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상하고 있던 흔해 빠진 대사를 말한 한때의 남편을 아이(藍)는 열띤 눈빛으로 빤히 쳐다보았다. 원망, 분노, 혐오, 그리고 모욕감. 더불어, 자신이 스스로를 가장 용서할 수 없다고 느끼는 순간의 그 감각……. 남편―한때 그랬던 사람이지만 앞으로 그렇지 않게 될 남자―이나 다 타키(稻田多紀)에게는 언제부터인지 자기혐오를 불러 일으키게 하는 감각만을 품게 되어 있었다. 감각. 불리함을 잘 알고 헤어질 결심을 한 이유이고 거의 모든 점에 있 어 잘 되지 않았던 원인이며, 동시에 잘 지내온 이런저런 원인이기 도 했던 것. 이런 때조차 타키는 문제 같은 것은 하나도 일어나지 않았다는 듯 이, 세간에서 화제가 되고 있는 시시한 연예계의 추문을 입에 올리 고 웃음지었다. 하얀 손가락. 매끄러운 턱선. 남성적인 느낌이 희박한 가는 골격과는 상반되는, 압도적이기까지 한 성적 매력. 아이는 여태껏 그 매력에 휘둘려왔다. 아내였기 때문이 아니다. 여 자이기 때문이었다. 결국, 이제 두 번 다시는 사양이다―그렇게 결의하고 시할머니의 상이 끝나고 나서 이혼을 제시했다. 타키는 뜻밖일 만큼 강고하게 버텼다. 담백한 남편이니까 분명 두 말없이 동의할 거라고만 생각하고 있었던 아이는, 왜 불평을 하는 걸까 하고 오히려 더 오기가 나서 이혼에 집착했다. 이혼 얘기가 암 초에 걸려 있는 때만 자신들이 부부임을 느낄 수가 있었기 때문이 었다. 그때까지 타키와 아이는 딸 하나를 둔 부부였지만, 부모도 아니고 부처(夫妻)도 아니었으며 늘 남자와 여자일 수밖에 없었다. 아이에게 타키는 언제나 '남자'였다. 타키가 바라든 바라지 않든 실제로 그는 아이의 여자로서의 육체 위에 군림하는 남자였을 뿐, 부친도 남편도 되어주지 않았다. 타키가 마음 내켜하지 않았기 때문에 길게 끌었지만, 헤어지는 것 자체에는 아무런 문제나 의문도 일지 않았다. 이혼이 드디어 성립되어 두 사람의 길이 서류상으로 갈라진 지금, 평소와 다름없는 표정을 짓고 있는 것은 타키 쪽이었다. 조모가 죽기 이전―이혼을 제시하기 전―으로 타키는 돌아가 버린 것처럼 보였다. 응접실의 낡은 등나무 의자에 앉은 그는 헐렁한 쉐터에 심플한 바 지 차림으로, 센스 감각을 나타내는 어떠한 자잘한 물건도 소지하고 있지 않았다. 화사해 보이는 하얀 손목에 찬 시계도, 윤곽 치고는 투박한 안경테도, 기껏해봐야 3만엔도 되지 않는 중류의 물건이었 다. 단지 중신(中身)의 남자만이 특별했다. 아이는 허망한 가슴 속으로, 자신은 앞으로 평생 이 남자와 헤어진 걸 후회하며 살아갈 것임을 알고 있었다. 왜냐하면 아이는 진심으로 타키와 헤어지고 싶어한 적은 단 한번도 없었으니까…. 그런 말을 꺼내도 이미 때는 늦었다. 부부로서의 숨막히는 대화를 되풀이할 생각 따위, 타키에게 전혀 없다는 것은 아이도 알고 있었다. 그는 아내도 어머니도 필요로 하지 않았다. 필시 현대에서는 매우 희한한 종자에 속하는, 완벽하게 고립할 수 있는 남성일 것이다. 정말로 '남자'일 수밖에 없는 인간. 시시한 세상 얘기를 하는 것으로 타키가 자신을 쫓아내려 하는 것 을 알아챈 아이는 슬슬 퇴실할 생각을 밝혔다. 형식적인 만류의 말은 타키의 희박한 표정과 맞물려서 아이를 절 망시켰다. 이혼이 결정되기 전까지는 부끄러운 줄도 모르고 '가지 말아 달라' 고 호소한 적도 있는 남자가, 일단 이혼이 확정되어 버리자 한때의 아내 따위는 거북살스러운 공기를 만들어내는 성가신 이웃 정도의 존재에 지나지 않는다는 듯한 모습이다. 타키가 어떤 남자인지는 잘 알고 있었다. 앞으로의 인생, 그것 때 문에 고민할 필요가 없는 것만이 다행이었다. 어차피 타키의 진실한 마음을 움직일 만한 여자는 나타나지 않을 것이다. 30년 이상이나 나타나지 않았으니까, 앞으로도 나타나지 않 겠지. 타키도 나타나기를 바라고 있지는 않을 터. 박정한 타키는 그것이 어떤 것인지조차 모를 것이다. "난 안 갈 거야." 오래된 일본 가옥 특유의 어둑어둑한 복도로 나가자, 층계 아래의 벽에 달라붙어 있던 딸 아케가 반항적인 어조로 말했다. "파파를 혼자 있게 하고 싶지 않아." "파파는 혼자라도 괜찮아." 웃는 얼굴로 말하는 타키의 눈빛은 부드러웠다. 조각처럼 단정하고 온화한 얼굴 생김새와 똑같이, 그에게는 날카롭게 튀어나온 부분이 완전히 결여되어 있었다. 단지 그것 뿐이었다. 분노도 보이지 않지만 감동도 없으며, 미소는 지어도 크게 소리내 어 웃진 않는다. 타키에게는 '남자'라는 것 말고는 아무런 열정도 없었다. "가자, 아케. 이미 정해진 일이잖니." "싫어!" 철들 나이가 된 아케는 아이가 기르기로 결정이 나 있었다. 하지만 아버지를 끔찍이 좋아하는 아케는 그렇게 결정이 난 뒤도 떼를 쓰 며 따르려고 하지 않았다. 『떼를 쓴다』는 굉장히 어린애 같은 표현을 딸에게 씀으로, 아이 는 늘 자기혐오를 부활시켰다. 딸에 대해서조차 이렇다. 타키를 사이에 두면, 여자인 이상 이 자기혐오는 늘 따라다닌다. '질투'라는 원초적인 감정과 함께. "마마나 맘대로 나가면 되잖아. 난 파파한테 폐 끼치거나 하지 않 을 거야. 성은 바뀌었지만 파파는 앞으로 내가 돌볼 테니까." 아케는 주장하듯이 말하자, 아이의 손이 닿지 않는 장소로 펄쩍 물 러섰다. "응, 괜찮지, 파파? 파파는 나 좋아하지? 마마보다 소중하지?" "아케, 이미 결정된 일이다. 너는 아이와 가는 게 나아." 아이―. 타키는 아케의 앞에서도 아이를 이름으로 불렀다. '마마'니 '네 엄 마'니 하는 가정의 냄새가 나는 호칭은 한번도 쓴 적이 없었다. 일 부러 그러는 것은 아니겠지만, 그것이 집 안에 불안정한 공기를 만 들어내는 원인중 하나인 것은 틀림없었다. '가정' 안에 '남자와 여자'는 필요없는 것이다. "마마는 상관없어. 난 파파의 마음을 알고 싶은 거란 말야." 아케의 어조는 이미 한사람의 '여자'의 것이었다. 열여덟. 타키에게 상대가 되는 여자의 연령에 충분히 달해 있었다. 아이는 등줄기를 써늘하게 하는 연상에, 딸의 손을 신경질적으로 붙잡았다. "가자, 아케." "싫다고 했잖아!" 뿌리치는 아케의 힘은 아이를 능가하고 있었다. 싱그럽고 건강하며 잔혹한 소녀의 '미(美)'는, 40을 넘긴 아이의 열등감을 자극했다. 머 리 속이 빨갛게 물들 만큼, 아이는 딸에게 질투를 느꼈다. 타키는 이제서 서른 여섯. 바싹 달라붙어 있는 열여덟살짜리 딸과 는 연인 사이라 해도 통용될 것이다. 타키의 얼굴은 아주 젊어 보이는데, 단정하고 흰 피부에 인상이 엷 은 담백한 생김새가 실제 연령을 상상할 수 없게 만드는 탓이었다. 물론 이슬을 먹고 사는 듯이 달관한 태도 때문에 학생으로 보이는 것은 무리겠지만, 그래도 20대로는 너끈히 통할 정도였다. 아이가 맞선 자리에서 처음 만났을 때, 아직 열여덟살이었던 타키 는 아름답고 총명하며 상냥했다. 섬세한가 싶으면 호방한 구석도 있 는 그에게, 아이는 순식간에 정신없이 빠져들었다. 그로부터 19년. 만난 후 단 하루도 안도한 날은 없었다. 달라붙어 있는 부녀를 향한 아이의 감정은 가슴 속 밑바닥에서 시 커멓게 끓고 있었다. 불꽃처럼 타오르는 질투는 이미 '어머니'로서의 것이 아니었으며, 그 자각도 있었다. 때문에 이혼을 결의했던 것이다. "떨어지거라, 아케…!" "싫다고 했잖아!" 아름다운 얼굴을 일그러뜨리며 화내는 모친을 뿌리치고, 딸도 필사 적으로 부친을 붙잡고 매달렸다. 이 자리의 해결 열쇠를 걸머쥔 당사자인 부친 타키만이 무반응이 었다. 곤란한 기색도 없었고, 제지하려는 모습도 보이지 않았다. 어둠으 로 둔하게 빛나는 안경 너머의 엷은 눈동자는, 눈 앞에서 일어나고 있는 일을 비치면서도 전혀 다른 광경을 바라보고 있는 것처럼 보 였다. 언성을 높이며 싸우는 것은, 늘 타키 주위의 여자들 뿐이었다. "실례합니다, 계신가요?" 그때, 왠 여자의 밝은 음성이 현관 미닫이가 열리는 소리와 함께 촌극 사이로 끼어들었다. "선생님?" "………" 교태를 품은 달콤한 목소리가 들린 순간, 험악하게 다투고 있던 모 녀는 눈살을 찌푸리고 입을 다물었다. 그리고 현관 쪽으로 고개를 돌리고 빤히 쳐다보았다. 아직 훤한 햇살을 등지고 문 밖에서 들어온 여자는, 현관의 시멘트 바닥에서 하이힐을 벗으며 긴 머리칼을 우아하게 흔들었다. 그리고 조용히 얼굴을 들자, 두 여자의 존재를 깨달았다. "뭐야, 먼저 온 손님이 있었네?" 쓴웃음을 짓는 여자의 입술은 마치 피칠이라도 한 것처럼 붉었고, 머리칼은 칠흑으로 푸른 빛을 띠고 있었다. 고상한 회색 정장으로 몸을 감싸고 있었지만, 여자는 고작해야 스 무살이 될까말까 하는 나이로 보였다. 뚝뚝 흘러떨어질 듯한 색기와 함께 압박감조차 자아내는 자신감에 찬 젊음이, 두 여자의 곁으로 노도처럼 밀어닥쳤다. "……파파의 손님이 왔다. 가자, 아케." 모친의 싸늘한 말에 아케는 의심과 불안을 품고 흔들리면서, 매달 리는 눈길로 부친을 바라봤다. "가거라." 타키의 표정에는 미안해 하는 빛도 없었고, 명백한 연인의 등장에 조차 부끄러워하는 기척 하나 없었다. 평소와 전혀 다름없이 담담하고 다정하며 부드럽고……잔혹한 남 자. 아케가 입술을 벌리고 질문을 하기도 전에, 여자는 다가와서 아이 의 옆을 스쳐지나더니 아케가 매달려 있는 반대편으로 돌아 타키의 팔을 잡았다. 그 순간, 전류같은 분노가 아케의 미숙한 몸을 꿰뚫었 다. "미안하구나. 네 파파는 지금부터 나와 볼 일이 있단다." 사정을 알고 있을 텐데, 여자는 자신만만하게 미소지었다. 아름답 고 우아하며, 무엇보다도 숨 막힐 듯한 섹스 어필이 충격적이었다. 콧구멍을 자극하는 달콤한 향기. 아버지와 맞닿은 풍만한 가슴에서 이는 나른한 살 냄새. 아케는 뺨을 확 붉히고, 불에라도 데인 듯이 아버지의 팔에서 손을 뗐다. 갑자기, 부친이 그저 방탕하고 무절제한 '남자'일 뿐임을 깨달 았던 것이다. "가거라, 아케." 타키는 딸의 거부반응에도 딱히 관심을 표하지 않았다. 아케는 어딘가 허무한 그 태도의 한구석에라도 '딸을 잃는 부친의 비애'는 없는지 열심히 찾았지만, 그런 미지근한 감상은 어디에서도 느껴지지 않았다. 아버지는 정말로 자신을 딸로 의식하고 있지 않다 는 것을 일순간으로 알았다. 그녀는 아이에 의해 태어나고 자란 집에서 망연히 이끌려나갔다. 아이는 자신보다 키가 큰 딸을 품에 껴안다시피 하고 현관 시멘트 바닥 위에서 구두를 신자, 20년 가까이 산 집을 뒤도 돌아보지 않고 떠났다. ――타키와 살았던 이나다의 집안에서 그녀는 '여자'가 아니었던 날이 없었고, 어떤 날이든 '여자'로 존재했다. 순면으로 목을 졸리듯 이 여자로 있기를 오랫동안 강요받아온 것이다. 19년은 '여자'로 계속 있기에는 너무 길었다. '어머니'이며 '아내'이 기도 한 날을 찾을 수는 없었다. 이미 이나다의 집에서 그런 입장에 대해 미련을 품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때문에 아이가 미련을 버리지 못하는 부분은 어디까지나 '여자'로 서의 자신. 그것은 젖은 옷이 살갗에 달라붙는 감각보다도 더욱 생 생하고 습한 감각을 언제까지고 아이의 몸에 불러일으키고 있었다. 19년간 그녀의 몸을 계속 침식해온 그것은 타키의 독. 돌아보면 다 시 질질 끌리게 될 것이다. 자신의 몸 속 깊은 '여자'의 부분을 독처 럼 침식한 타키의 '남성'이, 지금도 몸을 욱씬거리게 했다. 차갑게 얼어붙은 마음과는 반대로 몸은 여전히 타키의 열이 남아 있는 것같이 뜨겁게 젖어서, 냉정히 잘라냈을 감정까지 불꽃처럼 타 오르게 하고 있었다. "너, 이제 저 사람한테는 다가가면 안돼." 듣고 있는지 어떤지는 알 수 없었지만, 그래도 얼이 빠져 있는 딸 에게 말하지 않고는 있을 수 없었다. "저 사람은 짐승이야. 동물이니까." 목구멍 속에서 치밀어오르는 음울한 덩어리를 삼키면서 아이는 자 신에게 들려주듯이 중얼거렸다. 가까이 가면 안돼. 저 남자는 발정난 짐승. 축생이니까――. ◇◇◇ 1 톱니바퀴 ◇◇◇ 엷은 불빛이 눈꺼풀 속으로 부드럽게 스며드는, 심야라기에는 아직 이른 시각. 교육 TV에서는 특징없는 클래식이 계속 흐르고 있었다. 야나기 미즈오는 베갯머리의 디지털 시계로 시간을 확인하자, 슬슬 욕실에서 나타날 동행을 기다리기 위해 침대에서 내려섰다. 공기가 흔들리자, 방금 전까지 농후하게 떠돌고 있던 나른한 냄새 가 방안에 아련히 흩어져 올랐다. 그녀가 마음에 들어하는 고급 향수 내음이 젊은 자신의 땀냄새와 뒤섞여, 아까 둘이 그랬듯이 대기 중에서 한데 뒤엉키고 있었다. 미즈오는 에어컨디셔닝 파워를 세게 틀고 냉장고에서 미니 버틀에 든 미네럴 워터를 꺼내들자, 개처럼 욕실 문 앞에 섰다. 자신이 잡긴 했지만 도저히 묵을 마음이 내키지 않는 호텔 방은 상급. 수증기와 함께 나타날 그녀도 상급. 보수 또한 상급인 것을 알고 있기에 봉사도 상급이 아니면 안되었다. 미즈오는 남의 비위를 맞추는 것이 싫진 않았다. 하물며 그녀는 그 와 같은 또래의 보통 남자가 제아무리 열심히 손을 뻗어도 잡을 수 없는 진짜 여왕인 것이다. 아부를 할 만한 가치는 충분히 있었다. "수고." 문이 열리고 갓 끓인 차처럼 몸에서 김이 오르는 여자가 나타나자, 미즈오는 천진하게 웃음지으며 뚜껑을 연 미네럴 워터 병을 내밀었 다. "고마워." 여자는 농염하게 미소짓고 자연스런 몸짓으로 병에 입술을 댔다. "당신도 샤워하세요, 미즈오." "아니, 됐어요." 미즈오는 고개를 흔들자, 여자의 머리에 둘린 하얀 수건을 손에 들 고 부드럽게 문지르기 시작했다. "돌아가려고요, 유미카상? 바래다 줄게요." "당신은 여기서 묵고 가세요. 체면을 차리다니 당신답지 않아." 유미카라 불린 여자는 젊다고 하긴 어려웠으나 매력적인 웃음을 떠올릴 줄 알았다. 40을 넘긴 중년이라고 해도 좋은 나이지만, 맘껏 인생을 즐겨왔으 며 지금도 원하는대로 살고 있는 인간 특유의 스트레스 없는 좋은 표정을 하고 있었다. 웃는 얼굴이 온화하고 생김새는 더 부드러웠으며, 미인이라기엔 조 금 무리가 있지만 나쁘지 않았다. 연령으로 보면, 그녀의 깊이 있는 매력은 미모보다도 그 내면에 있 다고 할 수 있었다. 그녀는 아주 능숙하고 당당하게 연하의 미즈오를 리드하며, 충분하 고도 남는 침착함을 보였다. 살이 약간 붙어서 유럽의 옛 그림에 나오는 여자처럼 풍만한 그녀 에 비해, 미즈오는 매우 연약하고 키만 훌쩍 큰 요즘 세대의 아이답 게 몸이 가늘었다. "그럼 아래까지 배웅할게요. 괜찮죠?" "물론이야." 유미카는 웃으며 화장대 앞에 걸터앉아 느긋하게 정성껏 몸단장을 시작했다. 그녀가 준비를 마치려면, 샤워 때와 똑같이 시간이 걸릴 것은 알고 있었다. 목욕을 재빨리 대충 끝내는 미즈오로선 그 동안에 몸을 닦 을 여유가 충분히 있었지만, 유미카의 몸단장이 끝날 때까지 순종적 인 개처럼 가만히 지켜보며 기다렸다. 물들인 머리를 빗는 여자의 등에는 갈색 얼룩이 몇 개인가 떠올라 있었다. 미즈오는 그것을 추하다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연령을 나타내며 약간 탄력을 잃은 피부도, 미즈오는 싫지 않았다. 유미카도 역시 젊은 미즈오에게 빤히 응시당하는 것에 특별한 위 화감이나 콤플렉스를 자극받는 일은 없는 듯, 착착 준비를 해 나갔 다. "당신도 옷을 입으세요, 미즈오." "응." 명령받은 미즈오는 얌전하게 옷장으로 향했다. 싸구려로밖에 보이지 않지만 2만엔(*약 22만원) 가까이 나가는 티 셔츠와 20만엔은 훌쩍 넘는 빈티지 청바지를 입으면, 열아홉살의 미 즈오는 아직 고교생으로밖에 보이지 않았다. 홀쪽한 배와 가슴이 미 성숙한 가련함을 풍기고, 머리칼이 짧게 깎인 이마에서는 싱그러운 풋내가 스며나오고 있었다. 귀에는 피어스가 둔탁한 빛을 뿜어내고 있는데, 백금으로 역시 20 만엔 가까이 나가는 것이었다. 옷장 안에 걸려있는 재킷과 캐시미어 코트도, 진학을 위해 상경할 무렵에는 상상도 하지 못했던 거금을 들여 샀다. 미즈오는 옷장 문을 닫고, 밖에 붙어 있는 거울로 작은 얼굴을 비 춰봤다. 약간 치켜올라간 눈꼬리에, 새까맣고 커다란 애교만점의 둥근 눈. 전체적으로 사랑스러운 생김새 중에서, 콧날만이 높고 아름답게 쪽 뻗어 있었다. 대학에 입학한 뒤로는 눈매가 무섭다는 말을 듣게 되었지만, 그런 말을 하는 젓비린내나는 여자에게는 어차피 볼 일이 없었다. 봉사받는 것에 익숙한 여자들 따위, 바치는 것에서 쾌감을 찾아낸 여자들에 비하면 울음소리만 드높은 브로일러(*broiler)와 같은 것이 다. 똑같은 토양에서 비교하는 것 자체가 어리석은 일이다. 미숙한 여자들에게 어떤 식으로 여겨지든, 미즈오는 전혀 알 바 아니었다. 뻗친 앞머리를 잡아누르면서, 미즈오는 유미카의 재킷과 코트를 손 에 들었다. "미즈오, 용돈은 지갑에 넣어놨어." "고마워요, 유미카상." 준비를 끝낸 그녀의 곁에 돌아가자, 눈부신 매력을 뿌리는 미즈오 의 패이트런(*patron)은 우아한 몸짓으로 재킷을 받아들었다. "아아, 밤은 순식간에 끝나버린다니까." "미즈오의 체력에 끝까지 어울리는 건 나한텐 무리야. 부서져 버린 다구." 재킷을 입은 유미카는 미즈오가 펼쳐든 코트로 몸을 감싸자 지그 시 눈길을 맞추었다. "크리스마스라는데 한가롭게 있다니 당신답지 않아. 또 다른 여자 를 유혹하기에 아직은 늦지 않았잖아?" "오늘밤은, 유미카상의 향기에 감싸여 잘 거야." 느끼한 대사를 입에 올려도, 유미카는 즐겁게 웃을 뿐 깔보거나 비 웃지 않았다. 서로 본심이라고 생각하지 않으니까 즐길 수 있는 것 이다. 미즈오는 모친 만큼이나 연상인 여성과 그런 교제를 할 수 있는 자신을 싫어하지 않았다. 때문에 자기혐오도 없이 거짓말을 할 수 있었다. 유미카가 그런 일선을 긋고 대할 수 있는 젊은 남자만 고르 고 있는 것도 알고 있었다. 떼를 쓰거나 스마트하지 않은 짓을 하면, 곧바로 다른 사람이 미즈 오의 지금 위치에 설 것이다. 유미카와 만난 뒤는 지갑이 세배는 두툼해졌고, 그것만으로도 미즈 오는 자신이 '광대짓'을 할 가치는 충분히 있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카드키를 손에 들고 방을 나섰다. 고상하고 요염한 브르조아 계층의 유한 마담으로밖에 보이지 않는 유미카와, 자신의 스타일밖에 염두에 없는 듯한 젊은 미즈오. 둘이 나란히 걸으면 뭔가 부도덕한 관계로밖에 보이지 않았다. 사이좋은 모자로는 도저히 보이지 않는 성적인 뉴앙스를 두 사람이 전혀 숨 기려고도 하지 않기 때문이었다. 외모는 보기 좋지만 인상이 약한 미즈오는, 자신이 그다지 눈에 띄 지 않는 존재임을 알고 있었다. 유미카와 함께 있으면, 남자든 여자든 시선이 가는 것은 유미카 쪽 이지 자신 쪽이 아니었다. 그런 점에서, 유미카는 선천적으로 눈에 띄도록 태어났다고 할 수 있었다. 외관이 훤히 들여다보이는 투명 엘리베이터에 탈 때도, 안에 있 던―크리스마스에 대분발을 한 듯한―커플의 관심을 모은 것은, 요 란한 차림을 하고 있는 것도 아닌데 화려함이 풍기는 유미카 쪽이 었다. 미즈오는 자신의 파트로네스가 시선을 끌어모으는 것에 우월감을 느끼면서, 먼저 올라타 로비층을 눌렀다. 주목을 끄는 것에 익숙한 유미카는 털끝 만큼도 다른 손님을 신경쓰는 일 없이, 조용한 엘리 베이터에 천천히 올라탔다. 개폐 버튼에서 손을 떼고 유미카 쪽으로 몸을 돌린 미즈오는, 매혹 적인 파트로네스의 시선이 또 하나의 엘리베이터로 옮겨가 있는 것 을 깨달았다. 옆의 엘리베이터도 이쪽과 똑같이 안이 들여다보였는데, 이쪽이 하 강해가는 동안, 저쪽은 마치 어떻게 할까 망설이듯이 움직이지 않았 다. 엘리베이터 안에 있는 것은, 흔히 볼 수 있는 남녀였다. 한쪽은 척 보기에도 내력을 알 수 있었다. 인조모피 옷깃이 달린 다운재킷 안에 교복, 그리고 가는 다리에 감색 랄프라면, 요즘시대 원조교제를 하는 여고생 이외에는 밤 중에 볼 수 있을 리 없는 여 자였다. 그 여자가 촉촉하고 붉은 입술의 미소녀라는 것은 미즈오도 일순 간에 판단할 수 있었다. 그러나 유미카의 시선을 자석처럼 끌어당기고 미즈오의 흥미를 끈 것은 여자 쪽이 아니었다. '여고생과 매춘 아저씨'의 흔히 있는 일……그렇게 보인 것은 한순 간. 열을 올리며 법썩을 떨고 있는 것은 여자 쪽이라는 것을 금새 알 수 있었다. 남자는 자신에게 매달리는 여자의 팔을 잡거나 떼어내지도 않고, 멍하니―그렇게밖에 표현할 수 없는, 어딘가에 혼을 빼놓고 온 것 같은 표정으로……. 아니, 그것도 아니다. 혼도 감정도 그곳에 있었다. 다만 일체의 관심이 없을 뿐……. 여자는 아름답고 젊은 데다 어떻게 봐도 홀딱 빠져서 호소하고 있 는 듯한 모습이었지만, 남자의 냉담한 태도에서는 '그런 건 아무래 도 좋다'는 무드가 역력히 나타나고 있었다. 상대의 얘기를 진지하게 듣고 있는 기척도 없이, 매달리는 눈길을 받아주지도 않는, 안경 속의 남자의 망망한 시선은 허허로운 저편을 헤매고 있는 듯이 보였다. 시간으로 치면 고작 몇초에 불과한 일이었지만, 유미카와 미즈오는 무의식중에 얼굴을 마주 보고 있었다. "……저런 남자가 있으니까 여자의 고생이 끊이지 않는 거야." 황홀한 울림을 품은 달콤한 음성으로 감상을 말한 유미카는, 쓴웃 음을 짓고 코트에 감싸인 살찐 어깨를 으쓱했다. "저런 남자란, 어떤 남자?" 미즈오가 의미를 몰라서 묻자, 유미카는 의미심장하게 고개를 흔들 었다. "선천적인 바람둥이. 여자 사냥꾼이라는 게 있는 법이야." "지금 그 남자가 그래요?" "어디가 어떻다…하고 여자가 설명할 수 있다면 마음 고생할 일이 없지, 미즈오." "나도 그렇게 될 수 있을까?" "말했잖아, 선천적인 거라고. 저런 부류는 어릴 때부터 밥먹듯이 여자를 먹어치운단 말야. 여자도 좋아서 먹히니까, 여자 사냥꾼이라 고 하는 거고." 유미카는 사랑스럽게 부풀려 보이는 미즈오의 뺨을 가볍게 토닥이 고, 정지한 엘리베이터에서 먼저 내렸다. 한창 때보다는 쇠퇴했다 해도 크리스마스 이브가 되면 커플 이벤 트로서 파격적인 스페셜 데이가 펼쳐지는데, 그로인해 호텔 로비는 파티라도 열린 것처럼 혼잡스러웠다. "미즈사와님." 유미카를 발견한 체크인 카운터 안의 호텔맨이 우아한 걸음걸이로 다가왔다. 그리고 손가락을 울려서 도어 보이를 부르고, 열심히 머 리를 조아리며 비위를 맞추기 시작했다. "늘 하던대로 부탁하겠어요." 작은 백에서 장갑을 꺼낸 유미카는 그것을 살짝 손에 끼면서 어깨 너머로 미즈오를 쳐다보았다. "다음에 또 봐, 미즈오." "잘 가요, 유미카상." 농염하게 웃음 짓는 달콤한 향기의 파트로네스를, 미즈오는 손을 흔들며 배웅했다. 고급호텔 로비에서는 역시 미즈오의 차림은 동떨어져 있었지만, 신 경써 봤자 별 수 없는 일이었다. 유미카가 리무진에 올라타고 휭하니 어디론가 사라질 때까지, 미즈 오는 개의 임무를 발휘하듯이 꼼짝않고 서서 지켜보았다. 유미카의 본명이 미즈사와 유미카인지 아닌지, 어떤 집의 부인인 지, 또는 결혼조차 했는지 안 했는지, 미즈오는 전혀 알지 못했다. 유미카와의 사이에 엄연히 존재하는 것은 돈뿐이었다. 그것으로 충 분했다. 산리쿠(*三陸) 출신의 미즈오는 대학 진학을 위해 상경한 이래, 줄 곧 혼자 살고 있다. 집은 가난하지 않았지만 풍족하다고 할 정도도 아니었다. 남자형제 만 셋. 미즈오는 그 중 가운데로 태어났다. 그리고 대학은 다르지만 형도 동경에서 혼자 살고 있는데, 저쪽이 형편이 안 좋고 돈도 더 들기 때문에 미즈오에게까지 돌아올 용돈은 없었다. 하루 세끼 식사를 직접 해 먹고 2년 전의 옷을 입고 생활하면, 보 내주는 적은 돈만으로도 어떻게든 생활할 수 있다. 거기에 성실한 아르바이트 하나만 하면, 더 편할 것이다. 아주 어려울 때는 친구에 게 돈을 빌리는 정도로 끝날 것이 틀림없다. 미즈오는 줄곧 탐을 내다 구입한 더럽게 비싼 고전 모델의 한정 판 시계를 내려다 보고, 로비 한구석에 털썩 앉았다. 누군가를 기다리는 얼굴로 가만히 있기만 해도, 미즈오는 곧바로 주위의 공기에 녹아들어 버린다. 미즈오는 때때로 아무런 위화감도 없이 자신의 존재를 지울 수가 있었다. 만약 실종이 된다고 해도, 시골의 양친과 형제는 물론이고 대학과 거리에서 알게 된 친구들이 미즈오의 부재를 깨닫는 것은, 분명 꽤 많은 날이 흐르고 난 뒤의 일일 것이다. 미즈오는 자신의 존재가 그 만큼 굉장히 희박하다는 자각이 있었다. 미즈오가 돈을 함부로 쓰게 된 것은, 나쁜 친구의 영향이었다. 원 교―원조교제도 그렇다. 사회 문제시 되고 있는 여자애들처럼, 부모의 한달치 월급액을 단 하루에 버는 일도 있고, 하루에 소비하는 적도 있었다. 뭔가를 사는 데에 만엔 단위의 돈을 소비하는 것은, 버는 것과 똑같이 실로 간단 한 일이었다. 물론, 이런 생활이 길게 이어질 리 없다는 것 정도는 미즈오도 잘 알고 있었다. "…자아, 그럼……." 편안한 로비 의자에 우두커니 앉은 채, 미즈오는 어떤 식으로 시간 을 떼울까를 생각하고 있었다. 유미카의 후원도 있었겠다, 다른 여자를 유혹하는 것도 좋을 것이 다. 아니면 받은 용돈으로 술을 마시러 가는 것도 나쁘지 않다. 크리스마스 이브의 밤이라면, 어딘가의 파티에 끼어드는 것도 쉬울 것이다. 여자 동행이 없는 남자는 대개 소홀한 취급을 받지만 이런 밤에는 예외도 있다. 미즈오는 청바지에 감싸인 가는 다리를 바꿔 꼬고, 있을 성 싶은 목표를 구해서 엘리베이터 홀이 있는 쪽으로 시선을 옮겼다. 그나저나, 아까 그 남자―유미카가 '선천적인 여자 사냥꾼'이라고 평한 남자―는 낯이 설지 않았다. 얼굴을 기억하고 있는 것은, 이전에 봤을 때도 똑같은 상황이었기 때문이다. 그때는 대학 구내였고 이쪽은 친구와 함께 있었지만. 그때도 남자는 여자와 실랑이를 벌이고 있는 시끄러운 상황이었다. 게다가 한사람도 아니고 두 여자가 소란을 떨고 있었던 것이다. 아까와 똑같이, 흥분해서 법썩을 떨고 있던 것은 여자 쪽뿐. 남자 자신은 그런 일 따위는 전혀 안중에 없다는 모습이었다. 망연해 있다거나 어쩔 줄 몰라 쩔쩔매는 느낌도 아니었다. 남자는 그 자리에 존재하고 군림하면서도, 전혀 그곳에 없는 방관자 같은 표정을 짓고 그저 우뚝 서 있을 뿐이었다. ―이나다 타키. 경제학과 조교수. '이상한 이름'이라며, 상황이 상황이니 만큼 기억하고 있었다. 대학에서는 가장 유명한 사람이라고 해도 좋은데, 특히 여대생 사 이에서는 나쁜 평판이 자자하기로 이름 높았다. 유부남의 몸으로 태 연히 학생에게 손을 내밀고, 정리도 하지 않은 채 몇 명과 동시에 교제한다는 좋지 못한 평이었다. 여자들은 유부남이라는 사실이 불만스러운 것이 아니다. '복수의 여자와 동시에' 라는 모양이 싫은 것이다. 어딘가에서, 자신감없는 구석을 누군가와 비교당하고 있다는 잠재 적 불안이 있기 때문임이 분명했다. 한편 남학생들에게 이나다 타키는 어떻게 되든 상관없는 존재에 지나지 않았다. 또한 질투의 대상이 될 만큼 화려한 남자도 아니었 다. 생김새와 존재감은 범용하고 오히려 눈에 띄지 않는 담백한 남 자로 보이기 때문에, 소문처럼 위험한 남자라고는 도저히 생각할 수 없는 것이다. 미즈오 역시 학과가 다른 탓도 있어서, 오늘까지 그를 의식한 적은 없었다. 오늘밤에 한번 더 그 남자의 얼굴을 보고 싶다고 생각한 것은 순 수한 충동이었다. 여고생을 크리스마스 이브에 고급 호텔로 끌어들여, 일박에 몇만엔 또는 몇십만엔을 써가며 여태껏 해온 것일까. 유미카의 말에 의하면 '꼬신' 것은 그 남자 쪽이라는 얘기가 되는 데, 도저히 그런 배짱이 있게는 보이지 않았다. 그렇듯 모든 것에 초연한 듯이 담백한 모습을 하고, 진심으로 섹스를 할 작정이었을 까. 여자애가 막판에 불평을 해도 당연할지 모른다. 그 '할 마음 없어 보이는' 태도여서야―. 입술 밖으로 쓴웃음이 흘러나온 순간, 미즈오의 시야 끝에 아까 본 코트 색이 너울거렸다. 내려오기엔 너무 이르다고 생각했지만, 얼굴을 보니 역시 이나다 타키였다. 미즈오는 일어나서 물 속을 헤엄치는 물고기처럼 느릿느릿한 발걸 음으로 다가갔다. "이나다 선생님." "……" 부르는 소리에 주저나 경악도 없이, 타키는 뒤로 돌아 미즈오를 지 그시 쳐다보았다. "누구십니까?" "나, 몰라요?" 타키는 상상하고 있던 것보다도 훨씬 낮은 목소리를 갖고 있었다. 훨씬 더 메마른 음성을 상상하고 있던 미즈오는, 신비하게 달콤하 며 축축한 울림에 순간적으로 넋을 빼앗겼다. 동시에 안경 렌즈 너머의 깊고 투명한 엷은 갈색 눈동자에도 매료 되었다. 가까이에서 보는 이나다 타키는, 투박한 안경을 빼면 선이 가는 인 텔리 그 자체였다. 머리가 아주 좋아 보이며, 섬세하고 우아한 남성 이라는 형용사가 꼭 들어맞았다. 눈높이는 미즈오와 별 차이가 없었는데, 타키의 턱이 아주 약간 위 로 쳐들린 듯이 보이는 걸로 봐서 자신 쪽이 다소 키가 큰 것을 알 정도였다. 입고 있는 옷과 몸에 걸치고 있는 것도, 미즈오와 비하면 싸구려라 고 해도 좋을 만한 것뿐이었다. 가는 선. 겁쟁이를 연상시킬 만큼 미약한 존재감의 어딘가가 기묘 하게 마음에 걸렸다. '이런 남자가 선천적인 여자 사냥꾼인가' 하고, 미즈오는 복잡한 의 문에 고개를 조금 갸웃했다. "누구지?" 미즈오의 어린애 같은 몸짓에, 타키가 속삭이며 작게 미소지었다. 순간, 미즈오의 몸 중심에서 기대가 부풀어 오르더니 바늘로 꿰뚫 린 듯이 파열했다. "날 기다리고 있었나?" 까닭모를 불안으로 뺨을 물들이고 있는 미즈오를 향해, 타키는 미 소를 지으며 말을 계속했다. 그 미소의 의미는 렌즈 너머의 축축한 눈빛으로 알 수 있었다. 눈길을 마주해도 공기처럼 잡히지 않던 남자가, 어째서인지 이쪽에 흥미를 품은 순간에 뚝뚝 흘러 떨어질 만큼 농후한 색향을 풍기기 시작했던 것이다. 무방비하고 순수한, 그러면서도 저항하기 어려운 유혹의 눈빛이었 다. 원래 그렇게 했어야 할 미즈오 자신이 오히려 간단히 집어삼켜 져서 말도 없이 헐떡이고 있었다. "…선생님, 그 여자애는 어떻게 했나요? 호텔방에 두고 왔어요?" 제대로 된 질문이, 가까스로 입술을 비집고 나왔다. "요즘 세상에 대학 교수가 원조교제를 한다고 해도 신문에 실릴 일은 아니지만, 우리 학교는 사립이고…선생님이 걱정되는군요." "날 협박하고 있는 건가?" 놀리는 어조였다. 겁먹은 기색이나 불안은 전혀 느껴지지 않았다. 지금 여기에서 세상이 끝난다고 해도, 필시 웃는 얼굴 하나로 만끽 해 버릴 것처럼 보였다. "그 애는 내 딸이야." "헤에." 그런 얘기는 도저히 믿을 수 없었다. 타키는 어떻게 봐도 30세가 될까말까로 보였다. 원조교제를 할 연 령으로는 너무 젊을지도 모르지만, 고등학교에 다니는 딸이 있게도 보이지 않았다. 훤히 들여다보이는 거짓말에 신경이 거슬린 미즈오는, 허를 찔러서 그를 당황하게 해 주고 싶어졌다. "그렇다면 더욱, 섹스할 결단을 내릴 수 없었을 텐데요." "뭐, 그렇지." 진심으로 받아들이지 않는 미즈오의 태도에도 불구하고, 타키는 끝 까지 주장하려는 기척 없이 웃음을 떠올린 채 끄덕였다. "자네가 대신 상대가 되어 줄 건가?" "내가?" 뜻하지 않은 말에, 그러나 왠지 농담으로 웃어넘길 마음은 되지 않 아서, 미즈오는 뻣뻣한 미소로 반문하고 있었다. "그럴 마음이 전혀 없었다면, 자네는 내게 말을 걸지 않았을 거라 고 생각하는데." 타키의 목소리는 바람결에 실린 씨앗처럼 뚜렷한 의도를 갖고 담 담히 미즈오의 귀 속으로 날아 들어왔다. "전부터 한번 시험해 보고 싶었어. 남자애는 어떨까 하고 말이지. 나는 자신 이외에는 남자의 성(性)을 몰라. 자네도 호기심이 있을 거야, 기대도. …아닌가?" "기대?" 아니라고 잘라 말할 수는 없었다. 하지만 이 노골적인 태도는 무엇 일까? 방금 전까지 여교생과 섹스할 참이었던 남자가, 생각을 고치 고 동성을 유혹하는 일이 있을 수 있을까? 있을 수 있는 일이고 나발이고, 앞에서 눈동자를 빤히 들여다보는 젖은 눈빛은 틀림없이 동성인 자신을 유혹하고 있었다. "자신만만하군요, 선생님." "<타키>." 타키는 유연하게 고개를 흔들고 짧게 명령했다. "나는 이름으로 불리는 게 좋아. 교수님이니 선생님이니, 그런 싸 구려 호칭은 좋아하지 않아." "……함부로 불러도 되? 난 학생이고, 선생님 당신보다 열살 이상 은 연하일 텐데." "옷을 벗고 몸을 섞을 때는, 나는 단순한 남자로 있고 싶어." "짐승이군." 어이없어하는 미즈오의 말에, 타키는 피식 소리내어 웃었다. 웃음과 함께 떠오르는 눈가의 잔주름으로, 역시 그가 훨씬 연상의 남자임을 알 수 있었다. "좋아." 어쨌든, 먼저 말을 건 것은 미즈오 자신이었다. 크리스마스 이브― 성탄 전야에, 좀처럼 체험하기 힘든 짓을 해보는 것도 괜찮을 듯 싶 었다. "방은 있어. 가." "자네 이름은?" 돌아서서 엘리베이터 홀로 향하는 젊고 야윈 뒷모습에, 타키가 즐 겁다는 듯이 물었다. "미즈오." 어깨 너머로 돌아보고 이름을 밝혔다. "<미즈오>." 싱긋 하고 흰 피부에 붉고 긴 홈이 생기나 싶더니, 타키는 농염한 어조로 그 이름을 반복했다. 키스하고 싶다고, 미즈오는 생전 처음 동성에게 욕정을 느끼고 있 는 자신을 깨달았다. ◇◇◇◇◇◇ 난방이 되는 호텔 방 안에 한발 들어선 순간, 타키는 짐승처럼 미즈오를 덮치고 키스를 퍼부었다. 일순이지만, 물려 죽는 게 아닐까 싶을 정도의 기세였다. 목을 잡힌 미즈오는, 연약하게 보였던 타키의 힘에 저항도 하지 못한 채 그대로 벽에 밀어붙여졌다. 항의의 소리를 낼 틈도 주지 않고 그의 입술은 집어삼킬 듯이 격렬하게 혀를 탐해 왔다. 놀라움과 불안은 미즈오의 젊은 육체에 금새 불을 붙였다. 안타깝게 몸을 비틀고 어떻게든 호흡을 하려고 해도, 곧바로 다시 혀를 빼앗기는 짜릿한 관능에 지배당해서 하는대로 맡기게 되어 버렸다. "…아…아…아…." 깨닫고 보니, 미즈오는 저도 모르게 헐떡임을 흘리며 허리를 중심에 대 고 음란하게 흔들기 시작하고 있었다. 마치 소변이 마려워서 참지 못하는 어린애 같은 적나라한 움직임에 타키 가 쓴웃음 짓는 기척을 느끼고, 미즈오는 울컥해서 몸을 밀쳐내려 팔을 뻗고 격렬하게 버텼다. "…샤워하고 싶나?" 타키가 코와 코를 맞부비면서 싱긋 웃고 말했다. 난폭한 키스로 비스듬 히 미끄러져내린 안경이 광기를 나타내는 것 같아, 미즈오는 왠지 모르게 무서워졌다. 무서운데…, 끓어오르는 것은 역시 견딜 수 없는 기대였다. "……필요없어……." 미즈오는 버티고 버티다가 결국은 참지 못해 눈길을 피하고, 거친 숨결 을 어떻게든 가라앉히려 했다. 타키는 미즈오의 떨리는 손가락을 잡고, 마사지를 하는 듯한 손길로 계 속 애무하고 있었다. 그 섬세한 손가락이 팔목을 살짝 문질렀을 뿐인데, 미즈오는 흠칫해서 얼굴을 들었다. "…뭐하고 있는 거야…?" "찾고 있어." "뭘?" "네가 미치는 장소." 말한 직후에는 다시 입술이 키스를 요구하고 있었다. 이번엔 끈적끈적하 게 집요히 휘감고 미즈오의 반응을 구하는 키스였다. 어느새 주도권이 상대에게 넘어가게 되었는지, 미즈오는 생각하려고 했 지만 불가능했다. 뭐가 뭔지 깡그리 알 수 없게 되고 아무래도 좋다고 생각하기까지, 그렇 게 시간은 걸리지 않았다. 이윽고 미즈오는 타키의 몸에 몸을 문지르고 동물처럼 상하로 흔들어대 며 더한 애무를 구하게까지 되었다. 타키는 섬세했지만, 동시에 잔혹하고 용서가 없었다. 웃음을 떠올린 채 사람을 잡아찢을 수 있는 남자였다. 분명 여자라면 견딜 수 없을 것이다. 몸소 알 수 있었다. "…더, 더, 아아…!" 떨어져가는 입술에 다가가려다가 엷은 웃음과 함께 거부당한 미즈오는, 머리가 이상해질 것 같았다. 방에 들어오자마자, 다운라이트에 비춰진 좁고 어둠침침한 장소에서 미 즈오는 스스로 청바지를 벗고 마음에 들어하던 셔츠와 양말까지 마구 벗 어던지고 전라가 되었다. "……빨리……." "착하기도 하지. 예쁘구나, 미즈오." 방에 들어온 직후 보였던 짐승 같은 욕망을 깨끗이 지운 타키는, 안경을 벗어 가방을 장 위에 두자 여유를 풍기고 기쁜 듯이 웃으며 코트를 벗었 다. "……" 그가 천천히 방 안을 가로질러 옷장 안에 상의를 거는 모습을 집어삼킬 듯한 시선으로 바라보고 있던 미즈오는, 한기를 느끼고서야 지금의 자신 이 얼마나 바보처럼 꼴사나운 모습을 하고 있는지 자각했다. 미즈오는 등을 돌리고, 뜨겁게 달아오른 몸을 무시하며 아무것도 아니라 는 듯 위장하고 머리를 긁적였다. "……키스가 능숙해." 그렇게 말할 작정이었는데, 혀가 풀려 제대로 말할 수 없었다. "타키……." 어쨌든 뭔가 이쪽의 페이스로 돌이킬 말을 하고 싶어서 입을 열고 돌아 보려던 미즈오는, 다음 순간 허리를 붙잡혀 침대로 밀려 쓰러졌다. "타…타키……읏?" "후후후." 미즈오는 놀라서 눈을 둥그렇게 뜬 채, 자신의 어깨에 얼굴을 밀어붙인 남자를 바라보았다. 그는 어린애처럼 웃고 있었다. 맨살에 닿는 뽀송뽀송한 침대 커버 감촉이 서늘한 가운데, 몸을 밀어붙 여오는 남자의 드러난 살갗만이 타오르듯이 뜨거웠다. "저쪽 침대에서 섹스 했나?" "……그래." "어떤 식으로?" 타키는 질투 따위와는 전혀 연이 없는 무구한 웃음을 지으며 미즈오에게 가볍게 입맞췄다. 가까이에서 미소를 떠올린 채로 몇번이고 몇번이고, 질리지도 않고. "…더, 더……더……." 그러는 동안에 미즈오는 다시 정신없이 빠져들어 갔다. 타키의 입맞춤은, 서투른 미즈오의 미숙한 경험 레벨로는 상상도 할 수 없을 만큼 능수능란한 것이었다. 가슴을 쥐어뜯기는 듯한 애틋함은, 어딘 가 첫 키스 때와 비슷한 아픔을 띠고 있었다. 타키의 알몸은 옷 위로는 몰랐던 탄탄한 근육으로 감싸여 있었고, 빈약 함은 전혀 찾아볼 수가 없었다. 그에 비해 미즈오는, 그저 키만 훌쩍 성장 한 털없는 초식동물과 같았다. 몸을 지킬 갑옷도 없는 얇은 가죽 아래로 흐르는 피는, 뜨겁게 솟구쳐 터질 순간을 갈망하고 있었다. 부드럽고 유연한 감촉의 살갗이었다. 벌거벗었다고 의식한 것만으로도 얼굴을 붉히게 만드는, 생생한 남자의 육체였다. 타키는 사나운 욕망을 감추려고도 들지 않았고, 미즈오도 쉽게 발기했다. 아까까지는 멋지다고 느끼고 있던 유미카의 시들어가는 육체 따위, 성적 경험에 얽힌 기억 속에서 깨끗이 날려가 버렸다. 손을 뻗어보고, 침대 옆의 엷은 조명 아래에서 그의 허벅지 안쪽 근육이 팽팽히 긴장되어 있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딱딱한 요골(腰骨) 라인. 무심결에 쓸어내리며 그 감촉을 즐기고 있는 미 즈오는, 동성인 타키의 육체에 달콤하게 빠져드는 쾌락을 느끼고 있었다. "미즈오." 숨결을 겹치고 맞닿는 입술이 달콤하게 속삭였다. "미즈오, 끝내 봐. 내 배 위에 쏟아내 봐." "…아아…읏!" 말과 함께 탄탄한 배로 문질러대는 타키에게, 미즈오는 애틋한 소리를 내질렀다. "괜찮아, 해도 되." "안돼, 안돼. 안돼…아…으…아아……읏!" 고개를 흔드는 미즈오의 귀를, 타키는 잘근잘근 깨물며 핥고 빨았다. 그 혀의 감촉이 관능적인 환희를 세차게 불러일으켰다. "나만…나만…싫어…!" "괜찮으니까 쏟아 봐. 봐줄 테니까, 자네 얼굴을. 가장 황홀할 때의 얼굴 을 봐줄 테니까, 사정해 봐. 자, 어서, 미즈오." 미즈오의 목덜미에 달라붙은 타키의 혀가, 끈적하게 빨며 쓸어올렸다. 순간의 떨림은 사정의 징후였다. 순식간에 둑을 무너뜨리고 정액이 뿜어 져 나왔다. "아…앗!" 미즈오는 뒤로 젖혀지는 자신의 머리를 타키가 두 손으로 붙잡은 채 진 지한 표정으로 내려다보고 있는 것을 올려다보면서 힘껏 사정했다. 뿜어져 나가는 것이 타키의 배를 더럽히고 자신의 배에도 튀어 흐르는 것이 느껴졌다. "기분 좋아? 느꼈어?" "………." 음란하게 물어오는 타키의 질문에, 움찔움찔 가늘고 크게 떨면서 미즈오 는 깊이 끄덕임으로 성실하게 답했다. 상대가 동성이라는 희미한 혐오는, 상반하는 자극으로서는 극상의 것이 되었다. 남자의 탄탄한 배에 문질러지는 감촉은, 스스로 생각했던 것보다 도 훨씬 더 참을 수 없는 쾌감을 낳았다. 흥분의 정점에 이른 미즈오의 성기로, 타키가 천천히 손을 뻗었다. 고동 에 맞춰서 뿜어져 나오는 점액을 손가락으로 정중히 걷어가는 감촉이 전 해졌다. 뭘 할 작정인지 상상이 갔기 때문에, 미즈오는 떨리는 손가락을 뻗어 침 대 옆을 더듬었다. "저어…, 내…뒤를 쓸 거지?" "그래." "…경험 없어." "나도 남자애는 처음이다." 얼굴만 봐서는 상상도 되지 않지만, 이 남자라면 왠만한 일은 거의 모두 해 왔을 거라고 생각했었다. 이렇듯 동성을 상대로도 태연히 발기할 수 있는 남자다. 애널 섹스 따위, 금기도 뭣도 아닐 것이다. 호기심에 진 미즈오는, 유미카와의 행위에 썼던 젤 튜브를 타키의 눈 앞 에 들이댔다. "자네는 스마트한 섹스가 좋나?" "……제대로 다 따질 거냐고?" 미즈오가 되묻자, 정액이 묻은 손가락으로 튜브를 받아들고 타키는 하얀 이로 뚜껑을 열었다. "여자는 준비와 절차를 중요시 하잖아? 당신은 달라, 타키?" "나한테는 필요 없어." 타키는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튜브를 아무렇게나 짜냈다. 미끌거리는 액체는 땀이 맺힌 미즈오의 가슴팍을 뒤덮자, 미지근하고 젖 은 감촉을 띠며 정액과 뒤섞여 천천히 퍼져갔다. "곧 어떤 의미인지 알게 될 거야, 미즈오." "……남자애는 처음이라고 했잖아?" 미즈오의 허세와도 같은 말에, 타키는 웃었다. 조소가 아니라 어디까지나 자신감에서 우러나온 웃음이었다. --그리고 30분 뒤. 미즈오는 무아지경으로 정신없이 흐느껴 울고 때로는 날카로운 목소리로 호소하면서, 타키의 자신감의 실체를 뼈저리게 실감하는 꼴이 되었다. 감각이 둔하게 마비될 때까지 뿜어낸 체액으로 범벅이 된 미즈오의 몸 은, 쾌감에 꿈틀거리는 단순한 물체가 되어 있었다. 기분나쁜 젤 얼룩이 스며든 시트에 뺨을 문지르고 눈물이 배어나온 눈 으로 잔혹한 남자의 움직임을 쫓아가며, 입맞춤이 주어지는 순간마다 필 사적으로 애원했다. 어떻게든 해 줘--하고. 타키는 잠시도 쉬는 일이 없었으며 간격을 두지 않았다. 전혀 지칠 줄을 모르고 미즈오의 몸을 언제까지나 애무하며 사정을 재촉했다. 그 동안 타키는 한번도 사정을 하지 않은 채, 발기한 뜨거운 성기를 미 즈오의 몸에 문지르며 그저 음란한 움직임으로 관능을 자극할 뿐이었다. 미즈오의 항문은 정액과 체액으로 젖어서, 어느샌가 삽입된 타키의 손가 락 움직임에 따라 점차로 넓게 벌어지기 시작하고 있었다. 충분히 길들여지길 기다린 타키는 초조해하는 일 없이 미즈오의 귓가에 음란한 말을 늘어놓으며, 관능으로 떠는 젊은 육체 속에 뜨겁게 맥박치는 성기를 천천히 삽입했다. 미즈오는 처음 느끼는 감각에 비명 같은 소리를 질렀지만, 이윽고 흐느 껴 울며 관능적으로 헐떡이기 시작했다. 타키의 흥분이 고조되고 숨결이 거칠어지는 것을 그의 몸 아래에서 느끼 고, 미즈오는 함께 떨며 눈물로 젖은 눈을 떴다. "…저어……타키. 당신도…당신도…좋아? 좋아……?" "아아. …좋아……." 타키는 잔혹한 웃음을 젖은 입술에 떠올리고, 안경을 걸치지 않은 눈을 가늘게 좁혀 뜨며 대답했다. 결코 서두르지 않는 그의 율동은 어디까지나 느긋하고 여유롭게 계속되 었다. 떨어져 있는 가슴에서 땀방울이 빛나고, 자기 입으로 그렇게 말했듯이 타키는 기분 좋은 표정으로 허리를 흔들고 있었다. 미즈오도 긴장을 푼 편안한 기분으로, 항문에 삽입된 성기로 인한 쾌감 을 쫓았다. 달콤한 통증. 그런 것이 분명 몸 속에 있었다. 그 아픔은 확실하게 쾌감으로 이어졌고, 쾌감은 격렬한 폭발을 원하며 기대한 그대로의 고지를 향해 달려올라갔다. "미즈오……미즈오." 정신없이 허리를 움직이며 미즈오의 의식을 앗아가는 타키의 목소리가 뜨겁고 부드럽게 귓전에서 속삭였다. "내 '그때'의 얼굴을 보여줄게." "……타키……." 이마에 땀방울이 맺힌 채 여전히 미소를 떠올리고 있는 남자의 여유를 얄밉게 혐오하면서도, 미즈오는 유연하고 음란한 타키의 허리를 두 다리 로 휘감고 놓을 수가 없었다. '용케 이렇듯 난잡하게 움직일 수 있구나' 하고 감탄할 만큼, 타키의 허 리는 음란하게 꿈틀거렸다. 참을 수 없었다. "좋아……, 타키. …아아…읏…, 좋아…." "아아……네 몸……멋져…." 타키는 미즈오의 어디가 어떤 식으로 멋진가 하는 것을, 부끄러워하는 빛도 없이 입 밖에 냈다. 이윽고 그의 허리가 매끄럽고 단조로운 움직임 을 시작하더니 율동도 피치를 올렸다. "…아…아, 아아……읏!" 미간을 찡그리고 헐떡인 타키는, 미즈오가 바라보는 앞에서 턱을 뒤로 젖혔다가 다시 가슴께로 끌어당겼다. 간헐적인 경련이 미즈오에게도 전해 져, 끝내 참지 못하고 뒤따라 사정했다. 고개를 크게 한번 흔든 타키는 이를 악물고 낮게 신음을 흘리자, 두 손 으로 고정한 미즈오의 엉덩이 사이에 정액을 세차게 쏟아냈다. 미즈오는 목을 움직여 산소를 빨아들이고, 울음소리를 냈다. 고통과 쾌감, 그리고 몸 속에 역류하는 뜨겁고 진한 점액의 감촉으로 전 율이 일었다. 도저히 견딜 수 있을 것 같지 않았다. "앗…아아아……읏!" 드높은 소리가 목을 찢고 터져나가는 순간, 미즈오는 생전 처음으로 계 속해서 연이어 한번 더 사정하고 있었다. 새벽녘 가까이, 복통을 느낀 미즈오는 무겁고 노곤한 잠에서 깨어났다. 곁에는 전라의 타키가 숨소리도 내지 않고 엎드려 자고 있었다. 미즈오가 침대에서 제대로 일어나지 못해 굴러 떨어지며 낸 소리에도, 타키는 꿈쩍하지 않고 깰 줄을 몰랐다. 기다싶이 해서 화장실에 가는 도중, 미즈오의 항문에서 타키가 사정한 정액이 주르르 흘러내렸다. 무섭도록 불쾌한 감각이었다. 미즈오는 의자 등에 걸쳐져 있던 수건으로 엉덩이를 닦았다. 그것이 유 미카의 머리를 말린 수건임을 아이러니한 기분으로 멍하니 생각하면서 싸 늘한 한기에 재채기를 했다. 그래도 타키는 눈을 뜰 기척이 없었다. 더러워진 수건에 스미는 점액의 감촉에, 그것도 당연할 거라고 미즈오는 생각했다. 몇번을 안에 쏟아냈는지 기억나지 않았다. 도중에 의식이 날아갔다가 되 돌아왔을 때도, 여전히 타키는 미즈오의 허리를 안고 삽입한 채 움직이고 있었다. 기분 좋고 자시고……, 도중에 뭐가 뭔지 모르게 되었다. 다만 기억나는 것은, 타키가 한창 행위중에 여자의 지구력과 비교해서 미즈오의 무기력함을 비웃었을 때, 『도저히 함께 어울려 줄 수 없는 음 란한 짐승같은 놈』이라고 토해내듯이 말해줄 때까지는 의식이 있었다는 것. 그 뒤에 눈물도 나오지 않게 될 만큼 혹독하게 시달렸지만, 그것조차 시종 어떤 식이었는지 떠오르지 않았다. 복통 때문이라고는 해도, 밤이 새기 전에 잠을 깬 것은 기적에 가까운 일이었다. 희뿌연 빛 속에서 변기에 걸터앉아, 죽도록 쏟아넣어진 정액을 변과 함 께 배설했다. 몇번이나 물을 내리고 있는 동안에, 식은 땀이 흐르고 졸음이 몰려왔다. 어쩌면 잠시 변기에 앉은 채 졸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워시렛을 쓸 때는 심경이 복잡했지만, 어제까지와 아무것도 달라진 게 없었다. 아픔도 없고, 기쁨도 없다. 그런 '무지막지'한 남자와 잤는데 인생은 아무것도 변한 것이 없었다. 미즈오는 둔한 통증 탓에 휘어지는 허리를 펴고 부자연스러운 자세로 손 을 씻은 뒤 내친김에 끈적이는 얼굴도 물로 닦았다. 거울 속. 생전 처음 남자에게 안긴 얼굴은 어떨까 하고 들여다보니, 졸려 보이는 어린 얼굴이 있을 뿐이었다. 더 음란한--남자와 잘 만한 여자냄새 나는--분위기라도 풍기게 되지 않 았나 싶었는데…. 희미하게 가슴을 찌르고 있던 죄의식 비슷한 후회는 사방으로 흩어져 사 라졌다. 아무도 모른다. 그 누구도 알지 못할 것이다. 크리스마스 이브에 남자와 잤어도…성도 제대로 모르는 파트로네스와 잤어도, 변한 것은 아무것도 없다. 그렇게 생각하니, 뱃속과 똑같이 마음도 후련해졌다. 방에 돌아간 미즈오는 유미카와 섹스를 했던 차가운 침대가 아니라, 타 키가 드러누워 있는 더럽혀졌지만 따스한 침대로 다시 들어갔다. 머리 방향을 바꿔, 타키의 하반신을 끌어안는 자세로 누워 몸을 둥글게 말았다. 만약 누군가가 이 방에 들어오면, 전라의 남자 둘이 식스 나인이라도 하 고 있나 생각할 것임에 틀림없다. 상상하자 우스웠다. 타키의 다리는 발끝까지 우아하고 아름다워서, 왠지 모르게 손질해 주고 싶은 마음이 들게 만들었다. 대학에서 몇이나 되는 여자가 그를 두고 싸 웠듯이 얼마나 많은 여자가 지금의 자신과 똑같은 기분을 맛보았을까 생 각하니, 아주 조금이지만 가슴이 아파왔다. 여자처럼 색소가 옅은 정강이 털에 얼굴을 대도, 싫은 냄새는 나지 않았 다. 체취가 엷다. 전부 엷은 남자다. 존재감도 담백하고, 섹스 말고는 정말로 아무 흥미도 없는 게 아닐까 의 문을 품게 하는 남자. 불가사의하고 알 수 없는 짐승.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누군가 알고 있는 사람이 있을까? 이 남자 자 신은 알고 있는 걸까? 생각하고 있는 사이에 다시 잠 속으로 빠져들어갔다. 꿈도 꾸지 않는, 깊은 수렁 같은 잠이었다. 눈을 뜬 미즈오는 이미 높이 솟은 태양 아래 비춰지고 있는 만엔짜리 지 폐를 몇장 발견했다. 자기 몸을 감싸는 것들에는 신경도 쓰지 않는 주제에 절정감을 느낀 섹 스에는 큰 돈을 내나 싶자, 왠지 모르게 그 남자답다는 생각에 웃음이 새 어나왔다. 대학의 조교수에게 몸을 판 것 따위, 전혀 이상하게 느껴지지 않았다. 그 저 벌거벗은 타키가 어떤 식으로 잠이 깨서 혼자 옷을 차려입고 준비를 했는지, 깨어서 지켜보고 싶었다는 생각뿐. 단순히 섹스를 했을 뿐인데, 그 남자가 유미카보다 훨씬 더 뜨거운 감정 으로 자신을 필요로 하고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한쪽 무릎을 끌어안고 만엔짜리 지페를 바라보면서, 미즈오는 자신을 덮 쳤던 쾌감을 떠올렸다. 그 쾌감을 불러일으킨 타키의 너무나도 광폭한 행 위를 생각했다. 나쁘지 않았다. 나쁘지 않았지만----. 미즈오는 생각을 그만두고, 프론트에 전화를 해서 하루 더 묵을 것을 알 렸다. 그리고 나서 샤워를 하고, 체취가 엷은 타키의 희미한 잔향에 감싸여 한 번 더 잠을 청했다. ◇◇◇ 2 성 <섹스> ◇◇◇ 길고 긴 겨울방학을 끼고, 크리스마스로부터 한달이 눈깜짝할 새에 지나 가버렸다. 미즈오의 호주머니 안에는 타키에게서 받은 만엔은 당연히 남아있지 않 았다. 성탄 전야에 그랬듯이, 아무일도 없었던 것처럼 매일이 흘러갈 뿐이었다. <그날>이 오기 전까지――. 교외에 위치한 사립 I 대학의 구내는, 아는 사이라 해도 약속 시간과 장 소를 따로 정하지 않으면 마주칠 일이 거의 없을 정도로 굉장히 넓었다. 때문에 학부도 다르고 약속을 하지도 않은 상대와는, 방학이 끝난 뒤로 한번도 만나지 않았다. "어떻게 할래?" "어쩔까." "아까부터 그 말뿐이잖아." 미즈오는 내키지 않는 듯한 응수를 하면서, 친구 요코카와와 함께 교문 을 향해 걷고 있었다. 막연한 기분이 연말부터 줄곧 감정의 고양을 가로막듯이 침투해 있는 상 황이었다. 뭔가를 할 마음도 일지 않았고, 기껏 뭘 시작해도 될대로 되라는 기분이 들고 마는 것이다. 얼마 안 있으면 2월 14일. 발렌타인 데이를 위해서 여자애에 대한 어프 로치를 해두고 싶다며 요코카와는 진지하게 컴퍼 기획을 짜고 있었지만, 미즈오는 도저히 기분이 나지 않았다. 미즈오가 원조교제로 돈을 벌고 있는 것은, 요코카와를 비롯한 최근에 사귄 친구들은 모르고 있었다. 정작 원조교제를 해보라며 미즈오를 꾀어냈던 나쁜 친구는 대학에 거의 오지 않게 되어, 구내에서는 물론이고 강의실에서도 얼굴을 볼 수 없었다. 연상의 파트로네스에게 '용돈'을 받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되면, 역시 떨어 져갈 친구 쪽이 많을 것이다. 윤리적인 문제보다도, 오히려 쉽게 돈을 벌 고 금전적으로 풍부한 생활을 보낼 수 있는 동갑내기 친구에 대한 질투 때문에 무리에서 소외될 것은 알고 있었다. 몸에 걸치고 있는 것을 비롯해서 식사 때에 내는 상한액까지, 미즈오는 이미 평범한 학생의 표준을 가볍게 넘어서고 있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시 끄러운 잔소리를 듣는 것도, 일부러 설명해 주는 것도 성가셨다. 모든 것이 정말 아무래도 좋다는 기분만이 지금 미즈오의 본심이었다. "뭐야?" 터덜터덜 걸으면서 교문으로 향하던 미즈오들 앞에, 작은 사람들의 무리 가 만들어져 있었다. 그리고 중심에서 여자의 금속성 고함 소리가 들려왔 다. "재밌겠는데." 구경꾼 근성이 발달된 요코카와가 미즈오의 어깨를 두드리고 사람들 무 리를 향해 다가갔다. 다른 사람들도 하나둘 모여들기 시작하고 있었다. 도심에 있는 대학과 달리, 크든 작든 소란 같은 것은 왠만해서 일어나지 않는 곳이다. 구경거리에 대한 흥미도 발달할 만한 것이다. 미즈오는 한숨을 내쉬며, 요코카와를 두고 가 버릴까 하다가 문득 다시 생각하고 자신도 무리에 다가갔다. "잠깐, 그만두세요! 꼴 사나워!" "어느 쪽이 꼴 사나운데! 당신이야말로 어딘가로 가 버리세요!" "무슨 소리를 하는 거야! 이쪽이 선약이라구! 도리에 어긋나잖아!" 한가한 오후에 꺄아꺄아 울리는 여자들의 목소리는, 비명처럼 공기를 가 르며 필요 이상으로 주위의 호기심을 불러 일으키고 있었다. "두 사람 다 그만해. 이제 됐잖아……!" "그럼 당신은 사라지세요." "맞아! 당신처럼 촌스런 여자 따위, 타키가 제대로 상대할 거라고 생각하 는 거야?" "너무해……!" '우왕∼' 하며 한여자가 소리내어 울음을 터뜨렸다. 대화 속에 등장한 이름에 왠지 모르게 '역시'라는 기분이 치솟아, 지루해 하던 미즈오의 입술에 웃음이 떠올랐다. "그렇게 울고만 있으려면 비켜! 당신 방해된단 말야!" "싫어…! 싫어!" 미즈오가 군중을 헤치고 앞쪽으로 나가 보니, 사무동 앞의 화단을 배경 으로 세 여자와 한 남자가 웃지 못할 희극을 격렬하게 공연하고 있었다. "선생님은 날 좋아한다고 말해줬단 말야!" "타키는 여자라면 암캐한테도 그렇게 말해!" "거짓말이야!" 가장 흥분해 있는 여자는 눈물을 흘리면서 남자에게 매달려 있었다. 팔 을 붙잡고 매미처럼 필사적으로 울고 있는 모습은 애처롭다기보다 꼴사나 워 보여, 구경꾼들의 입에서 실소를 자아냈다. ――그건 그렇고, 세 여자는 하나같이 모두 나름대로 아름다웠다. "저거, 작년에 다른 대학의 미스 컨테스트에 몰래 나가서 준미스까지 뽑 혔던 사토시마다." 요코카와가 다가온 미즈오를 보고 귓속말로 설명하며 가리킨 것은 요란 한 '화장 미인'으로, 이 추운 날씨에 넓적다리가 반쯤 드러난 미니스커트를 입고 있었다. "저쪽은 불문과의 하네카 여사다." 또 한 사람―큰 소리로 우는 여자의 팔을 잡고 남자에게서 떼어내려 하 고 있는 팬츠수트에 숏커트 미인―도, 추위 따위와 무관하게 뺨을 물들이 고 흥분해 있었다. "저 울고 있는 여자는 모르겠는데." "하네카의 친구라는 여자야." 얼굴도 모르는 구경꾼이 등뒤에서 가르쳐줬다. "이나다도 제법이야. 이걸로 벌써 몇번째의 소동이지?" "이젠 별로 놀라지도 않게 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