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전여행(無錢旅行)은 나에게 또 하나의 새로운 세상이 있음을 알게 해 준 귀중한 경험이었다.
나는 그 방학이 다 가기 전에 부산을 한 번 더 다녀왔고 지난 달 동해 바닷가에서 만난 혜정을 만나 서로 간에 살 깊은 정을 나누었음은 물론이다.
그러는 사이에 여름 방학은 살같이 빨리도 흘러가 버렸다.
무전여행 중 내가 한 가지 밝히지 않은 사실이 있는데 그것은 무전여행을 하는 도중에 경북 봉화군 소천 면 분천 리 근처의 한 깊은 산의 절에서 한 스님에게 불교 무술(불무도)을 배웠다는 사실이다.
처음에 나는 그 스님에게 한 운동한다고 깝죽대었다가 무지하게 맞았었다.
나도 어디 가면 잘 맞지 않는 쪽에 속하는데 이 스님의 운동은 국술을 하는 것처럼 또 마치 택견을 하는 것처럼 자연스럽게 상대의 공격을 이용하여 상대를 제압하는 그래서 전혀 힘들이지 않고 상대방을 무력화시키는 무술이었다.
나는 그 무술을 배우기 위해 비가 억수로 퍼붓는 이틀 밤낮을 그 스님이 거처하시는 암자 앞에서 무릎을 꿇고 기다렸었다.
그 결과 가장 기초적인 이론을 비롯한 몇 가지 운동을 배우는데 성공하였다.
나는 겨울 방학 때 다시 올라오기로 약속하고 일주일 만에 그 절을 떠났다.
그래도 나에게는 큰 경험이었고 무술의 새로운 경지를 깨닫게 된 계기가 되었다.
그로부터 나는 20여 년이 지난 지금까지 가끔씩 그 절에 가서 무술을 연마하곤 한다.
8월 하순이 되어 다시 개학을 하여 학교엘 나가니 개학식 날 새로 전근오신 선생 몇 분을 소개한다.
체육 선생까지 총 네 분이 새로 전근 오셨는데 나는 그 체육 선생에게 테니스의 하나부터 열 가지를 다 배웠고 그 외에도 5종 경기 등을 배워 나갔다.
그 덕분에 나는 군대 제대 후 어느 해엔가 부산에서 하는 철인 3종 경기에서 3등 안에 들었을 정도의 실력을 갖추어 나갈 수 있었다.
어쨌든 새로 오신 분들은 남자가 세 명이었고 여자가 한 명이었는데 여자는 다름 아닌 우리 1학년들을 가르치는 생물 선생이었다.
그런데 그녀는 정말 내 이상형(理想型)처럼 예쁘게 생겼다.
날씬한 몸매에 늘씬한 키, 재미있는 말솜씨(나중에 안 사실이지만...). 26세의 그녀는 부임하자마자 단 숨에 전교생의 남학생들의 가슴에 불을 지르기에 충분하였다.
대학원까지 마친 그녀는 여자 중학교에서 이미 2년간의 교편생활을 한 경험이 있었고 우리 학교는 두 번째 부임지(赴任地)란다.
왜냐하면 우리 학교는 사립이었기 때문에 누구나 실력 있는 교사만 있으면 때론 스카웃을 해서 데려 오기도 했다.
한편, 아이스하키부의 짓궂은 친구들은 벌써부터 그 생물 선생을 따먹기 위해서 목하 고민 중에 빠졌다는 정보를 우리 태권도부에서 입수했을 때 우리는 그 생물 선생을 보호하기 위한 특수부(?)를 조직하기에 이르렀다.
몇몇의 내 친구들이 그녀의 퇴근 후 멀치감치서 그녀를 미행하기로 했고 짓궂은 아이스하키 부 놈들이 그녀를 집적거릴라 치면 우리 친구들이 시간 끌기 작전으로 버팅기면서 다른 친구들에게 도움을 요청하기로 했고 그럴 때 우리 태권도부 전체는 그것을 빌미삼아서 아이스하키 부를 완전히 박살을 만들어 초토화시키기로 했다.
그녀는 올해 나이가 26세로 대학 졸업 후 같은 과목 전공으로 대학원까지 졸업한 수재(秀才)였는데 계속 공부를 위해 미국으로 유학을 가기 전에 잠깐 동안을 내가 다니는 학교에서 교편을 잡기로 했다는 것이다.
후에 안 사실이지만...
찬바람이 서서히 불면서 가을의 문턱으로 접어드는 어느 토요일 오후였다.
그녀가 우리들을 가르치기 시작한 지 이제 막 두 달째 접어들어 가는 때였다.
그동안 나는 그녀의 눈에 별로 띄이게 행동한 적은 없었다. 그리고 내 친구들은 여전히 교대 교대로 그녀의 뒤를 밀착 감시하고 있었고... 나는 그 덕분에 그녀가 사는 아파트(강남의 신사동이었다)까지도 알게 되었고 아파트에서 그녀의 언니(결혼한) 부부와 함께 살고 있음도 알아내었다. 그리고 뿐만 아니라 여전히 아이스하키부 놈들은 그녀를 호시탐탐 노리고 있다는 사실도 알게 되었다(그녀만 모르고 있었다).
그러는데 2학년 선배들이 수학여행을 떠나고 학교에는 우리 1학년과 3학년 선배들만 남아서 공부를 하고 있었다.
그 주 토요일은 수학여행을 간 2학년 선배들이 돌아오는 날인데(목요일날 떠났으니...) 오전 수업을 마치고 다들 일찍 학교를 빠져나갔다.
나와 우리 친구들 일행은 교정 운동장에서 농구를 하면서 시간을 보내고 있었는데 잠시 후 교무실에서 그녀(생물 선생)가 퇴근해 가는 것이 보였다.
우리는 운동을 하면서 그녀가 가는 것을 물끄러미 쳐다보았다.
잠시 후,
“야, 오늘은 누가 담당 하냐?...”
라고 묻는다. 그런데 하필이면 그 날은 내가 경호를 맡기로 한 날이었으므로 나와 내 친구 강석이(태권도 부의 서기를 맡고 있는...)가 그녀의 뒤를 따라 가기로 했다.
우리는 그녀가 가는 곳에서 멀찌감치 따라 미행하기 시작하였다.
그녀가 학교에서 나와 외대 앞에서 버스를 타려고 기다리고 있는 것이 보였다. 그리고 그녀는 잠시 후 버스를 탔다.
우리는 그 버스를 놓치면 안 될 것 같아 버스가 떠나기 전에 열심히 뛰어서 버스를 세워야 했다.
차장 아가씨는 투덜투덜하면서 버스를 세우더니 다음부터는 좀 먼저 나와서 기다리라고 한다.
결국 강석이와 나는 그 버스를 탈 수 있었다. 그런데 아뿔싸! 이게 왠일... 그녀는 버스에 타서 바로 문 쪽 옆에 서 있었던 것이다. 그녀는 우리를 보더니
“이제 집에 가니?”
하는 것이 아닌가... 이런...
“아, 예... 아니요... 어디 좀 갑니다...”
내가 대답하였다.
“그래? 음 하긴 오늘이 토요일이라 친구들도 만나구 하겠구나...”
“선생님은 이제 퇴근하는 길이신가 보죠?”
“응... 근데 어디 좀 들렸다 가려고...시내 좀 나가...”
“아 그러세요... 어디로요? 우리도 시내에 나가는 길인데...”
“그럼 니들 바쁘지 않으면 내 길동무 좀 해 줄래? 이상하게 요즘 누군가가 내 뒤를 따라 다니는 것 같아서... 영 낯선 길은 좀 그렇거든...”
“......”
강석이는 침묵을 지키고 있었다. 그래서 내가 얼른 대답하였다.
“그럼 그러세요...”
그렇게 해서 우리는 그녀와 함께 동행하게 되었다.
그녀가 가는 곳은 종로서적이었다.
가르치기 위한 부교재를 살펴보기 위한 것이었다.
지금은 교보문고, 을지문고, 심지어는 영풍문고 등이 종로와 시내 중심가에 많이 들어섰지만 당시만 하더라도 종로에는 종로서적과 동화서적(지금은 강남으로 옮겼지만...)이 고작이었다.
우리는 그녀가 여러 가지 책을 고르는 동안 그녀의 뒤를 졸졸 따라다닐 수 밖에 없었다. 그러나 차라리 이것은 편안 일이었다.
우리는 종로서적의 각 층마다 있는 화장실에서 전혀 예상치 못했던 아이스하키부의 몇 몇 놈들을 만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이로 미루어 짐작해 보건데 이 놈들은 여태껏 그녀의 뒤를 따라 다녔다는 이야기가 된다.
나는 긴장을 하지 않을 수 없었다.
드디어 올 것이 왔구나... 그 놈들은 모두 네 놈이었는데 상대가 나라는 것을 알아서인지 꽤나 긴장하는 눈초리였다.
그래서 나는 그녀 몰래 이 아이스하키부의 놈들을 매장 밖 계단에서 따로 만나,
“너희들의 의중을 내가 안다... 왠만하면 이쯤에서 미행을 중지해라...”
“동혁아... 너는 참견하지 말았으면 좋겠다... 우리는 너와 아무런 유감이 없잖냐...”
“현재 나는 그녀와 데이트 중이다..그러니 네 놈들이 그녀를 괴롭힌다는 것은 곧 나를 괴롭히는 것이다...그러니 왠만하면 이쯤에서 돌아가는 것이 어때?”
“그래? 동혁이 너하고 데이트라? 이거 빅뉴스가 되겠는걸... 하여튼 너 두고 보자...”
이렇게 해서 우리는 그 녀석들이 돌아간 줄로만 생각하게 되었다.
그 바람에 강석이는 오늘 자기 집에 외국에서 특별한 손님이 오시기 때문에 들어가 봤으면 좋겠다고 해서 나는 강석이를 들여보냈다. 그리고 나 혼자서만 그녀를 에스코트하기로 했다.
“이거 어떻게 하지? 미안해서... 고르다 보니 책이 좀 많아졌네... 꽤 많은데...”
“어? 이것들 혼자서 들고 가시기에는 좀 무겁겠는데요...”
“친구는 먼저 갔나 보지?”
“예... 일이 있다고 해서... 선생님... 이거 제가 선생님 댁까지 들어다 드리면 안될까요?”
“안되기는... 내가 미안해서 그런 거지... 괜찮겠니? 우리 집이 좀 먼데...”
나는 이미 그녀의 집을 알고 있었다. 그렇지만 그것을 표현할 수는 없었다.
이렇게 해서 나는 그녀와 함께 그녀의 집으로 향했다.
첫 만남이라서 그랬는지는 몰라도 차를 마신다든지 아니면 패스트푸드 점에서 무엇을 먹는다 하는 것은 꿈도 꾸지 못하였다.
그래서 나와 그녀는 일단 종로 서적을 나온 뒤 그녀의 집까지 택시를 이용하여 이동하기로 했다.
8권 정도의 책을 샀는데 제법 두꺼운 것도 있고 해서 조금 무거웠다.
결국 내가 그녀의 책들을 들어다 주지 않으면 안 되게 된 것이다.
태기를 타고서는 신사동까지 갔다.
압구정동과 신사동은 바로 이웃해 있었다.
그녀의 집은 한양 아파트 X단지 X동 1302호였다.
내가 그녀와 함께 내려서 그녀가 사는 동 앞까지 가서는 그녀에게 책을 전달해 주고 가려는데,
“잠깐 올라가서 차 한잔하고 갈래? 마침 집에 아무도 없거든...”
집에 아무도 없다니... 이게 무슨 말인가?
“부모님께서는 어디 가셨나 보죠?”
“아... 있잖아... 난... 부모님과 함께 사는 것이 아니고 언니네 하고 함께 살고 있어...그런데 마침 언니 네가 오늘 시댁엘 갔거든... 오늘 그쪽 집안에 무슨 모임이 있다고 해서... 아마 모르긴 몰라도 내일이나 되야 올 거야...”
‘와우~~~’
이건 나에게는 완전히 복음과 같은 소식이었다. 그래서 나는 마지못해 응낙하는 사람처럼...
“그럼...그러죠...뭐...”
하고 그녀와 같이 올라갔다. 그녀의 아파트는 13층에 위치하고 있었다.
34평의 아파트는 평수만큼 넓어 보이지는 않았다.
나는 소파 앞에 있는 탁자 위에 책을 올려놓고 소파에 앉았다.
그녀는 내가 앉는 것을 보고는 잠시 그녀의 방인 것 같은 작은 방에 들어가서 옷을 갈아입고 나오더니 주방으로 들어갔다.
시원한 음료수를 내 오기 위해서였다.
그녀의 방에는 아직 들어가 보지 않았다.
아마도 혼자 사는 아가씨 방답게 정갈하게 꾸며 놓았을 것이 틀림이 없었다.
그녀는 무릎 밑으로 약간 내려오는 시원해 보이는 플레어스커트와 미키마우스가 그려진 앙증맞은 티를 입고 나왔다.
“있잖아... 동혁아... 지금 시간이 다섯 시가 넘었는데 좀 있다가 내가 맛있는 저녁 만들어 줄 테니 먹고 갈래? 왠지 나 혼자 먹는 것이 좀 그래서 그래...”
“예 그렇게 할게요... 맛있는 거 주신다면...후후후...”
“얘는, 그럼 맛있는 거 해주지. 뭐 먹고 싶지. 우리 맛난 고기 구어 먹을까?”
“좋죠... 그럼 그러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