은색 영한사전 던지기를 즐기고, 아들은 붉은 색 영한사전 던지기에 익숙해져 가니, 하여간 서로 제일 욕하면서 서로 제일 닮은, 여러가지로 웃기는 부자(父子)다. "지존고라면 우리 큰형님 학교잖아....언제나 예우를 갖추랬지....!" "죄.....죄송합니다, 조장! 정정하겠습니다, 으윽, 지존고의 한 남학생이 여러 명과 싸우고 있길래 가서 선심으로 도와주고 왔습니다~!" 여전히 형님매니아인 현일의 저런 팔불출적인 모습을 보니 조금 안심이 되는 도진이었다. "오늘 개학날 아니었던가? 어떤 놈들이 빌어먹게 남의 학교생활의 처음을 망쳐놨냐." "어, 그런데 조장, 참 재미있는 녀석....아니, 아니! 학생이었습니다. 5명과 싸우고 있었는데 그렇게 많이 꿀리지는 않아 보였어요. 3대 1정도였으면 그럭저럭 이길 것 같은 실력자던데요? 키도 별로 안 큰데, 작은 놈이 참 싸우기도 잘 싸우대요. 근데, 어깨에 이상한 봉 같은 걸 매고 있던데 도대체 그게 뭐랑가....." "봉? 웬 봉?" "글쎄요. 목검 정도의 길이던데요? 뭐 그렇다고 설마 목검을 등에 매고 학교 다니겠어요? 사이코도 아니고. 하여간 조금 도와주니까 금방 우리 쪽으로 승패가 가려졌죠. 그랬더니 이 놈이....가 아니고 이 분이, 허리를 90도로 굽히며 인사를 하더라구요? -대단히 감사합니다! 이 은혜는 백골이 되도 잊지 않겠습니다! 언젠가 보은을 하겠습니다!- 허허, 도와주고 이런 골때리는 인사 받아보기도 처음이대요. 무슨 무협지도 아니고. 조금 있다가 비스구리하게 생겨먹은 어떤 새끼가 뛰어오.....우웩! 자,잘못했습니다~! 하여간 형제인 것 같은 분이 뛰어 오더라구요. 그렇게 두 사람은 사라졌습니다." 별 괴상한 놈들이 내 형님의 학교에 다니고 있구나. 현일은 이런 생각을 하며 다시 문제집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 Punch Drunk Love (3) "없다구?!" 기가 막혀서 소리를 빽 지르자 8반 녀석의 눈이 죽 찢어진다. 예상을 안 한 건 아니지만 정작 당하니 황당하다. 그 길다란 복도를 달려서 기껏 3층까지 올라왔더니! "아까 종례 끝나자 마자 거의 다 나갔어. 지금은 청소하는 애들밖에 안 남았다구." "그....그래, 고맙다. 그럼." 에이씨~! 이 자식은 왜 종례가 끝나자 마자 튀어선! 혹시 기숙사에 간 건 아닐까? 설마 그 녀석도 내가 자기를 기다린다는 생각을 감히 했겠어? (앗, 이건 좀 미안한 생각인가.) 허탈해진 마음에 실내화를 직직 끌면서 터덜터덜 걷고 있는데 계단 쪽에서 갑자기 누군가가 내 팔을 잡아 끌더니 콱 껴안았다. "--어떤 놈이야!" 반사적으로 주먹을 휘두르니 그 녀석이 아슬아슬하게 몸을 틀고는 손을 뻗어 내 주먹을 잡았다. 곧, 녀석의 얼굴이 보이며 너무나 익숙한 목소리가 들렸다. "헤이~! 강현승! 이거 너무 오랜만이잖아!" ".....남궁! 이 새끼! 전화한 지 얼마 됐다고 오랜만은 개뿔이! 내가 그 날 너 때문에 열받아서 잠을 못 잤어, 자식아!" 얼굴도 모르는 8반 아이들을 동정하게 만든 원인, 바로 남궁시호였다. 이 녀석은 도대체 뭘 먹길래 이렇게 키가 쑥쑥 자라는 거냐! 가뜩이나 큰 키에! 난 조금도 크지 않았는데~! 이런 억울한(?) 내 심정을 알면서도 모르는 척하는 (아니, 일부러 아는 티를 내면서도 모르는 척을 한다는 것을 알리는 척을 하는!) 사악남궁은 참 오랜만에 봐도 정겹지 않은 사악미소를 지어 보이며 말했다. "지금 진우 찾으러 왔다가 허탕 친 거지? 크하하하, 있을 리가 있냐! 내가 조회 때 말했지. 아까 현승이 만났는데 걔가 수업 끝나고 옥상에서 기다린다고 했더니 종례가 끝나자 마자 광속으로 날아가던데? 내가 한 짓이지만 좀 불쌍했다. 으하하하!" "...야! 이 사악한 놈아! 니가 그러고도 친구냐!" "내가 이러니까 이진우 친구 해먹지. 어서 가 봐라. 아마 그 녀석 해질 때까지 기다릴 걸." 크으으으윽--! 저 사악한 놈! 정말 사악남궁이란 별명은 저 인간에게 너무나도 잘 어울리는 별명이 아닐 수 없다! 히죽거리는 시호의 미소를 뒤로 하고 옥상으로 달려갔다. 덜컹-- 옥상 문을 여니 정말이지 파란 하늘이 머리 위로 가깝게 다가왔다. 보통 학생들이 모두 하교하면 옥상 문을 잠그는데, 오늘은 개학식이라 그런지 아직 문이 열려 있었다. "뭐야, 벌써 갔나? 설마....." 중얼거리며 문을 닫는 순간, 누군가가 옆에서 뛰어나오더니 그대로 나를 껴안으며 입을 맞췄다. 쿵,하고 내 뒷머리가 문에 부딪히고 녀석은 내 등 뒤로 손을 뻗어 문 걸쇠를 걸어버렸다. "읏-!" 익숙한 체취와 익숙한 키스가 금새 온 몸을 뜨겁게 만들었다. 단 한 명뿐이다. 나를 이렇게 만드는 사람도, 나에게......이렇게 간 부은 짓을 하는 놈도-----! "이진우----죽을래---?!" 퍼억! "....이게 연인에게 하는 첫인사냐...너무하잖아, 으으윽~!" "연인은 개뿔이! 깜짝 놀랐잖아. 누가 봤으면 어쩌려고 그래?!" "아니, 이 옥상에서 우릴 볼 놈이 어디 있어! 뚜껑도 없는 이 황량한 벌판 같은 곳에. 하긴, 혹시 모르지, 누군가가 헬기를 타고 가다가 봤을지도...." "그래그래, 그리고 그게 뉴스생방송 중이었던 헬기면 참 볼만하겠다, 그지?" "와, 그럼 우리도 공중파 방송 타는 거네?" 퍼억! 어퍼컷을 맞고도 여전히 실실거리는 진우. 누가 이 녀석을 보고 길거리 소년서클 두목이라고 생각하겠어. 진우가 또다시 나를 품에 안고 머리를 부벼댔다. 겨우 일주일 정도밖에 안 만났는데 참 오래 떨어져 있던 것 같다. 녀석은 그 사이 머리를 깎았는지 머리길이가 저번보다 약간 짧아져 있었다. 또 어디서 싸우고 왔는지 목 근처에 푸른 멍이 하나, 입 주위가 약간 찢어졌고.... 아아, 싫다 싫어. 내가 계집애도 아니고. 언제부턴가 이 녀석을 관찰하는 버릇이 생긴 것 같단 말씀이야. "아, 현승아. 나 다음주부터 아는 형 가게에서 야간 아르바이트 하기로 했어." "고3이 무슨 얼어죽을 알바야?! 공부나 해!" "아....아니, 아는 형 부탁이라 거절하기가 좀 어렵더라구. 그리고 하루에 3시간밖에 안 해. 또 길어야 두 세 달만 할거고." "내 참, 하고 싶다면 해라. 나도 알바 많이 해봐서 아는데 확실히 사회공부엔 도움이 되긴 하니까...그런데 성적 떨어질 정도는 하지 마!" "그 점은 염려 마! 우리 막내가 그렇게 피나게 공부하고 있는데 내가 설마 농땡이를 치겠어? 지성현이나 남궁시호가 있는 이상 전교1~2위는 무리겠지만 적어도 전교5위까지는 노려볼게!" ........전교 5위.... 그 극악한 지대를 저렇게 아무렇지도 않게 말하다니 저 놈이 수재긴 수잰가벼.... 난 전교 50등에도 들어가지 못하거늘....... "나중에 위치 알려줄 테니 꼭 한번 와 봐. 형한테 이미 자랑 마구 해놨단 말야. 내 애인 잘났다고." "뭐야-! 야 임마-! 쪽팔려서 거길 어떻게 가라는 거얏!" 빠악! "어, 형. 지금 돌아오는 거야?" 동네에 들어서니 뒤쪽에서 현수가 반갑게 소리치며 달려왔다. 시장을 보고 오는 길인지 손에는 야채봉지를 바리바리 들고서...... 불쌍한 내 동생, 언제부터 이 녀석이 가정주부가 됐지..... 수험생이 한 집에 둘이나 있으니 집안일은 또 이 놈이 다 할텐데. 장남으로서 면목이 없다. 그 심정을 아는지 모르는지 현수는 해맑게 웃으며 말했다. "오늘 아버지도 일찍 퇴근하실지도 모른대. 그래서 아버지가 좋아하는 된장찌개나 끓일려구. 그리고 앞집 쌍둥이자매 어머니께서 또 김치 주셨어. 형도 나중에 만나면 잘 먹었다고 꼭 말 해." "그 집은 맨날 먹을 걸 줘서 되게 미안하다. 우리도 언제 뭣 좀 만들어 돌리자." 오랜만에 현수랑 같이 걸으며 얘길 하다 보니 금새 집에 도착했다. 현일이는 나갔다가 아직 안 돌아왔는지 집엔 아무도 없었다. 차라리 이런 식으로 실컷 놀아줬으면 좋겠다. 이젠 아침마다 보이는 단어장의 공포에서 벗어나고 싶다, 동생아! "티비나 보자. 지금 이 시간에 재밌는 거 할라나?" "글쎄, 아마 스포츠 프로그램 같은 거 하지 않을까?" 교복상의를 아무데나 집어 던지고 소파에 털썩 앉아 TV를 켜니 키자마자 여자 아나운서가 딱 나타나 속보를 알렸다. - 지금, **은행에서는 한 명의 무장강도가 나타나 인질을 잡고 돈을 요구하고 있습니다. 현재 경찰 측에서는 인질로 인해 손을 쓰지 못하.... "와, 세상 진짜 험악하다, 이 벌건 대낮에 은행강도라니." "아무 일도 없어야 될 텐데 말야. 근데 저 은행, 어디서 본 은행 같은데? 혹시 이 근천가?" "설마? 은행이야 다 비스구리하게 생겨서 비스구리한 곳에 서 있는 거 아냐?" "그렇겠지? 형, 같이 파나 다듬자." 이미 우리가 흥미를 잃어버린 뉴스는 얄짤없이 꺼졌고, 곧 최신가요가 시디플레이어에서 큰 소리로 흘러 나왔다. ".....젠장할, 밥도 못 먹게 이게 무슨 짓이야." "반장님, 조금 있으면 특공대 투입됩니다. 조금만 참으세요." 강건한과 정유진은 신경을 바싹 세우고 인질극이 벌어지고 있는 은행을 노려보고 있는 중이었다. 불행히도, 현수가 말한대로 사건이 일어난 은행은 건한이 근무하는 경찰서 근처였던 것이다. 강도는 한 명뿐이었지만 인질이 잡혀있는 터라 경찰들은 이러지도 못하고 저러지도 못하는 중이었다. 저 쪽에서 서장과 뭔가 얘기를 하던 혜영이 갑자기 건한 쪽으로 급히 달려왔다. "반장님, 저 놈이 협상을 요구하긴 하는데, 솔직히 못 믿겠어요. 무장을 하지 않고 한 사람을 은행으로 들여보내라는 데요? 밖에 차 대기 시키구요." "인질이 운전을 못한다고 했나 보구만. 그 인질 덕에 다른 인질이 무사히 피했긴 하지만....아마 젊은 청년이었지?" "예, 어떡하실래요?" "....어떡하긴 뭘 어떡해? 자네가 나한테 쪼르르 달려왔을 때부터 내가 들어가길 바란다는 뜻 아니었나?" "아이, 반장님도 참. 우리는 이런 식으로 솔직하니까 가식 없는 사이인 거죠♡" "난 가식이 좋아. 제발 가식적인 사이로 돌아가자구." 건한은 한숨을 푸욱 내쉬고 어깨와 허리의 총집을 끌러 유진에게 건넸다. 유진이 걱정스러운 목소리로 말했다. "엄호하겠습니다." "관두고, 총소리 나면 바로 튀어 와." 두 손을 머리에 대고 건한이 은행 안으로 걸어 들어가고, 몇 분 후 험악한 욕설이 은행 밖으로까지 쩡쩡 울려대더니 곧이어 총소리가 커다랗게 울려 퍼졌다. 놀란 정유진과 경찰들이 은행 안으로 뛰어 들어가자 그들을 기다리는 것은 역시나 천하무적 강건한이었다. 건한은 강도의 멱살을 잡고 들어올려 패대기를 치려던 참이었다. "바....반장님! 무사하십니까?" "그럼 자네는 내가 안 무사하길 바랬나? 이 새끼, 총만 있으면 승리자라고 생각하는 꼴통이야! 그 잘난 총으로 대가리 한 대 후려쳤더니 바로 기절했는데?" 배고픔을 느끼게 했다는 이유로 강도는 기절했음에도 불구하고 그 상태로 건한에게 발길질을 무자비하게 받아야 했다. 아마 이 강도는 깨어나면 허리 꽤나 아프겠구나, 유진은 건한을 말리지도 못하고 그저 이렇게 생각만 해야했다. "감사합니다. 구해 주셔서." 경찰들이 뒷수습을 하고 건한은 발길질을 하고 유진이 쳐다보는 가운데 인질이었던 한 청년이 건한에게로 다가왔다. 유진과 건한은 청년을 보자마자 ?누굴 좀 닮았는데-라고 동시에 생각했으나, 그게 누군지는 금방 떠오르지 않았다. 청년의 표정이 약간 딱딱해서이기도 했지만, 말쑥하게 고급정장을 입고 있다는 것이 하나의 이유이기도 했다. (그들 주위에는 아무도 이렇게 입는 사람이 없기 때문에 연상이 금방 될 리가 없었던 것이다.) "자네야 말로 용감했어, 그......" 띠리리리리리링♬ 건한이 말을 끝내기 전에 그의 핸드폰 벨소리가 울렸다. 발신자 번호로 누군지를 확인하자마자 건한이 커다란 목소리로 고함을 질렀다. "뭐냐, 이 놈아! 공무 중이다!" "아버지! 언제 들어오실 거에요! 찌개 다 식겠어요!" 핸드폰 밖으로 현승의 목소리가 쩌렁쩌렁 울리자 유진은 저도 모르게 슬그머니 미소를 지었다. 영문을 모르는 청년은 그저 약간 의아한 눈으로 그들을 바라볼 뿐이었다. "이 새끼, 아버지가 지금 노냐? 네놈들 밥 벌어 먹이려고 개노가다 중이잖아!" "아, 안 들려요, 안 들려요~! 현수가 일부러 아버지 좋아하는 된장찌개 끓여놨어요. 빨리 안 들어오시면 우리가 다 먹어 치울겁니다!" "이놈들이! 감히 아버지 밥을 뺏어먹을 생각을 해?! 칵! 이 놈들! 지금 일부러 나 들으라고 숟가락 두들기는 거지! 먹지 마! 당장 갈 테니 기다려!" 방금 전까지 그렇게 멋진 활약을 벌인 형사가 지금은 아들과 먹을 걸 가지고 다투다니. 핸드폰 밖으로 상황중계가 이루어져서 그런지 청년의 딱딱한 표정이 약간 풀어지면서 재미있다는 듯이 입가가 움직였다. 건한은 이를 박박 갈면서 핸드폰을 탁 닫고는 그야말로 날아가듯이 은행 밖으로 뛰어 나가버렸다. 된장찌개 하나에 저렇게 진지해지다니. 유진은 '저 가족이 어딜 가나' 하는 생각에 머리를 설레설레 흔들어야 했다. 청년이 유진에게 다가와 목례를 하며 말했다. "인사도 제대로 못했는데 가셨군요, 저도 이만 가보겠습니다." "아, 예." 인사를 하고 얼굴을 들어 그를 쳐다봤을 때, 유진은 그제서야 이 청년이 누구를 닮았는지 생각이 났다. 이 싸늘한 표정, 약간 굳은 눈매. 이 표정은, 이 얼굴은- 예전에 봤던- "혹시 진....." -혹시 진우라는 소년을 아시나요. .....라고 물으려고 할 참인 유진이었다. 그러나 세상 일이 등장인물 마음대로 굴러가던가. 그 순간 혜영이 헐레벌떡 달려와 유진의 팔을 잡아 끌었다. "철수하자, 지금 또 신고 들어왔대. 나랑 같이 좀 가자구." "아, 예. 저, 먼저 가보겠습니다." "오늘 감사했습니다. 다음에 또 만나뵙지요." 얼떨떨하게 인사를 하고 유진은 혜영과 함께 은행을 빠져 나갔다. 경찰들이 왔다갔다하면서 수습을 하는 동안, 몸을 돌려 밖으로 나가려는 청년에게 한 남자가 급히 뛰어와 걱정이 가득한 얼굴로 말했다. "괜찮으십니까, 이실장님!" "전 괜찮습니다. 다친 곳도 없어요." "사장님이 아시면 얼마나 걱정하실지....." "굳이 먼저 말할 필요는 없겠죠. 일단 아버지껜 비밀로 하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은행강도에게 인질로 잡혔었음에도 불구하고 너무나 침착한 이 청년의 이름은 이진혁. 대하그룹 사장의 장남이며, 진우의 이복 형인 그는 그의 비서와 함께 은행에 잠시 들렀다가 뜻하지 않게 인질까지 되고 겨우 풀려난 중이었다. "그럼, 가죠." 차를 향해 걸어가는 도중, 진혁은 아까 만난 유진과 건한을 생각하며 어딘가에서 봤다는 느낌을 지울 수가 없었다. 분명히 본 것 같은데. 어디서였더라. 예전에 김지현 선생과 면담했을 때 봤던 사진 속에 건한과 유진이 잠깐씩 찍혀 있었다는 사실을 진혁이 기억 할 리가 없었다. 그저 데자뷰라고만 생각할 수밖에. -------------------------------------------- Punch Drunk Love (4) "흐와아아암." "좋은 아침! 큰형님!" "아침부터 기운이 넘치는구나, 아버진 일어나셨냐?" "현수 형이 깨우러 가던데? 아, 신문 가지러 갔다와야지." "내가 가져올 테니 넌 상이나 차려라." 현일이를 부엌으로 보내고 밖으로 나오니 상쾌한 공기가 기분을 업 시켜주었다. 같은 아침이라도 어제와는 기분이 천지차이구나. 역시 나란 놈은 고3따위에 걱정할 그릇이 아니란 뜻인지....... 겨우 하루를, 학교 가자마자 그 오랜 기간을 걱정한 게 한번에 날아가다니. 나란 놈은 좀 더 섬세해 질 필요가 있다니까. 오늘도 여전히 우유주머니에 꽂힌 신문을 꺼내며 욕을 바가지로 하고 있으니 앞집에서 명랑한 목소리가 들렸다. "굿모닝~현승오빠! 우리도 오늘 개학이지요~!" "......이지 흉내내기에 재미 들렸냐, 이나야....." "쳇, 이젠 안 속네. 어떨 때는 엄마보다 오빠가 더 빨리 알아차린다니까." 이나가 어울리지 않게 투덜거리며 신문을 들어올렸다. 다른 사람 앞에서는 조용하고 침착한 성격인데, 어째 날이 갈수록 애교가 많아지는 것 같다니까. 내 앞에서만 그러는 것 같기도 하지만..... "왜 바로 앞집인데, 너네 집은 항상 신문이 현관문까지 던져져 있고 우린 맨날 대문 우유주머니에 꽂혀 있는 거야?" "그거야, 오빠네는 남자만 바글거리고 우리 집은 여자애가 둘이나 있으니까죠." "빌어먹을 놈, 다음에 어떤 놈이 신문 배달하는지 그 낯짝을 구경이나 좀 해야겠다." 신문을 들고 집안으로 들어오니 아버지와 현일이가 화장실에 누가 먼저 들어갈 것인가의 간단한 문제를 두고 매우 심각하게 싸우고 있었다. 그래도 방학 중에는 못 봤던 우리 집 조례행사중의 하나인데, 오랜만에 보니 반갑구만. 아버지와 현일이를 내버려두고 부엌으로 들어가니 현수가 아침상을 차리고 있었다. "현일이 보고 차리랬더니 왜 네가 하고 있냐?" "내가 들어오니까 이미 꽁치구이에 불이 붙어 있더라구. 차라리 저 녀석에게는 아버지를 맡기는 게 낫지." 현수가 지금 두르고 있는 노란색 병아리 모양의 앞치마는 지난 번 진우가 갑자기 집에 찾아와 불쑥 내밀고 간 선물이다. 그때, 저 아기자기한 모양의 앞치마를 보며 참으로 난감했던 기억이...... 도대체 누구한테 조언을 얻었는지 저 인간 센스에 어떻게 요렇게나 깜찍한 무늬로 사오셨는지. (게다가 앞치마 주제에 방수까지 되는 고가품이랜다.) 현수는 황당한 미소를 지으면서도 그때부터 지금까지 줄곧 저 앞치마만 착용하고 있는 걸 보니 상당히 마음에 드나 보다. 그리고 아버지는 그 때 욕을 엄청나게 하셨음에도 불구하고 얼마 전 저 앞치마를 입고 설거지를 하는 모습을 우리에게 들킴으로써 우리 세 형제의 심폐호흡을 무시무시하게 방해했던 전적까지 있으시다. "아, 나 아마 저녁밥은 기숙사 놈들이랑 먹을지도 몰라. 만약 늦을 것 같으면 전화할게." "알았어. 걱정하지 말고 재미있게 놀다 와." 혹시나 이 사실을 아버지가 아신다면 무시무시하게 반대를 하시며 턱을 한방 얻어맞을 지도 모르지만. 다행히 아버지와 현일이는 아직도 큰소리로 왕왕 싸우는 중이다. "와 이케 늦었노? 자리 맡아놨다. 후딱 앉아라." "오오, 땡큐---!" 교실로 들어가자 우람이가 창가의 맨 뒷자리, 명당중의 명당을 맡아놓고 나를 불렀다. 창가 쪽으로 쏟아지는 햇빛이 반사되어 우람이의 결 좋은 금발이 반짝거린다. 아따, 정말 그 괴상한 사투리만 아니면 저거 진짜 킹카인데 말야. 친구로써 안타까워 죽겠네. 자리에 앉자 우람이가 두 눈을 크게 뜨고 들뜬 목소리로 말했다. "야, 나 오늘 깜짝 놀란 거 아나. 분명히 어제가 개학이었는데 오늘 와보이 어제 그 놈, 니가 반장이라칸놈 있잖나, 그 놈이 진짜 반장이 되있대? 울반아들이 모두 글마를 반장이라 부르는기라, 깜짝 놀랐다 아이가." ".....우람아, 거기에 대해서 깊이 생각하면 위험할지도 몰라. 그냥 이렇게 생각해라. 아마 선생님이 어제 반장을 불러서 임시반장을 시켰을거야. 진짜 반장 뽑을 때까지....." "아, 생각해보니 글네. 원래 임시반장은 생님이 지명하는 거였지?" .......아마 임시반장 후로도 그 녀석이 반장 해먹을걸. 그러나 이 말을 하면 여러모로 위험하므로 입을 다물었다. 아직 보충수업을 시작하지 않아서 아침 자율학습을 하고 있는데 반장이 잠시 어딜 나갔다 오더니 곧 프린트 용지를 잔뜩 들고 나타났다. "이거 특별활동 신청서니까 내일모레까지 써서 내라. 형식상으로 필요한 거니까 안 들어가면 안되고, 그 시간에 공부하고 싶은 사람들은 독서부나 문학연구회 같은데 들어가면 고문선생님이 3학년은 그냥 공부하게 해준대. 어차피 1학기만 하니까 알아서 들어가라. 아, 그리고 혹시 1학년 때부터나 2학년 때부터 해왔던 서클 그냥 다니고 싶으면 미리 말해." "무슨 부가 있더라? 기억이 안 난다." "용지 뒤집어 봐. 코스닭을 위해 주욱 나와있다." 2학년 때는 안 다녀도 된다길래 빼먹고 자습했는데, 3학년은 내신 때문에 필요한가 보네. 예전에 성림고에선 농구부를 다니긴 했다만, 여기선 영 안 땡긴단 말씀이야. 계속 생각하고 있는데 우람이가 샤프로 내 팔을 쿡쿡 찌르며 물었다. "닌 어디 들어갈낀데. 난 축구부 들어갈라 하는데 니도 갈래?" "어, 너 축구 좋아하냐? 축구부 주장이 내 친군데. 강현성이라고." ".....두 놈 다 이름이 그리 비스꾸리해서 친구 해묵었나? 내는 축구 그냥 운동 삼아 할라고 가는기다. 어차피 3학년은 1학기밖에 안 한다고 하니까." 용지를 뒤집어 서클목록을 보는데, 도대체 어딜 들어가야 할 지 모르겠다. 에라, 집에 가서 현수랑 상의를 하던가 기숙사에 가서 온 서클을 꿰고 있을 남궁에게 물어보던가 하자. 종이를 가방에 집어넣고 문제집을 펴자 정인환이 사랑의 매를 옆구리에 끼고 나타났다. "자자, 조회 시작하자-!" 기숙사에 처음 들어 온 신입생들 중 몇 명은 적잖이 당황하고 있었다. 모든 새 기숙사생들은 개학 전에 이미 들어와서 대부분은 조금 익숙해져 있는 것 같지만 말이다. 첫 날, 어떤 신입생은 기숙사 계단에 올라가자 마자 들려온 삐리리한 신음소리에 놀라 그 자리에서 도망가다 마침 기숙사 복도에서 왁스 칠을 하던 청소 아줌마의 걸레를 밟고 뒤로 넘어져 기절하는 바람에 지성현이 그 학생을 처리(?)하느라 골치를 썩였다는 소문이 벌써부터 나고 있었다. 또 어떤 신입생은, 기숙사 화장실에서 벌어지는 버라이어티 쇼를 두 눈으로 목격하는 바람에 쇼크로 쓰러지려는 도중, 그 때 문을 열고 들어온 2학년생이 너무나도 태연하게 그 옆에서 볼 일을 보고 유유히 사라지는 걸 보고는 그 모습에서 삶의 용기를 얻었다며 고백해서 모든 이들에게 골때림을 선사했다. "3학년이 됐는데 내가 왜 아직도 기숙사장을 해먹어야 하는 거지." 성현이 방에서 수많은 명단들을 일일이 체크하며 투덜거리자 시호가 심드렁하게 대답했다. "그거야 네가 워낙 일을 잘 처리해서 1학년 때부터 전 사감과 전 기숙사장에게 찍혔다는 게 이유겠지. 그리고 지금 사감이 학생회에 너를 강력히 추천했거든." ".....그래서 그 조건을 빌미로 너는 또 내 방에 들어 온 거고?" "와핫핫, 당연한 거 아니냐? 날 네 방에 넣지 않으면 절대 불가능하다고 협박했지. 너랑 같이 방 쓰면 얼마나 편한데? 가전제품도 많고 가구도 많고." "......." 그래도 역시 성현은 현승보다는 시호에게 익숙해져 있어서인지 현승처럼 '저 놈을 한 대만 아작나게 패고 싶구나!'라는 생각 따위는 하지 않았다. 그저 묵묵히 손을 날려 시호의 뒤통수를 갈겼을 뿐. 시호가 억울하다는 듯이 외쳤다. "직권남용을 나만 했냐?! 일부러 장윤영을 또 우리 방 옆에 배치시킨 놈이 너잖아! 네놈은 나보다 더하면서!" "내가 이러니까 네놈 친구 해먹지. 그리고 장윤영이 내 눈에 보이는 곳에 있어야 맨날 붙어 다니는 이진우를 통제하기 쉽단 말이다." 2학년초에 진우가 기숙사에 들어올 때, 진우 아버지가 5층의 제일 좋은 방에 진우를 넣어야 한다고 일부러 학교에 전화까지 한 전적이 있어서 2학년 때 장윤영과 이진우를 같은 방에 넣으려던 성현의 계획은 틀어지고 말았었지만. (물론 진우는 이 모든 일을 모른다.) 그리고 지금 동급생들만 쓰고 있는 3층 역시 지성현의 권리남용의 결과라는 걸 아는 사람은 남궁 시호밖에 없었다. 성현의 예상대로 매일 장윤영의 방에 찾아왔던 이진우 덕분에 윤영의 룸메이트들은 매번 바뀌어야 했다. 그것도 한결같이 ?무섭습니다!-하는 이유를 대면서. 금년엔 그 간부은 강현승도 없는데 누굴 윤영의 방에 넣어야 하나. 성현이 명단을 뒤적여 보고 있으니 시호가 또 한마디 했다. "네놈이 이러니 이진우가 외도도 안하고 너한테 다 기대지." "......애들 뒷치닥거리는 질색이니 너라도 말썽피지 말아주시지." "아읏! 으응!" .....오랜만이다..... 날도 아직 안 저물었는데 계단에서 저 짓하는 놈들은 대체 얼마나 용감한 건지. 끝나면 갈까, 방해하고 갈까 생각하고 있는데 등뒤에서 기척이 느껴져 뒤를 돌아보니 한 남학생이 시퍼렇게 질린 채 잔뜩 얼어있었다. 얼굴이 앳된 걸 보니 신입생인가? 후배의 정신교육을 위해서라도 선배인 내가 나서야겠구나. 내가 무심한 표정으로 벽에 기대어져 있던 대걸레를 들어 계단 손잡이 부분을 따다당땅하고 두들기니 그 두 명이 화들짝 놀라면서 옷을 추려 입는 소리와 함께 계단을 뛰어 올라가는 소리가 들렸다. "하여간 정신공해에 기여를 많이 한다니깐." 심드렁한 태도로 대걸레를 다시 벽에 기대놓으니 그 신입생이 매우 존경스러운 표정으로 나를 쳐다보고 있었다. 성현이는 저런 표정을 아마 2년 내내 받았겠지? "다음에, 또 이런 일이 있으면 이렇게 하면 됩니다." "아, 예!" 열심을 담아 대답하는 그를 뒤로 하고 기숙사장 방으로 향했다. 어제 진우에게서 두 개의 불행한 소문을 들었는데, 하나는 성현이가 또 기숙사장을 맡게 됐다는 것과 다른 하나는 또 시호와 같은 방을 쓴다는 것이었다. 하지만 성현이가 기숙사장이 또 됐다는 건 왠지 납득이 간다. 그 인간이 워낙 유능해야 말이지. 가뜩이나 이 트러블 만땅인 기숙사를 제일 잘 이끌었다는 평을 들었던 놈인데. 그러고 보니 윤영이도 어쩌다 보니 또 성현이 옆 방을 쓰게 됐다는데, 방이 그렇게 모자랐나? 똑똑똑. 문을 두들기자마자 누군가가 문을 덜컥 열고 불쑥 튀어나왔다. "어서오십셔---! 남궁의 스위트 룸에....." "놀고 있네, 빨리 안 비켜~?! 우와, 저 많은 종이는 뭐래?" "새 기숙사생들 명단. 일단 대충 방 배치는 해놨는데, 한번 더 자세히 검토해보고 웬만하면 같은 학년끼리 쓰게 하려고." 성현이 골치 아파 죽겠다는 표정 그대로를 지으며 말했다. "그러고 보니, 학생회도 새 멤버 뽑지 않냐?" "응. 2학기에는 3학년 멤버들은 다 물러나니까. 지금부터 교육시켜놔야 우리도 안심하고 물러나지." "학생회장이 누가 될까 궁금하네. 지언 선배만큼 거물이 있으려나?" "...사실 학생회 회의에서 지성현이 후보로 올랐는데, 기숙사 사감이 절대 지성현을 뺏길 수 없다는 몸부림을 쳐서 결국 제외시켰지. 다음주 회장선거 때 아마 또 재미있을 거다. 이 선거운동이란 게 시대를 막론하고 재미있는 거니까." 그렇지. 여기는 지존고지. 벌써 1년이 됐는데도 가끔은 잊어 먹는다. 이 곳에서는 하나의 행사가 갖는 의미가 얼마나 큰지를..... 그 때 되면 분명히 엄청 골 때리겠지? 시호 말로는 예전에 지언 선배가 찍어뒀던 인재가 하나 있다고 하는데, 우리 학년 중에 그럴 만한 인물이 있던가? 있다면 내 눈에도 보였을 텐데. "참고로 지언 선배는 선거운동 때 여장하고 온 반을 돌아다녔어." "뭐야--?! 거짓말---!" Punch Drunk Love(5) 쨍그랑- 커다란 소리를 내며, 하늘색을 띈 어항은 산산조각 부서져 버렸고, 유리파편과 함께 금붕어 두 마리가 바닥에서 펄떡거리며 몸부림을 쳤다. 어쩔 줄 몰라 덜덜 떨고 있는데, 문이 열리며 아버지가 들어왔다. 아버지는 깨진 어항을 보자마자 표정을 굳히고는 몸을 굽혀 어지러진 바닥을 정리하기 시작했다. 그 어항은 아버지의 유모였던 분이 선물했다는 소중한 것이었다. 용서해달라는 말조차 나오지 않아 아버지 옆에 앉아 깨진 어항을 주우려고 하자 아버지가 내 손을 탁 쳐내며 싸늘한 목소리로 말했다. - 손 치워라. " 여기 있었냐? 찾았잖아." 옥상 문이 열리며 윤영이 나타났다. 윤영은 옥상 난간에 기대어 담배 연기를 뿜어대고 있는 진우를 한번 보고, 그 발밑에 떨어진 무수한 꽁초를 한번 보더니 혀를 쯧쯧 차며 말했다. " 몇 대나 피운거냐? 강현승이 보면 최하가 전체골절이다." " ....오늘은 친구랑 같이 어디 간다고 했어. 하교하는 거 확인했다. " " ....넌 궁상도 주위 체크 다 하고 떠는구나....." 윤영의 어이없다는 표정을 보고 진우는 피식 웃더니 다시 담배를 입에 물었다. 희뿌연 담배 연기가 한숨처럼 밖으로 내뱉어졌다. " ....오랜만에 꿈을 꿨다. " " 정말 오랜만에 꿈을 꾼 것 같아....." 윤영은 굳은 표정으로 아무 말 안하더니 곧 진우 옆으로 다가가서는 그의 입에 물려있는 담배를 빼내 바닥으로 떨어뜨렸다. " ....너, 그 자리에서 움직이지 않으면 평생 그 모양일거다. " 윤영은 운동화로 담뱃불을 끄고는 몸을 돌려 옥상을 나가버렸다. 그 뒷모습을 멍하니 쳐다보던 진우는 자조적인 웃음소리를 내며 고개를 떨궜다. - 그래도, 너 내 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