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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닐라 클럽'
밍키넷 0 5,455 2023.08.21 13:47
'바닐라 클럽'  


1장 

5월 3일. 내 생일이며, 회사에 사표를 내던진 날이었다. 동시에 무료함에 지친 운명이 내 멱살을 와락 
거머진 날이었다. 물론 그때는 이 사실을 몰랐다. 그날 아침, 동료들보다 일찍 나와 실장의 책상에 사표
를 곱게 올려 놓고 도망치듯 사무실을 빠져 나가는 동안 내내, 종종 꿈꾸 어 온대로 기세 좋게 실장의 
얼굴에 사표를 던지지 못했나 후회하고 있었다.
실장 곽 재원. 곽 실장은 뉴욕에서 나고 자라 대학원까지 마친 후 워너 브러더스 사 광고담당으로 근무
하다 특채 된 케이스로 서른 둘에 기획실장 자리를 꿰어 차고 앉았다. 곽 실장은 미국 물을 먹었다면서
도 회사가 원하는 일이라면 무엇이든 할 준비가 되어 있었다. 그런 곽 실장 앞에서는 사생활이 용납되지 
않았다. 곽 실장은 명쾌한 논리와 화려한 화술로 직원들을 꼼짝 못하게도 했을 뿐 아니라 입을 다물고 
있을 때도 슬슬 눈치를 보게 만드는 카리스마를 가지고 있었다.
그뿐만 아니었다. 곽 실장은 누가 봐도 눈이 휘둥그레질만한 미모와 탄탄한 아랫배와 쭉 빠진 다리를 가
진데다가 나보다 키가 컸다. 당신이라도 곽 실장 앞에 서면 주눅이 들 게 분명하다. 나는 엘리베이터로 
가던 걸음을 멈춰 화장실로 꺽어 들어갔다. 그냥 이대로 가는 건 억울하다는 생각이 내 발길을 돌려 놓
았다. 나는 티 하나 없이 닦여진 거울 앞에 서서 노트북 가방을 매고 있는 나를 들여다 보았다. 거리에
서 만나는 그렇고 그런 넥타이 부대원의 모습은 아니지만 그래도 곽 실장에 비하면 초라하기 짝이 없는 
몰골이었다. 
솔직히 나는 키가 작은 편이 아니다. 평균 이상이다. 곽 실장, 아니다. 사표를 던졌으니 곽 재원이라고 
부르는 게 좋겠다. 페미 니스트들은 곽 재원이 여자기 때문에 내가 자격지심에서 사표를 내던졌다고 생
각할 가능성이 높다. 오해는 마라. 나는 성에 차별을 두지 않는 사람이다. 곽 재원 앞에만 서면 내가 쪼
그라든다는 느낌이 정말로 나를 미치게 하였 다. 곽 재원은 내가 꿈꾸어 온 완벽한 사람이었다. 나는 한 
번도 완벽해 본 적이 없었다. 세상에 완벽한 사람이 어디 있겠는가? 그러나 완벽해 보이는 사람은 간혹 
있다. 곽 재원 이 그런 부류의 사람이다. 사무실로 또각또각 걸어와 턱을 약간 쳐든 채 나를 내리깔 듯 
쳐다본 곽 재원의 출근 첫 날 이후로 곽 재원은 내 모든 스트레스 의 진원지가 되고 말았다. 
곽 재원을 비난할 뜻은 없다. 나만 특별히 못살게 군 적이 없음을 하늘에 두고 맹세할 수도 있다. 곽 재
원이 존재한다는 사실, 그 자체만으로 나는 가시밭길을 걷듯 고통스러웠다. 몇 번이나 혼자 술을 마시면
서 곽 재원은 완벽하지 않다를 외쳐도 보았지만 그건 내 희망 사항일 뿐이었다. 곽 재원은 한 치의 실수
도 없었다. 
[곽 재원은 사람이 아닙니다.] 
[무슨 소리에요. 알고보면 모두 거기서 거기라구요.] 
아나이스가 그렇게 나를 위로해 주었다. 나는 노트북 자판을 두드렸다. 
[곽 재원을 보면 그렇게 말 못할 걸요?] 
식어 버린 커피를 마시려고 커피잔으로 손을 뻗던 내 눈에 아나이스의 대답이 들어왔다. 
[병이로군요.] 
절로 콧방귀가 뀌어졌다. 커피를 한모금 마신 후에 자판을 두드렸다. 
[완벽주의자가 되겠다는 게 병이라면 세상에 병 아닌 게 어딨습니까?]
[......] 
아나이스는 마침표를 정확하게 여섯 개를 찍었다. 내가 막 자판 위에 얹어 두었던 손가락을 움직이려는
데 아나이스가 글자를 보 내왔다. 
[그래서 결국 그냥 엘리베이터를 타고 회사에서 나와 버렸단 말이네요. 처량한 최후네요.] 
나는 무서운 속도로 자판을 두드렸다.
[무슨 소립니까? 화장실 휴지통에 일회용 컵이 있더란 말입니다. 거기에다가 똥을 싸서 곽 재원의 책상 
위에 턱 하니 올려 놓고 왔습니다.] 
물론 내 말은 뻥이었다. 사실 나는 거울만 쳐다보다 화장실을 빠져 나왔다. 동료들과 마주치지 않으려고 
엘리베이터 대신 비상 계단을 이용했다. 
[후후.] 
아나이스의 반응은 의외였다. 내 손놀림은 더 빨라졌다. 
[후후라뇨? 내가 없는 말을 지어냈단 말입니까?] 
[그럴 수도 있고, 그렇지 않을 수도 있겠지요. 그게 중요한 사건인가요? 어쨌든 당신처럼 재미있는 사람
을 만나게 돼서 반갑네 요. 다음에 봐요.] 
아나이스는 순식간에 대화방을 빠져나가 버렸다. 봄꽃들로 둘러싸인 종각이 보이는 사이버 카페 구석에 
앉아 있던 나는 다시 외 톨이 신세가 되었다. 나는 아나이스에게 아무 것도 물어본 것이 없었다. 아나이
스의 질문에 대답만 했다. 왜 이런 시간에 통신을 하고 있느냐는 질문 에 사표를 내던지고 나온 길이라
는 말을 꺼냈다가 그만 흥분해서 내 얘기만 하다 말았다. 그래도 주거니 받거니 하면서 끊이지 않고 얘
기를 했는데... 인연이 없나보다, 라고 그때는 생각했다. 하루에 똑같은 사람을 그것도 우연히 피씨 통
신 대화방에서 만나기란 여간 힘든 일이 아니었다. 나는 아나이스를 불러낼 작정으로 궁상을 떨었다. 내
가 있던 곳은 홍대 근처 사이버 카페였고, 날씨는 죽여줬다.
[그럼 친구를 불러요. 시간도 많잖아요?] 
그 말에 김이 팍 빠졌다. 그 말을 듣고 시계를 보니 4시 25분이 되어가고 있었다. 누구 불러낼 만한 사
람이 있나 잠깐 머리를 굴렸다. 그러나 시간 낭비만 하고 말았다. 
[이런 기분으로 만나봤자 술만 퍼마시게 될테고... 차라리 이렇게 얘기나 하는 게 좋겠습니다.] 
[미안하네요. 전 시간이 별로 없어서요...] 
나는 아나이스가 또 작별 인사할 틈도 주지 않고 사라질까봐 재빨리 손가락을 놀렸다. [여긴 자주 오세
요? 대화방 말입니다. 자주 못보던 아이디라서요.] 
그 질문에 아마도 아나이스는 피식 웃었을 것이다.
[여기 터줏대감이신가 보네요. 저는요, 사람을 찾고 있거든요. 하이텔, 천리안, 나우누리, 유니텔, 인터
넷 할 것 없이 다 돌아 다녀요.] 
아나이스가 빠져나갈 틈을 주지 않으려고 더 빨리 자판을 쳤다. 
[대단하시네요. 근데 누굴 찾으십니까?] 
[이제 호김심이 발동하는 모양이지요? 어떤 때는 호기심은 위험하기도 하죠. 농담이 아니에요. 사실 저
도 제가 찾는 사람을 아 직 몰라요.] 
나는 고개를 갸웃뚱거렸다. 도대체 아나이스가 무슨 말을 하고 있는 건지 감이 잡히지 않았다. 
[다음에 또 만날 수 있겠죠? 전 어디에서나 아나이스에요.] 
[잠깐만요!] 
그러나 나는 또 아나이스를 놓치고 말았다. 아나이스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대화방을 빠져 나가 버렸다. 
 

2장 정확하게 7시에 텔레비전이 켜졌다. 7시 뉴스 시그널이 내 고막을 찢을 듯 때렸다. [제기랄.] 
습관적으로 머리맡을 더듬어 리모콘을 찾았다. 밤 4시까지 채팅을 하다 잠들어 좀체 눈이 떠지질 않았
다.
[이러다 지각하는 거 아냐.] 
리모콘의 서늘한 느낌이 손 끝에 닿는 순간, 나는 눈을 번쩍 떴다. 
[참, 사표를 냈지.] 
나는 실없이 실실 웃으며 리모콘을 텔레비전 쪽으로 향했다. 전원 단추를 누르자 텔레비전은 텅하는 소
리를 낮게 내며 꺼졌다. 마치 서부의 총잡이처럼 리모콘 끝을 후 불고는 리모콘을 한 손으로 빙글빙글 
돌리며 자리에 일어나 앉았다. 잠? 머리가 뻐근하고 눈이 시렸지만 더 자고 싶은 생각은 없었다. 언제든 
마음 내킬 때 자면 되는데 무슨 잠이 오겠나. 나는 허물을 벗는 뱀처럼 아주 천천히 침대를 빠져 나와 
컴퓨터로 가 전원 스위치를 꾹 눌렀다. 위잉 소리를 내며 글자들을 뱉 아내는 컴퓨터를 뒤로 하고 씽크
대로 갔다. 
나는 서울 변두리 동네 중에서도 지대가 가장 높은 동네에 있는 원룸형 아파트에 살았다. 오르락내리락
하기가 힘들긴 하지만 내 돈으로 마련한 보금자리인데다가 공기도 맑고 창 가에 서면 관악산과 동네 전
체가 한 눈에 들어오기까지 했다. 주전자 뚜껑이 호루라기 소리를 내서 얼른 달려갔다. 코 끝으로 풍겨
오는 구수한 커피향은 한바탕 출근 전쟁을 치룬 후 회사 자 판기에서 빼 마시는 커피향과 비길 게 아니
었다. 머그 잔을 두 손으로 감싼 채 컴퓨터 앞에 가 앉았다. 마우스를 끌어당겨 전자 메일을 확인하려고 
통신 프로그램을 클릭했다. 천리안부터 하이텔, 나우누리까지 빙 둘러보는 이 일은 회사에 다닐 때도 출
근하자마자 하는 일이었다. 천리안으로 들어가자마자 편지 한 통이 도착해 있다는 메시지가 나를 반겼
다. 지난 새벽에 대화방에서 만난 누군가에게서 온 편 지겠거니 생각하며 편지 읽기로 들어갔다. 아나이
스가 새벽 2시 경에 보낸 걸로 되어 있었다.
[아나이스?]
내 머리를 의심하지는 마라. 나는 지난 새벽에만도 대화방에서 8명을 만났다. 낮에는 12명 정도를 만났
다. 혹은 더 많을지도 모 르겠다. 특히 천리안에서는 대화방에 들어오는 사람들 대부분이 자기 아이디와 
다른 별명을 쓰기 때문에 아이디를 눈여겨 보지 않았다면 다음에 다시 만나도 별명을 바꾼다면 알아보기 
힘들었다. 일단 아나이스와의 대화를 갈무리 해 둔 파일을 찾아 보았다. 나는 늘 기록을 남겨두기 위해 
보통 대화를 시작할 때 갈무리를 시작하는데 나중에 상대의 아이디를 파일명으로 하여 내 자료실에 잘 
정리해서 보관해 두었다. 다행히 anais.cap와 anais1.cap로 된 파일이 있었다. 누군지 희미하게 기억의 
언저리를 맴돌고 있는 느낌이었다. anais.cap를 화면에 띄워 한 줄을 읽고서야 확실히 누군지 알 수 있
었다. 왠지 모르게 야릇한 느낌을 주는 여자. 아나이스가 스스로 여자라고 밝히지 않았지만 말투나 느낌
으로 미루어 여자 행세하는 남 자는 아닐 거라는 확신이 있었다. 통신에서 갈고 닦은 내 직감과 경험이 
틀렸다해도 어쩔 도리가 없지만 말이다. 내게 온 편지는 무조건 읽어보는 걸 원칙으로 삼고 있었으므로 
편지를 읽는데는 주저함이 없었다. 편지는 간단했다. 
[아나이스에요. 누굴 죽도록 사랑해 본 적 있으세요? 혹 누굴 죽이고 싶도록 사랑해 본 적 있으세요? 답
장 주세요.]
나는 뒷통수를 한 대 얻어 맞은 것처럼 멍했다. 아무리 통신을 통해 만났다고는 하지만 이렇게 황당한 
편지를 보내도 되는 건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 통신에서의 만남에도 예의가 따르는 법이다. 그러나 아나
이스는 처음 만났을 때도 안녕하세요라고 하지 않고, 지금 뭐하고 있어요라고 물어 봤다. 다음 번에는 
뭐랬더라. 뭘 그렇게 헤매고 있어요, 뭐 이런 식이었다. 그건 좋다고 쳐도 헤어질 때 한 번도 제대로 인
사를 하지 않았다. 나는 아나이스의 편지를 저장해 둔 후에 입맛을 다시며 편지 쓰기로 들어갔다. 온 편
지에는 꼭 답장을 해 준다는 것도 내 원칙 이었다. 나도 간단하게 답장을 썼다. 
[그런 적 없음.]
이렇게 써 놓고 나는 혼자 쿡쿡 웃었다. 아나이스가 내 편지를 보면 얼마나 황당할까 싶어서였다.
[다행이군요. 내가 찾던 사람이 가져야할 조건 중 하나는 가진 셈이니까요. 오늘 아침 아홉시에 대화방
에서 기다릴게요.]
인터넷에서 일간지들을 읽고 나와 아침을 달걀 후라이로 떼우고 하이텔과 나우누리를 둘러 천리안으로 
돌아갔을 때, 아나이스의 짤막한 편지가 도착해 있었다. 그때가 8시 근처였다.
[솔직히 말해서 그쪽이 별로 마음에 들지 않습니다.]
정확하게 9시에 아나이스가 나타났다. 나는 대뜸 말했다. 아나이스는 재빨리 되물었다. [왜요? 제가 뭘 
어째서요?] 
왜 만날 때와 헤어질 때 제대로 인사를 하지 않느냐, 당신 그렇게 예의라곤 없는 사람이냐 하고 따끔하
게 말해주고 싶었지만 너 무 째째한 것 같아 차마 손가락이 움직여지질 않았다.
[아무 얘기도 않고 갑자기 사라져서 그래요?] 
나는 뜨끔했다. 그러나 내 손은 이미 움직인 후였다. 
[네.]
[음... 그럴 사정이 있어서요. 이해하세요.] 
말하고 싶지 않은 문제에 대해서 집요하게 물고 늘어지는 것도 예의가 아니었다. 나는 양미간을 찡그리
며 자판을 두드렸다. 
[사정이 있다니 어쩝니까? 할 수 없는 일지요.] 
[고마워요. 이해해 줘서. 혹시 사랑은 해 본 적이 있어요?] 
또 뜬금 없는 말이 화면 위에 튀어 나왔다. 나는 고개를 갸웃뚱거렸다. 사랑 타령을 하는 걸로 봐서 고
등학생이거나 중학생일 듯도 한데 말하는 투로 봐서는 최소한 대학생이거나 대학을 졸업한 것 같 았다. 
성인이 확실하다면 실연을 당했든지 컴퓨터 섹스나 하러 다니는 여자일 가능성이 높았다. 그러나 컴퓨터 
섹스, 줄여 컴섹을 하 기에는 너무 이른 시간이었다. 나는 조심스럽게 아나이스를 떠 보았다.
[어떤 사랑을 말하는 겁니까?] 
아나이스는 내 반응에 온 신경을 세우고 있었는지 즉각적으로 반응했다. 
[어떤 거든 좋아요.] 
사랑이라... 너무 광범위한 얘기였다. 내 뇌는 정신없이 사랑과 관련된 기억들을 찾아내느라 분주했다. 
오래지 않아 뇌가 녹슨 기억 하나를 툭 던져 주었다. 
[대학 시절에 같은 과 여자 친구를 좋아하기는 했는데, 그걸 사랑이라고 해야 할까요?] [그 후엔 사랑하
는 여자가 없었어요?] 
[솔직히 말씀드리자면 저는 여자를 많이 알았습니다. 그래서 지금은 사랑에 별 관심이 없습니다. 이렇게 
채팅하는 게 부담도 적 고 여러 여자를 만날 수 있는데 굳이 사랑하는 여자를 만들 필요가 있겠습니까?] 
[그럼 섹스도 해 봤겠네요?] 
아나이스가 본색이 슬슬 드러내는구나 싶었다.
[컴섹도 과히 나쁘진 않지.] 
내 숨이 천천히 가빠지기 시작했다. 나는 거짓말을 했다. 
[물론 해 봤습니다. 그쪽은요?] 
대답하기 곤란한지 아나이스는 좀 망설였다.
[의무적으로 해야하는 처지이긴 하지요. 결혼했거든요.] 
아나이스의 대답에 온 몸이 굳어 버리는 것만 같았다. 유부녀는 처음이었다. 유부녀와 유부남의 사랑을 
그린 드라마가 한동안 유행한 후로 유부녀의 성에 대해 농담삼아 얘기를 한 적은 있었지만 바로 내 앞에 
유부녀가 나타날지는 몰랐다. 나는 떨리는 손으로 말했다.
[정말입니까?] 
[예.]
설마, 하는 생각으로 자판 위에 손을 내버려 두고 있는 나에게 아나이스가 말했다. 
[지금 컴퓨터 섹스같은 걸 하자는 게 아니에요. 당신이 원한다면 굳이 못할 이유도 없지만요. 하지만 때
가 아닌 거 같아요. 전 에 내가 말했죠. 난 사람을 찾는다구요. 정말이에요. 내게 꼭 맞는 사람을 찾고 
있어요. 당신이 그 사람일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어요. 난 지금 무척 조심스럽거든요. 내게 좀 더 진지
해졌으면 좋겠어요.] 
그날 아침부터 점심까지 전화가 불이났다. 동료 상규는 열을 내면서 돌아오라고 부탁했으며, 다른 회사 
몇곳에서도 전화가 왔었다. 그러나 곽재원이 있는한은 회사를 다닐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 점심 때쯤 되
어서 곽 재원이 직접 전화를 걸었다. 곽 재원은 특유의 비음 섞인 목소리로 간단하게 그러나 위엄있게 
말했다. 
[책임감에 대해 생각해 본 다음에 내게 전화 해요.] 
나는 잔뜩 얼은 채 곽 재원의 말을 들었다. 곽 재원이 전화를 끊고도 한참 후에야 나는 수화기를 내려놓
았다. 아주 몹쓸 짓을 저지르다 선생님한테 들킨 학생처럼 바짝 긴장된 온 몸이 미세하게 떨리기까지 했
다. 나는 결국 곽 재원을 거역할 수 없는 인간인 모양이었다. 마른 침을 어렵게 꿀꺽 삼키고 의자에서 
일어나 화장실로 갔다. 그걸 내 의지라고 해야 할까. 아직 세수도 하지 않은 상태였다. 나는 동작이 입
력된 로봇처럼 움직였다. 몇 번이나 얼굴을 씻고 손을 씻었다. 머리도 두 번을 감았다. 
[가끔은 있죠, 아주 예쁘게 차려 입고 아무도 살지 않는 무인도로 가고 싶다는 상상을 해요. 거기엔 정
말 아무 것도 없어야 해 요. 사람도 별장도 요트까지도요. 꼭 뭔가가 있어야 한다면 새하얀 페인트로 칠
해진 나무 벤취가 좋겠어요. 유치하죠?] 
나는 네라고 자판을 두드릴 뻔 했다. 아침에 아나이스와 약속한대로 13시에 대화방에서 만났다. 이 만남
이 끝나면 바로 회사로 가려고 옷을 다 차려 입고 있던 터라 아나이스의 말이 눈에 잘 들어오지 않았다. 
나는 건성으로 대답했다. 
[아뇨.]
아나이스의 말들이 화면 위에 개미처럼 분주하게 기어다니기 시작했다. 나는 아예 팔짱을 낀 채 그 말들
을 눈에 집어 넣고만 있 었다. 
[그 무인도에는 아주 높은 절벽이 있었으면 해요. 절벽에는 바다새들의 둥지가 있어서 바다새들이 아득
하게 내려다 보이는 파도 를 배경으로 힘차게 날아 다니는 풍경을 만날 수 있으면 더 좋겠지요. 아까 말
한 벤취말인데요, 그게 절벽 끝에 위태롭게 놓여 있는 거에요. 가만히 벤취에 앉아서 석양이 지기를 기
다리고 있다가 수평선이 빨갛게 물들 때 일어나요. 태양이 수평선 너머로 조금씩 사라지다가 제 몸을 모
두 감출 때, 나는 절벽 아래로 뛰어내리지요. 아마도 내 귀에는 바다새의 울음 소리와 파도 소리밖 에 
들리지 않을 거에요. 참, 내 몸이 떨어지면서 공기를 가르는 소리를 낼지도 모르겠어요.] 
대체 무슨 귀신 씨나락 까먹는 소릴 쉬지도 않고 하나 싶었다. 아나이스가 잠깐 손을 쉬는 틈을 놓치지 
않고 자판을 두드렸다. 
[미안하지만 지금 나가 봐야 합니다. 그 뒷 얘기는 다음에 듣도록 하겠습니다.]
아나이스는 내 반응을 예상하지 못한 모양이었다. 오타를 쳤다. [잔간만요. 얘기 거의 다 끝났어요.] 
[그럼 얼른 해 보십시오.] 
나는 시선을 아나이스의 말이 뜰 부분으로 모았다.
[내가 절벽에서 떨어질 때요, 내 등을 밀어주는 사람이 있었으면 좋겠어요.] 
나는 기가 막혀 코로 푸푸 소리를 내며 웃고 말았다. 어느새 내 손은 자판을 두드리고 있었다. 
[아깐 사람이 아무도 없어야 한다면서요?] 
[그랬죠. 쭉 없다가 나를 밀어줄 때 나타나면 되잖아요.] 
[그게 어디 가능한 일입니까?] 
[후후. 그러니까 상상이지요. 현실 속에서 그렇게 된다면 더 바랄 게 없겠지만요.] 
나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뚜르르 자판을 두드렸다.
[그러니까 그쪽이 찾고 있는 사람이 절벽에서 그쪽 등을 밀어줄 사람이란 말입니까? 데이빗 카퍼필드 같
은 마술사도 현실 속에 서는 그런 일을 할 수 없을텐데요.] 
아나이스는 전혀 주저함이 없었다. 
[그렇겠죠. 하지만 현실과 상상이 뒤섞이거나 뒤바뀔 수 있다고 가정해 보세요. 세상에 불가능한 일이란 
없게 되요. 이해하겠어 요?]
[그러니까 좀 이해를 해 줘. 지금 내 형편이 그렇게 안된단 말이야.]
................. 
[회사 일은 다 정리된 모양이죠?] 
아나이스를 다시 만난 건 저녁 무렵이었다. 물론 약속도 없었다. 대화방 대기실에 쪼그리고 앉아 있는데 
아나이스가 나를 초대 했다. 낮에 만났을 때 아나이스는 사표낸 사람한테 뭐가 그렇게 급한 일이 있냐며 
핀잔을 주었었다. 그 바람에 처리하지 않고 나온 회 사 일이 있어서 나가 봐야 한다고 둘러댔다.
[아닙니다. 회사 가는 길에 문득 깨달았습니다. 인연을 자를 땐 칼같이 냉정해야 한다, 뭐 이런 거였습
니다. 구질구질하게 미련을 둬서야 되겠습니까?] 
그날 가는길에 갑자기 칼이 갖구 싶었다. 물론 그 칼은 인연을 자르는데 쓰는 상징적인 칼이 아니라 날
이 시퍼렇게 선 진짜 칼을 말한다. 끝이 아주 날카롭고 길다란 칼. 맞다, 회칼 말이다. 그걸로 곽 재원
의 배를 푹 찔러 버리고 싶었다. 당신이 내 심정을 제대로 읽었다면 곽 재원이 싫어서라기 보다 무서워
서 찔러 버리고 싶었다는 뜻인 줄 눈치챘을 것이다. 더 이 상 나를 괴롭히지 못하도록 곽 재원을 이 세
상에서 영원히 사라지게 하는 것, 그러나 내 공상은 오래가지 못했다. 오래갈 필요 도 없었다. 내 칼에 
맞은 곽 재원이 배를 움켜쥐고 신음을 하다 곧 눈을 까뒤집으며 죽어 버렸기 때문이었다. 
[그건 그렇고 너무 자주 대화방에 나타나시는 거 아닙니까? 결혼한 거 맞습니까?] 
나는 벼르고 벼르던 질문을 던졌다. 그 질문은 실례였으나 아나이스는 아무렇지도 않은 듯 대답했다. 
[가정부가 있거든요. 집에서 제가 할 일이 별로 없지요.] 
가정부? 내심 놀랐지만 태연하게 되물었다.
[가정부까지 두신 분 취미 치고는 좀 어울리지 않는 거 아닙니까?] 
[뭐가요?] 
[채팅 말입니다.] 
[후후. 그렇지요? 내가 이런 걸 하게 될 줄은 꿈에도 몰랐어요. 하지만 사람을 찾으려다보니까 어쩔 수 
없었어요.] 
또 그 사람 찾는다는 소리. 나는 단도직입적으로 물었다. 
[도대체 찾는 사람이 어떤 사람입니까?] 
[나도 모른다고 했을텐데요?] 
[그렇담 아직까지는 못 찾았다는 말이군요.] 
[예. 하지만 여러 사람을 만나고 있으니 머지 않아 찾게 되겠죠.] 
나 역시 많은 여자를 통신에서 만나고 있는 처지이기는 했지만 아나이스에게서 그런 말을 들으니 기분이 
상했다. 
[음, 내 말에 속이 상한 모양이네... 그러지 마요.] 
나는 흠찔했다.
[무슨 오해를. 잠깐 다른 생각하느라 그랬습니다. 저도 통신에서 만나는 여자가 많은데요 뭘. 채팅이 이
래서 좋은 거 아닙니까? ]
아나이스는 빨리 움직였다.
[별로 기분 좋은 얘기는 아니네요. 다른 여자들 만나지 마세요.] 
나는 피식 웃으며 머리카락을 쓸어 올렸다. 
[고쳐 말하겠어요. 아주 기분 나쁘니 절대 다른 여자들 만나지 말아요. 알았죠?] 
나는 뒤통수를 긁으며 어떻게 대답해야 하나 궁리하였다. 다른 여자들과 계속 접촉하겠다면 아나이스는 
미련없이 떠나버릴 분위 기였다. 최근에는 아나이스처럼 지속적으로 연결된 여자가 없었다. 버리자니 아
깝고 그렇다고 붙잡기에는 조건이 만만치 않았다 . [대신 그쪽도 다른 사람들, 특히 남자들을 만나면 안
됩니다.] 
정당한 거래니 아나이스가 받아들일 걸로 봤는데 반응은 뜻밖이었다. 
[그건 곤란하네요. 내가 여러 남자를 만나는 건 내가 찾는 남자가 꼭 이 남자다라는 확신이 없어서 그래
요. 그리고 당신이 바로 그 남자도 아니잖아요.]
나는 아나이스의 말 사이에 내 감정을 끼워 넣었다.
[음...] 
아나이스는 아랑곳하지 않고 말을 이었다.
[어떻게 당신만 만나고 있겠어요. 난 시간이 별로 없어요. 불공평하다는 거 알아요. 하지만 특수한 상황
이니까 이해하세요.] 


[우리는 지금 특수한 상황에 빠져 있다는 거 잘 알면서 왜 이래? 애들 장난도 아니고, 이게 뭐냐구? 지
금이라도 어서 나와요.] 
곽 재원의 말투는 항상 이랬다. 앞에 하는 말은 모두 반말인데 끝에 가서는 존댓말을 했다. 곽 재원의 
카랑카랑한 목소리 때문에 내 몸에 닭살이 돋아났다. 곽 재원의 전화 목소리가 낯설게 들렸다. 그러고보
니 곽 재원과 전화로 얘기를 해 본 적이 거의 없었다. 전화 목소리로만 따지자면 곽 재원은 몰상식하고 
예의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막 되먹은 여자였을 뿐이다. 나는 헛기침을 한 후 수화기를 입에 바짝 대고 
말했다.
[이보세요. 곽 재원씨. 누구한테 반말을 찍찍거리고 있습니까? 아직도 내가 당신 부하라고 생각하나 본
데, 냉수 마시고 속 차리 슈.]
수화기에서 중심을 잡지 못하는 곽 재원의 목소리가 흘러 나왔다. 
[어어... 정말!] 
내친 걸음이었다. 
[정중하게 나와주십사 해도 나갈까말까 하는 판국에 어디다 소릴 질러댑니까? 당신 집에서 그렇게밖에 
못 배웠습니까?]
[아니... 점점. 야! 너! 거기 꼼짝말고 있어! 내가 지금...] 
더 들을 것도 없었다. 수화기를 내려 버렸다. 나는 흥분해 흐트러진 곽 재원을 떠올리며 마치 컴섹을 할 
때 같은 묘한 쾌감을 느꼈다. 꼭 곽 재원이 강간당해 찢어져 너덜거리는 옷을 입은 채 바지춤을 올리며 
걸어가는 내 등에 대고 욕을 해대는 것 같은 기분이었다. 나는 수화기를 보물이나 되는 양 아주 천천히 
쓰다듬었다. 전화가 아니었다면 절대 곽 재원에게 그런 식으로 말하지 못했을게다 . 기분이 째졌다. 
[좋아요. 결심했어요. 당신 아닌 다른 사람들과 얘기하지도 다른 누군가를 찾아다니지도 않겠어요. 대신 
당신이 내가 찾는 그 사람이 되어 주어야 해요. 분명히 당신이 감당하기 힘든 일이 될 거에요. 그래도 
좋아요? 오늘 안으로 대답해 주세요. 기다리겠 어요.] 
생각할 시간을 달라며 대화방을 빠져 나갔던 아나이스에게서 편지가 와 있었다. 아나이스가 어떤 사람을 
찾는 건지 감을 잡을 길이 없었다. 도대체 무슨 일이길래 감당하기 힘들다고 스스로 단정을 지었을까? 
정부가 되어 달라는 건가? 아님, 남편 뒷조사를 해 달라는 걸까? 그것도 아니면 남편의 재산을 가로채는 
걸 도와 달라는 걸까? 영화에 나올 법한 얘기는 다 머리에 떠올려 보았지만 답이 나오지 않았다. 
[시간도 많은데 뭘...] 
나는 아나이스의 편지를 저장해 둔 후 답장을 쓰기 시작했다. 
[다른 사람을 만나지 않겠다는 얘기는 긍정적으로 받아 들이겠습니다. 하지만 그럼 내가 어떻게 해야 할
지 말해 보십시오. 오늘 안으로 말입니다.] 


[오늘 안에 결정을 내려. 내일이면 기회가 다시 오지 않아. 내 말 알겠어요?] 
나는 멍청하게도 집에 꼼짝 말고 있으란 말이 무슨 뜻이었는지 곽 재원의 울그락불그락하는 얼굴을 보고
야 알아 차렸다. 곽 재 원은 현관 문을 열어주자마자 다짜고짜 말했다. 나는 또 주눅이 들고 말았다. 


곽 재원은 검은 투피스를 입고 있었다. 맥 라이언 스타일의 커트 머리. 작고 흰 얼굴. 연한 자주빛으로 
칠한 도톰한 입술. 그린 듯 가는 눈썹. 잘룩한 허리를 강조하는 자켓에는 금박 단추 둘이 달려 있었고, 
브이 자로 가슴이 깊게 패인 흰색 브라우스를 그 안에 입고 있었다. 무릎에서 한 10센티미터는 올라갔음
직한 짧은 치마는 엉덩이에 딱 붙어 있었다. 그리고 초록빛이 감도는 스 토킹과 검은 하이힐. 나는 잘 
훈련된 웨이터처럼 공손하게 곽 재원을 간이 식탁으로 안내했다. 곽 재원은 고개를 쳐 든 채 방 안을 휘
둘러보며 걸었 다. 식탁에 달린 의자가 곽 재원의 엉덩이에 비해 턱없이 작아 보여 걱정이 앞섰다. 곽 
재원은 아랑곳하지 않고 오른손으로 엉덩이 를 쓸어내리며 의자에 앉더니 다리를 꼬았다. 커피를 끓이려
고 가스렌지 쪽으로 걸어가는 나를 곽 재원이 불러 세웠다. [커피 마시러 온 게 아니야. 여기 앉아요.]
나는 똥 마려운 강아지같은 표정으로 의자에 엉덩이를 걸치고 앉았다. 
[내가 당신 마음 모를 줄 알고 그래? 내 직감은 틀린 적이 없거든. 당신 눈빛만 봐도 뭘 원하는지 알 수 
있단 말이야. 다 나 때 문이란 거 알아. 그동안 괴로왔겠지. 하지만 우린 운명적으로 이루어질 수 없는 
사이야. 난 아직까지 단 한 번도 실수를 해 본 적이 없어. 당신이 지금 그런 내 경력에 먹칠을 하려고 
하고 있어. 회사로 봐서도 그렇 고 내 개인적으로도 절대 용납할 수 없는 일을 당신이 하고 있는 거야. 
이렇게 무책임한 사람인지 몰랐어. 어떻게 할 거야? 말 좀 해 봐요.] 
입이 떨어지질 않았다.
[내가 열쇠를 쥐고 있다는 뜻이네.] 
곽 재원의 말에 나는 고개를 푹 숙이고 말았다. 하루가 멀다하고 자위행위를 하면서 나는 곽 재원을 떠
올렸다. 아니 곽 재원밖 에 없었다. 그러나 현실 속에서는 손가락 하나 댈 수 없는 사이였으므로 얼마나 
애증이 교차되었는지 이루 다 말할 수 없었다. 
[좋아. 대신 당신은 내가 시키는 대로 해야 되는 거야. 알겠지요?] 
그 말에 온 몸이 공중으로 들어올려지는 기분이 들었다. 웅웅거리는 소리만이 귓전을 맴돌았다. 길이 잘
든 노예처럼 애처로운 눈으로 곽 재원을 올려 보았다. 곽 재원은 아주 천천히 길고 흰 손가락으로 자켓 
단추를 하나씩 풀어나갔다. 새하얀 브라우스가 눈부셨다. 높고 뾰족한 가슴이 내 눈을 푹 찌르는 느낌이
었다. 곽 재원은 자켓 주머니에서 남보라빛 벨벳으로 만들어진 목걸이를 꺼내 목에 둘렀다. 그 목걸이는 
개나 고양이 목에 거는 것처 럼 곽 재원의 긴 목을 꽉 조으는 것이었다. 목걸이의 중앙에는 초록색 보석
이 박혀 있었는데, 에메랄드 같았다. 곽 재원은 자개처럼 여러 빛깔로 반짝이는 자그마한 브라우스 단추
를 하나씩 풀기 시작했다. 
나는 두 손을 식탁 위에 가지런히 놓고 눈만 껌벅거리고 있었다. 브라우스 안에 숨어 있는 브래지어 차
례였다. 그러나 내 예상은 빗나갔다. 바로 곽 재원의 풍만한 젖가슴과 하늘을 향해 치솟은 분홍빛 젖꼭
지가 내 시야에 가득찼다. 나는 침을 꿀꺽 삼켰다. 허리띠만큼이나 얇은 보라색 브래지어가 곽 재원의 
터질듯한 가슴 밑부분을 받쳐 올리고 있었다. 포르노에서 많이 보던 브래지 어였다. 곽 재원이 그런 걸 
하고 있다는 건 완전히 충격이었다. 이미 내 성기는 잔뜩 부풀어 올라 있었다. 곽 재원은 치마 속에서 
브라우스 자락를 빼냈다. 나는 길고 움푹 패인 배꼽으로 시선을 옮겼다. 배꼽에서 치마의 아랫배는 대리 
석 조각처럼 단단하고 미끈했다. 나는 허리에 대고 있는 곽 재원의 손과 아랫배를 번갈아 쳐다보았다. 
내 성기는 터질 듯 딱딱해졌다. 그러나 곽 재원의 손은 치 마로 가지 않았다. 조급해진 내가 조심스럽게 
곽 재원의 얼굴을 올려보는 순간, 곽 재원은 기다렸다는 듯이 내 얼굴에 침을 뱉았다.

바로 그때 나 는 소리를 지르며 사정을 했다. 나는 티슈를 꺼내 성기를 쓱쓱 닦아내며 컴퓨터 화면을 쳐
다 보았다. 거기에는 검은 투피스와 흰 브라우스를 젖힌 채 젖가슴을 드러낸 크리스티 톰이 생긋 웃고 
있었다. 나는 크리스티의 얼굴에 입을 맞추고 윙크를 해 주었다. 
[크리스티, 네가 곽 재원보다 백 배는 나아.]
그러나 크리스티도 내 말이 입에 발린 소리란 걸 잘 알고 있었다. 크리스티는 내가 인터넷을 돌아다니며 
수집한 누드 모델 중의 하나인데, 동양계였다. 같은 플레이보이지 출신인 누드 모델 이 성희가 좀 낫지
만 이 성희 홈 페이지가 없어지는 바람에 아쉬운 대로 크리스티를 내 연인으로 삼고 있었다. 크리스티의 
누드 사진만 50장 가까이 모았다. 나는 데미 무어, 산드라 블록, 마돈나, 샤론 스톤에서부터 전 세계의 
싸구려 포르노 배우의 누드까지 사진을 5,000장도 넘게 모 았다. 인터넷을 사용하기 시작하면서부터 나
는 여자들 꽁무니를 쫓아다니거나 여자들에게 잘 보이려고 패션, 보석, 카페, 드라이브 코 스 등과 같은 
정보를 모으는 따위의 일을 그만 두었다.
아무리 예쁜 여자라고 해도, 이를테면 미스 코리아니 슈퍼엘리트 모델이니 유명 배우니 하는 여자들을 
트럭으로 실어준대도 나 는 관심이 없었다. 컴퓨터만 켜면 그보다 훨씬 예쁘고 죽이는 몸매를 가진 글래
머들이 그것도 올 누드로 기다리고 있었다. 그러 나 예외가 있었다. 꼭 한 번만이라도 곽 재원의 옷을 
완전히 벗겨 놓고 침대에 꽁꽁 묶은 다음에 혁대로 마구 패 주거나 그 얼굴에 똥을 가득 싸 주고 싶었
다. 태어난 걸 저주하도록 만들어 주고 싶었다. 그렇게 복수를 하고 싶었다. 왜? 곽 재원이 나보다 잘 
났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번에도 브라우스까지밖에 벗기지 못했다. 그래도 엄청나게 진전된 것이었다. 
그 전까지 곽 재원은 상상 속에서도 곽 재원은 젖꼭지조차 보여주지 않았다. 그래서 더 가슴을 졸이며 
성기를 달굴 수 있었는지 모르겠다. 
[아직 시간이 남아 있어 다행이네요. 당신이 모험을 하기로 결정을 내려서 반가와요. 계약이 성립된 걸
로 하죠. 당신은 이제부 터 여러 가지 난관을 이겨내야 해요. 그런 후에야 내가 찾던 바로 그 사람이 되
는 거에요. 내가 누군지 궁금하겠죠. 난 이런 말 잘하지 않지만, 당신에게 힘이 될 수 있을까 싶어 말하
는 거에요. 절대, 당신을 실망시키지 않아요. 그리고 기억해 두세요. 난 이제 아나이스가 아니라 카마에
요. 당신에게 어떤 방법으로 내 메시지를 전달할지 몰라요. 당신은 아주 낯선 사람에게서 혹은 뜻 하지 
않은 장소에서 카마와 부딪히게 될 거에요. 내일 모레 정오에 당신에게 어떤 물건이 배달될 거에요. 나
중에 꼭 필요한 물 건 들이니 하나도 잃어 버리지 마세요. 그리고 혹시라도 지금까지 나와 한 얘기를 저
장해 놓았다면 다 지워 버리세요. 앞으로도 마 찬가지에요. 내가 보내는 선물을 빼놓고는 나와 관련된 
어떤 흔적도 남기고 싶지 않아요. 이유는 나중에 얘기해 주겠어요. 꼭 이 에요.] 
아나이스, 아니 카마의 편지는 밤 11시 42분에 발송한 것으로 되어 있었다. 


3장 

다음날 새벽, 나는 주무대인 천리안을 떠나 카마 몰래 하이텔로 잠입했다. 내 천리안과 하이텔의 아이디
는 틀리니 카마가 알아 차릴 턱이 없을텐데도 조심해서 움직였다. 나는 하이텔 성인 클럽에 있는 대화방
으로 무대를 옮겨 놓고 거미처럼 먹이가 걸려들기를 기다렸다. 하이텔에서 내 아이디는 멜 라니였다. 내
가 유일하게 남겨둔 여자 아이디였다. 시덥지 않은 남자들의 추파가 곧 줄을 이었다. 
[아이, 튕기지 말고... 화끈하게 해 줄게.] 
[다 알아. 너 굶주렸지? 지금 당장이라도 달려갈테니까 어딘지만 말해.] 
[잉, 누나. 나 좀 어떻게 해 줘요. 미치겠어요.] 
[지금 쌀 거 같으니까 어서 와. 응?] 
아무리 굶주렸기로서니 해도 너무 한다 싶었다. 무슨 말을 어떻게 꺼내야 하는지, 어떤 여자가 컴섹을 
하러 다니는 여잔지 알 길이 막막했다. 
내게 첫 번째 전환이 찾아온 것은 아이디를 여자가 쓸만한 아이디로 바꾸면서였다. 그때 아이디가 외국 
여자 이름같은 프랑스 시인 이름 발레리였다. 내가 발레리로 아이디를 바꾼 건 도무지 여자들은 물론 남
자들에게서조차 메모가 오지 않아서였다. 가끔 내가 여자들에게 얘기 좀 하지 않겠다며 메모를 보내면 
여자들이 메모가 너무 많아서 정신이 없다는 식의 얘기들을 했다. 대화방 대기실에 들어오는 여 자보다 
남자 숫자가 몇 배나 많으니 당연하기도 했다. 나중에 남자란 사실이 밝혀진다해도 일단 말의 통로를 터
는 게 중요했다. 발레리로 바꾼 그날부터 메모와 편지가 봇물처럼 쏟아 져 들어왔다. 그렇게 내게 날아
든 메모나 편지들이 내 선생이었다. 저, 시간 있으면 저랑 얘기 좀 하실래요부터 거 참 너무 빼지 마, 
죽여줄 테니까 어서 내 방으로 와까지 별별 메모와 편지들이 날아들었다. 게중에는 여자 맞아요하며 조
심스럽게 말을 거는 여자들까지 생겨났다.
그러나 여자 행세하는 건 쉽지 않았다. 한참 얘기를 재밌게 하다가도 갑자기 브래지어 사이즈가 어떻게 
되느냐? 거들 사이즈가 어떻게 되느냐? 아스트리젠트가 뭐냐? 지금 바르고 있는 파운데이션 이름이 뭐
냐? 등 여자가 아니면 대답하기 곤란한 질문들을 불쑥 던지는 거였다. 그럴 땐 정말 하늘이 무너지는 느
낌이었다. 이렇게 몇 번 당하면서 예상되는 질문에 대한 답을 미리 준비했다. 그러는 사이에 여자 노릇
에도 이력이 붙어 왠만한 질문에는 거침없이 대답하게 되었을 뿐만 아니라 내 쪽에서 도리어 선수를 쳤 
다. 그새 나는 아이디를 발레리에서 애너벨리로 바꾸고 새롭게 변신했다.
나는 눈이 벌게 가지고 여자를 사냥하러 다니는 남자들보다 여자들과 얘기하는 게 취미가 맞았다. 비록 
여자 행세를 하기는 했 지만 그걸 핑계로 여자들의 섹스 경험같은 걸 얘기하도록 유도하지 않았다. 제 
감정을 못 이겨 늘어놓는 사랑 타령 같은 거야 들어주긴 했지만 말이다. 컴섹이란 걸 하게 된 결정적인 
전환점은 내가 만난 여자들 중 하나, 블루리본이 만난 지 한달 쯤 지났을 때쯤 조심스럽게 레즈 비언이
란 걸 밝히면서부터였다. 나는 놀란 빛을 숨기며 말했다.
[그게 뭐 어때서 그래?] 
[이해해 주니 고마워요. 언니.] 
블루리본은 22살의 대학생으로 정보학과에 다닌다고 했다. 그외에는 별로 자기 얘기를 한 게 없는, 그러
니까 내 기억 속에서도 별로 특별할 게 없는 여자애였다. 특기할 사항이 있다면 내가 대화방에 들어갈 
때마다 대화방 대기실에서 서성거리고 있었다는 점 정도였다.
[저, 언니...] 
나는 블루리본이 보내온 글자 속에서 많은 감정의 굴곡이 느껴져 긴장했다. 
[왜?] 
[언니만 괜찮다면요, 만나고 싶어서요.] 
그건 내가 하고 싶은 말이었다. 인터넷에서 레즈비언들이 섹스하고 있는 사진을 많이 보긴 했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금발이나 흑 인들 혹은 일본 여자들 사진이었다. 그 사진들을 보면서 늘 사진 속의 여자들이 
진짜 레즈비언일까 아니면 연출에 의해 찍은 걸 까 궁금했다. 그런 사진들에서 레즈비언의 섹스를 적나
라하게 보아와서 블루리본의 성생활에는 별 관심이 없었다. 그것 보다는 어쩌다 레즈비 언이 되었나가 
궁금했다. 
[언제? 혹시... 지금은 아니지?] 
블루리본은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이 말했다.
[아뇨. 지금이요.] 
나는 얼른 시계를 봤다. 자정에 가까운 시간이었다.
[너무 늦은 거 아니니? 나 내일 일 때문에 일찍 나가봐야거든. 나가기 좀 그런데...] 
[아직 열두 시도 안됐는 걸요. 제가 언니 집 근처로 갈게요. 잠깐이면 되요.] 
[꼭 얼굴을 봐야 되니?] 
블루리본은 삐쳤는지 대답이 없었다. 나는 걱정이 됫다. 블루리본이 이방저방 돌아다니면서 애너벨리가 
남자라고 소문을 낼경우에는 애너벨리로 쌓아온 인연들은 하루아침에 사라질 처지였다. 
[우리 집이 어딘지나 아니? 서울대학 근처야. 넌 어딘데?] 
[휴---. 여긴 수유리에요.] 
작전 성공이었다. 나는 회심의 미소를 지으며 자판을 두드렸다. 
[다음에 만날 기회가 있겠지.] 
[그렇기야 하지만요, 섭섭해요.] 
나는 블루리본을 위로해주는 척하면서 본심을 드러냈다. 
[다음에 만나게 되면 맛있는 거 사줄게. 됐지?] 
[내가 뭐 앤 줄 알아요!] 
블루리본의 퉁퉁거리는 소리가 귓가에 들리는 듯 했다. 그렇다고 좋은 기회를 놓칠 수가 없었다.
[미안. 그러면 어른으로 대할게. 이런 말 들어도 기분 나쁘게 생각하지마. 너, 있지? 어쩌다가 레즈비언
이 되었니? 사실은 나도 레즈거든.] 
잠시 아무 말이 없던 블루리본이 입을 열었다.
[언니, 레즈 아니죠? 그런 질문이 어딨어요?] 
블루리본은 팔랑팔랑 휘날리며 내 시야에서 사라졌다. 그게 블루리본과의 마지막이었고, 애너벨리도 끝
장났다. 그날로 블루리본 이 애너벨리는 레즈비언을 가장한 남자라고 블랙리스트에 올려 버렸다. 그 일 
이후에 내가 알아본 바로는 레즈비언이나 게이는 태어나면서부터 그런 게 아니라 어떤 계기로 인해 되어
가는 거라고 했다 . 그러므로 어쩌다 레즈비언이 되었니 어쩌고하는 질문은 틀리지 않았다. 블루리본이
야 말로 레즈비언 흉내나 내고 다니는 여자 아니면 남자였다. 블루리본 때문에 동성연애자들, 특히 레즈
비언에 대해 정보를 꽤 습득한 나는 아이디를 페미니로 바꿔 본격적으로 레즈비언 노 릇을 하기 시작했
다. 레즈비언들의 생각을 알아보고 싶다는 호기심에서 시작된 일이었는데, 나보다 엉성한 레즈비언 아류
들이 그 렇게 많은지는 몰랐다. 오빠 아이디를 빌려 쓴다는 녀석부터 아예 나처럼 여자 아이디를 쓰고 
다니는 녀석까지 레즈비언에 관심이 있다며 접근하지를 않나 여자하고 하는 게 뭐가 좋아? 진정한 남자 
맛을 보여줄테니까 만나자는 노골적인 녀석들까지 떼거지로 몰려 들었다.
녀석들은 내가 조금만 반응을 보이기만 해도 흥분해서 어쩔 줄을 몰랐다. 혼자 화장실 벽에 적혀 있음직
한 얘기를 하면서 아아 아아아, 음음음음음... 구역질 나는 신음 소리까지 곁들였다. 정말이지 진짜 레
즈비언을 찾기란 하늘에서 별따기였다. 
[진짜 레즈라면 지금 전화로 얘기해요.] 
밀키웨이라는 아이디를 가진 여자였다. 나는 그때 동성여(구)라는 별명을 쓰고 있었다. 올 게 왔구나 싶
어 숨이 턱 막혔다. 그 때까지 밀키웨이처럼 당당하게 전화로 얘기하자는 여자는 없었다. 나는 더듬더듬 
탈출구를 마련했다. 
[전화하기가 좀 그러네요. 어머니가 잠 귀가 밝아서요. 옆에서 주무시거든요.] 
밀키웨이는 서두르지 않았다. 
[제 삐삐 번호를 알려드릴게요. 음성 메모를 남겨두세요. 그럼 믿을게요.]
그렇게까지 나오는데야 어쩔 도리가 없었다. 
[그럴게요.] 
[내가 여기 적어놓은대로만 녹음해 줘.]
책상을 나란히 하고 있는 4년 후배 박 정연은 내가 내민 메모와 나를 번갈아 보았다. [이게 뭔데요?] 
[친구를 골탕먹이려고 그러는 거야.] 
나는 이미 밀키웨이의 삐삐를 확인해 둔 상태였다. 밀키웨이는 삐삐에 자기 목소리 대신 보헤미안 랩소
디의 첫 부분을 녹음해 두고 있었다. 누굴 골탕 먹인다니까 마냥 좋은지 박 정연은 손을 바삐 움직였다. 
[저, 페미니거든요. 메모 남기라고 해서 이렇게 연락드려요. 오늘 아홉시에 어제 만났던 거기서 기다릴
게요. 혹 못 오게 되면 제 삐삐로 연락주세요.] 
박 정연이 내 삐삐 번호를 또박또박 읽는 걸 보고 나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출근하기 전에 벌써 내 
삐삐의 음성 메시지를 지우고 솔베이지의 노래 를 녹음해 두었다. 밀키웨이는 정확하게 밤 9시에 대화방
에 나타났다. 내가 믿음을 줘서인지 생각보다 말이 많아졌다. 
[제가 페미니님을 못 믿어서가 아니라요, 요즘 레즈 흉내를 내는 남자들이 많아서 확인을 하지 않을 수 
없었걸랑요. 이해해 주 세요.] 
[예.] 
나는 다소곳이 대답했다. 
[페미니님은 파트너 있어요?] 
나는 파트너가 정확하게 무슨 의미인지 몰라 침묵으로 대답했다. 
[없나 봐요. 전 언니가 있어요. 가끔 언니 친구들이랑 같이 모이거든요.]
그제야 파트너가 섹스 파트너 혹은 애인이라는 걸 눈치챘다. 
[전 얼마 전에 헤어졌어요. 대학 후배였어요.] 
[저런... 제가 소개시켜 드릴까요?] 
[그게 부담스러우면 저랑 언니들 만나러 갈 때 같이 가든지요.] 
[만나서 뭐하는데요? 전 여럿이 어울려 본 적이 없거든요.] 
[남들 시선도 있고 하니까 대개들 그렇지요. 우린 서로 집을 돌아가면서 만나요. 보통 대여섯 명이 모이
는데요. 거기서 마음에 맞는 짝을 찾아요. 다음엔 각자 알아서 하구요.]
[밀키웨이님은 파트너가 있다면서요? 처음 만나서 아무나 하고...]
밀키웨이가 엄청나게 빠른 속도로 자판을 두드렸는지 내 말이 중간에서 잘려 버렸다. [오해마세요. 짝이 
없는 사람들이 그런다는 거니까요. 어때요? 다음 모임 때 나올래요?]
[호출하세요.] 
대답은 그렇게 했지만 상상만 해도 역겨운 짓을 하라고 나오라니..., 구역질이 나려고 했다. 그날로 나
는 레즈비언 노릇을 끝내 버렸다.
며칠 후, 밀키웨이라며 낭랑한 여자 목소리가 내 삐삐를 울렸다. 그날 저녁 7시에 신촌 홍익문고 앞에서 
보자고 했다. 나는 그 곳으로 나가는 대신 삐삐 번호를 바꿔 버렸다. 나는 다시 남자 아이디로 돌아가 
본격적으로 여자 사냥에 나섰다. 발레리와 애너벨리에게 접근하던 남자들의 수법을 그동안 충 분히 익혀 
놓았기 때문에 컴섹할 여자를 찾는데는 별 어려움이 없었다. 여자를 구슬러 첫 경험이나 섹스에 대한 환
상 같은 걸 듣는 거나 흥분을 시켜주기 위해 인터넷에서 포르노 소설을 읽고 마치 내 가 겪은 것처럼 얘
기해주는 일도 석 달이 넘자 지겨워졌다. 그 석달 동안 내가 얼마나 포르노 스토리텔러로서 명성을 날렸
는지에 대해서는 얘기하지 않겠다.
나는 컴섹계를 나와 진정으로 마음에 맞는 여자를 찾으려고 노력하기 시작했다. 여기에도 끈기와 절제가 
필요했으며 덧붙여 매 너와 순발력과 유머가 겸비되어야 했다. 그렇게 해서 사귄 여자가 수 십명은 족히 
되었다. 그 중 몇몇을 호기심으로 현실 공간에서 만난 적이 있었다. 별 기대는 하지 않았지만 불행하게
도 만나는 족족 기대 이하였거나 거짓말장이뿐이었다. 그러는 동안 내가 깨달은 건 가상 세계에서의 만
남은 가상 세계 속에서 끝내야 한다는 거였다. 가상 세계에 사는 사람들이 현실 로 걸어나올 때는 정말
로 초라하고 볼품없다는 걸 인정해야만 했다. 게중에는 근사한 여자도 있겠지만 그런 여자를 찾으려면 
엄청난 투자가 뒤따라야만 할 것 같았다. 운이 좋으면야... 
하지만 운 이란 게 어디 믿을만 한 것인가? 그렇지만 얘기나 하는 건 괜찮았다. 하이텔 아이디를 멜라니
라고 해 놓은 것도 단지 그 이유였 다.


4장 

[이번만 용서하겠어요, 멜라니. 내가 당신을 모를 거라고 생각하면 오산이에요. 난 이미 당신에 대해 다 
알고 있어요. 또 다시 약속을 어기면 내가 살아 있는 동안 어떤 식으로든 당신에게 타격을 주겠어요. 내 
말 명심해요. 카마.] 
내가 벨 소리에 잠을 깬 시간이 12시 경이었다. 진한 노란색 조끼를 입은 청년이 현관에 서 있다가 내 
이름을 확인하고는 조그 만 상자를 건넸다. 상자를 풀자마자 메모지가 나풀거리며 바닥에 떨어졌는데, 
거기에 카마의 협박에 가까운 말이 적혀 있었다. 
[이런 처 죽일...] 
점심을 동네 중국집에서 배달시킨 울면으로 떼우면서까지 하이텔에서 낚시를 하고 있었다. 낚시광이어서
가 아니었다. 내 생체 리듬을 회복하기 위해서 내 몸과 정신에 세뇌된 시간 개념을 흐리게 만드는 일이 
선행되어야 했다. 그래서 집에 있는 시계들은 다 쓸어 침대 아래에 던져 버리고 멍하게 컴퓨터 화면에 
나온 낚시터 풍경과 낚시대를 바라보고 있는 참이었다. 가끔씩 창 너머로 멀리 보이는 관악산을 바라보
면서 눈의 피로를 푸는 게 고작이었다. 정작 내가 선택한 자리는 잔챙이들밖에 잡히지 않는다는 갈대 숲 
사이였고, 한 시간이 넘게 한 마리도 낚아올리지 못한 상태였 다. 내가 원했다면야 벌써 수십 마리를 낚
았을 것이다. 미끼도 끼우지 않은 채 낚시대를 던져 두었으니 물고기가 낚일 리가 없었 다. 강 태공 흉
내를 내는 동안에도 내 머리는 맑아지지 않았다. 뭔가가 내 머리를 꾹 누르고 있는 듯 불편하고 답답했
고 누가 내 뒤 통수에 딱 붙어 있는 것 같아 머리가 지끈거렸다. 회사 일 때문도 아니었다. 곽 재원도 
문제가 아니었다. 카마? 부인하고 싶지만 사실은 그 여자가 문제였다. 
감시 당하고 있다는 느낌, 바로 그게 내 두통의 원인이었다. 카마의 하수인들이 내 일거수일투족을 감시
하고 있을지 모른다는 의심은 인정하기 싫지만 이미 두려움으로 변해버린 터였다. 감 시를 피하는 한 방
법으로 내가 택한 것이 낚시터에 할 일 없이 앉아 있는 것이었다. 그러나 소극적인 것만은 아니었다. 아
까 말 했듯 회사의 구성원이 아닌 주체적인 존재로 변신하기 위해 사회적 시간 감각을 흐트리고 재정돈
한다는 뜻도 들어 있었으니까. 
곧장 가입/탈퇴 신청하는 곳으로 향했다. 그곳에서 멜라니의 탈퇴신청서를 냈다. 멜라니가 그동안 만들
어 놓은 여자 관계도 모두 반납하였다. 적장 앞에 꿇어앉아 항복하는 왕의 심정과 다를바 없이 참담했
다. 최단 시간에 탈퇴를 원한다는 주를 달아 탈퇴신청서를 쓰는 동안, 나는 한가지 유혹에 빠져 들었다. 
카마를 통한다면 나 역시 카마처럼 두려움을 느끼게 하는 힘을 가질 수 있지 않겠나 싶었다. 누군가의 
신상 정보를 쉽게 빼내고 그걸 이용해서 위협할 수 있다는 건 분명 불법이다. 하지만 그런 능력을 가진
다는 건 불법이 아닐 것이다. 불법이라고 해도 좋았다. 카마가 나를 조사했듯 카마의 능력을 역이용해서 
카마를 조사하게 된다면 피장파장이 될 테니까. 
나는 천리안으로 들어가서 카마, 아니 아나이스에게 멜라니는 더 이상 존재하지 않게 되었다는 편지를 
보내 카마의 화를 풀어주 려고 했다. 막상 편지 쓰기로 들어가 수신자를 쓰는 란에 아나이스라고 적었는
데 그런 아이디를 가진 회원이 없다는 메시지만 반 복되었다. 다른 통신회사들에서도 마찬가지였다. 인
터넷 메일 주소라는 게 피씨통신회사에 가입해야만 생기는 것이니 인터넷으로도 메일을 보낼 수가 없었
다. 
[이런...] 
카마와의 모든 끈이 두절되어 버렸다. 나는 한밤중에 사막 한가운데 버려졌다. 흙으로 된 관 속에 갇힌 
꼴이었다. 나는 세차게 머리를 흔들며 그 공상에서 빠져 나왔다. 무슨 수든 써야 했다. 그렇지 않고는 
질식해 버릴 것만 같았다. 
[당신을 시험해 보려고 해요. 당신에게는 힘든 일이 될지 모르겠지만 당신은 내게 믿음을 증명해 보여야 
해요. 당신이 벌써 약 속을 어긴 거 잊지 않았겠죠?]
팽개쳐 두었던 상자의 포장을 뜯으니 녹음 테이프가 들어 있어 틀었다. 카마의 목소리는 나지막하고 차
분해서 원숙한 느낌을 주 었다. 누구의 곡인지 모르겠지만 교향악단이 연주하는 장중한 클래식 곡이 카
마의 목소리 아래 깔려 있었다. 짐작가는대로 말해보라면 바하나 그 시대의 작곡가들이 만든 바로크 음
악이 아닌가 싶다. 
[오 진택이란 사람에 대해 알려고 들지 마세요. 당신을 만족시킬 수 있을지 모르겠지만, 당신을 위해 만
든 거에요. 당신이 시험 해 보면 알겠지만 그 카드는 아무 이상이 없어요. 뒷 일은 내가 처리할테니 당
신 쓰고 싶은대로 쓰세요. 카드 뒷면에 사인 쓰는 란이 있죠? 오 진택의 사인은 당신 마음대로 만들어
요. 비밀번호는 육이삼사, 다시 말할게요. 육이삼사, 알겠죠?] 
나는 카마의 말을 들으면서 테이프와 함께 들어있던 신용 카드를 만지작거리고 있었다. 리모콘으로 정지 
버튼을 누른 후 신용 카드를 눈 앞에 대고 자세히 살펴 보았다. 유효 기간이 2002년까지로 되어 있는 골
드 카드였다. 카드 모서리에서 까칠까칠한 느낌이 느껴질 정도로 사용한 흔적이 없는 새 카드였다. 도대
체 이게 무슨 일인가 싶어 재생 버튼을 눌렀다. 
[대신 당신이 가지고 있는 신용 카드는 다 내버리세요. 그게 싫다면 내가 당신 앞에 나타날 때까지만 쓰
지 마세요. 난 당신이 뭘 좋아하고 어딜 잘 가는지 알아야겠거든요. 카드는 내 손에 없지만 카드 번호와 
비밀 번호를 알고 있으니까 조회를 해 보면 당 신이 카드를 쓸 때마다 당신이 어디에 있었고, 뭘 했는지 
알 수 있지 않겠어요? 세상에 공짜는 없는 거에요. 좀 기분이야 나쁘겠 지만, 어때요? 내 제안에 동의하
세요? 동의한다면 내게로 편지를 보내요. 새 주소 [email protected]이에요.] 
[점점... 경찰에 고소해 버려...] 
그러나 내 손가락은 리모콘의 되감기 버튼을 누르고 있었다. 다시 재생을 시켜놓은 후 카마의 새 인터넷 
메일 주소를 메모했다. 정보는 어차피 누출된 것, 따져도 카마를 만나서 따지는 게 순서일 듯도 싶기도 
했고 카마의 유혹을 뿌리치기도 힘들었다. 나는 서둘러 인터넷으로 들어갔다. 카마의 제의에 대해 구체
적으로 생각해 보지도 않은 상태였다. 일단은 만나야한다는 생각 뿐 이었다. 내가 쓰는 인터넷 프로그램
은 네스케이프사의 네비게이터였다. 네비게이터에서 카마에게 편지를 썼다. 
[황당하네요. 도대체 얼마나 돈이 많길래 신용 카드를 막 주는 건지 모르겠습니다. 혹시 남편 몰래 남편 
이름으로 만든 거 아닙 니까? 저는 감시당하는 게 싫습니다. 카드도 필요없습니다. 사람 잘못 봤어요.] 
여기까지 써 놓고서야 나는 카마와의 관계에 대해 다시 생각해 보았다. 어느날 불쑥 나타나서 나를 자기 
손 안에 쥐고 뒤흔들려 는 여자. 
[나에게 명령하고, 하지만 정중하고 예의 바르게 하지, 나를 농락하고, 그렇게까지 심하게 얘기할 건 없
을 거 같은데, 나를 얕 잡아 보고, 얕잡아 본다고 하기는 좀 곤란한데, 나를 시험하고, 아직 시험한 건 
아니지.] 
내 속에 다른 내가 있어서 자꾸 카마 쪽으로 나를 유인하고 있었다. 그 이유가 뭔지 생각해 보려고 머리
를 싸매면 편두통이 나 를 가로 막았다. 
[어차리 이렇게 된 거 한 번 부딪쳐 보는 거야.] 
나는 편지를 이어갔다. 
[하지만 당신의 제안을 받아들이기로 했습니다. 연락 기다리겠습니다.]
[편지 잘 받았어요.] 
인터넷 메일을 보내고 채 30분도 안 되어 카마에게서 전화가 걸려왔다. 카마가 내 전화번호를 알고 있다
는 사실에도 나는 별로 놀라지 않았다. 사실 그건 카마가 이미 알아낸 내 신상 정보에 비하면 놀랄 일도 
아니었다. 테이프에서 목소리를 들어서인지 카마의 목소리도 낯설지 않았다.
[너무 일방적이란 생각 안 드십니까?] 
내 퉁명스런 말투에도 카마는 아랑곳하지 않았다. [예상보다 목소리가 마음에 드는군요. 좀 더 딱딱하고 
건방지게 얘기해 줄 수 있어요?] 
그렇잖아도 그렇게 얘기할 참이었다. 그러나 처음 통화하는 사람한테 그럴 수가 없었다.
[지금 누구 놀리는 겁니까? 사람 가지고 장난...] 
[그게 아니죠. 아예 반말을 하세요.] 
카마의 목소리는 나를 놀리는 듯 생기가 넘쳐 흘렀다. 
[왜 말이 없어요? 말 좀 해 봐요.] 
나는 머쓱해져서 겨우 입을 열었다. 
[처음부터 반말을 하는 게 좀...] 
[호호호. 괜찮다니까요. 내가 괜찮다는데 누가 뭐래요?] 
[이거 쑥스러워서, 원...] 
[호호. 좋아요. 그럼 존댓말로 하세요. 됐죠?] 
나는 양미간을 찌푸리며 머리카락을 쓸어올렸다. 카마의 가라앉은 듯 하면서도 발랄한 목소리가 내 고막
을 간지럽혔다. 
[내가 시험을 하겠다고 했죠? 이제부터 내가 하는 얘기 잘 들으세요. 하지만 메모는 하지 마세요. 이틀 
후, 오월 팔일이 되겠네 요. 롯데 호텔과 롯데 백화점을 잇는 통로로 가세요. 거기에는 보석 상점이 많
은데 그 중에 마라라는 상호를 가진 상점이 있어요 . 정확하게 세 시에 그 상점 앞에 가서 상점 안을 들
여다 보세요. 연한 코발트블루 원피스를 입고 같은 색 모자를 쓴 여자가 있 을 거에요. 모자 챙이 넓으
니 금방 알아볼 거에요.] 그러나 나는 메모를 하고 있었다. 짐짓 딴청을 부리며 말했다. 
[그래서요?]
[그 여자를 다섯 시까지만 쫓아다니세요.] 
[네? 미행을 하라는 겁니까?] 
[그렇게 들릴 수도 있겠네요. 하지만 그렇게만 나쁘게만 생각하지 말아요. 누군가를 관찰한다, 이렇게 
생각해도 좋잖아요? 살기 바빠 그럴 기회도 별로 없으니까 그렇게 해 보는 것도 나쁘진 않을 거에요. 다
음에 다시 연락할게요.] 
 

5장 

10여년 전, 서울지방 국세청장으로 있다가 뇌물수수 혐의로 직위해제 당한 이후로 아버지는 죽은 듯 조
용하게 지냈다. 반면 어 머니는 날개를 단 백마처럼 온 서울을 휘젓고 다녔다. 아버지가 지방 국세청 국
장 시절부터 받은 뇌물로 일찍이 사 두었던 강남 땅들을 굴려 만든 돈으로 어머니는 청담동에 그때 돈으
로 200억짜리 빌딩을 지었다. 그러한 부모님들이 싫어서, 나는 취직이 되자마자 집을 나왔다. 하지만 부
모를 원망하는건 아니었다. 적어도 그들은 나의 피와 살을 만들어 줬으니까.
카마와의 약속대로 백화점으로 갔다. 어버이 날이라서 그런 건지 평일인데도 백화점은 몹시 붐볐다. 2시 
50분 경에 보석상점 마라 앞에 도착했다. 쇼윈도에 나와 있는 큼지막한 에메랄드 반지와 귀걸이 세트가 
내 눈길을 끌었다. 내 뒤로 뭔가가 스치고 지나가는 서늘한 느낌 때문에 뒤를 돌아보았다. 그러나 내 뒤
에는 서로에게 무관심한 행인들밖에 없었다 . 
다시 마라 안으로 고개를 돌렸을 때, 놀랍게도 코발트블루 원피스와 챙이 넓은 모자를 쓰고 백설처럼 하
얀 핸드백을 든 여자가 있었다. 움직일 때마다 나풀거리는 실크 치마가 마음을 설레게 했다. 챙에 가려
져 보이지 않던 그 여자의 얼굴이 주인을 따라 움직이면서 옆모습을 보여주었다. 피부가 너무나 하얘서 
파란 핏줄이 보일 정도였다. 크지도 작지도 않은 귀에 새까만 점처럼 블루 사파이어 귀걸이가 박혀 있었
다. 우수에 찬듯한 눈과 오똑하지만 날카롭지 않은 코, 약간은 얇아 보이는 입술 그리고 입술가에 진 엷
은 미소, 입술을 벌릴 때마 다 다소곳이 내비치는 하얀 치아가 눈부셨다. 그 여자를 놓쳐서는 안되기도 
했고 그 여자의 얼굴을 정면으로 바라보고 싶은 욕심도 있었다. 그러나 그 여자는 끝내 내 쪽 으로 얼굴
을 돌리지 않았다. 그 여자가 마라에서 나올 때는 자연스럽게 얼굴을 보게 될 거라는데 생각이 들어서야 
마음이 놓였다. 
긴장이 풀린 탓인지 갑자 기 오줌이 마려웠다. 에메랄드를 살펴보는데 정신이 팔려 있는 그 여자가 잠깐 
자리를 비운다고 사라질 것도 아니다 싶었다. 자 주 와 본 곳이라 화장실이 어디 있는지 두리번거릴 필
요도 없었다. 마라와는 채 10미터도 떨어지지 않은 곳에 있었으니까. 한 2-3분 정도 걸렸을까? 아무리 
길어야 5분이었다.
내가 다시 마라의 쇼윈도 앞으로 돌아갔을 때 그 여자는 없었다. 귀신이 곡 할 노릇이었다. 길은 두 갈
래, 롯데 호텔이 아니면 롯데 백화점밖에 없었다. 보석 상점을 떠난 지 얼마 되지 않았을 거라는 확신이 
있었고, 호 텔 쪽으로 치우쳐 있는 화장실에서 나오면서 그 여자를 보지 못했기 때문에 백화점으로 난 
길을 택했다. 몇 년이나 찾아다니던 전설 속의 파랑새를 바로 눈 앞에서 날려보낸 심정이었다. 파랑새, 
그리고 신비스러운 그 여자. 어쩌면 둘 다 나와는 인연이 닿지 않는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을 하며 고개를 
들어 그냥 먼 곳을 바라보는데, 거기에 그 여자가 있었다. 에스컬레이터! 그 여자의 챙 넓은 모자가 1층
으로 향하는 에스컬레이터의 중간쯤에서 강물에 띄운 종이배처럼 둥실둥실 위로 흘 러가고 있었다. 나는 
예의고 뭐고 다 팽개치고 사람들을 어깨로 밀어젖히며 에스컬레이터로 달려갔다. 내 등 뒤에서 터져나온 
비명 소리와 욕설 은 에스컬레이터를 타고 있던 사람들의 시선을 잡아당겼지만 그 여자만은 자세를 흐트
리지 않았다. 
내가 겨우 에스컬레이터에 발을 올려놓은 것은 이미 그 여자의 모습이 완전히 사라진 후였다. 그러나 사
람들이 꽉꽉 들어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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