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하여 나는 동정(童貞)을 잃고 말았다.
어처구니없는 얘기지만 그것은 숨길 수 없는 사실이었다.
나는 비로소 그 신비한 환상속의 여자라는 정체를 어렴풋이나마 알게 되었던 것이다.
순식간에 환상의 껍질은 벗겨지고 무언가 단번에 손에 잡힐 듯한 야릇한 실체로서 여
자가 느껴지기 시작했다.
순호는 정말 처음인가 봐.
불을 끄고 잠을 청하면서 미야누나는 들뜬 음성으로 그렇게 소근댔다.
그런 미야누나가 나는 조금도 싫거나 미워지지가 않았다.
나에게 처음인 것 같다고 그렇게 말하는 미야누나, 자신은 그것이 처음이 아니라는 은
근한 암시에 나는 약간 섭섭한 기분을 느꼈을 뿐
이었다.
미야누나가 만일 아직 한 번도 남자에게 몸을 내맡겨 본 일이 없었던 깨끗한 처녀였다
면, 나는 더욱 당황해서 어쩔 줄을 몰랐을 것이
다.
그러나 미야누나는 처녀가 아니었다.
남자를 너무나 잘 알고 있는 요부 같은 여자라고 나는 그렇게 미야누나를 포옹하며 생
각했던 것이다.
그날밤 미야누나는 나를 또 한차례의 짜릿한 순간을 맞게 해주었고, 나는 난생 처음하
는 섹스를 하루밤에 몇 차례나 하고 지쳐서 잠이
들었다.
이튿날 아침 헤어지면서 미야누나는 자기집의 전화번호를 알려주며, 언제든지 전화를
걸어도 좋다고 말했다.
미야누나는 조금도 어색하다거나 부끄러워하는 기색도 없이 나의 뺨에다 재빨리 입을
맞춰 주더니 총총히 멀어져 갔다.
집으로 돌아오자 죽음의 그림자가 온 집안을 황량하게 만들어 놓고 있었다.
어머니는 죽은 듯이 누워 있었고, 누나 친구인 순자와 경희가 어머니 앞에 앉아 어머
니를 위로하고 있었다.
마는 머리 속이 온통 미야누나로 가득 차있어 누나의 죽음마저 희미하게 느껴질 정도
였다.
그러는데 경희누나가 갑자기 미야누나의 얘기를 꺼냈다.
미야 계집애, 그것 무슨 염치로 나타난 것지?
그 소리에 나는 귀가 번쩍 뜨였다.
누가 아니래. 앙큼한 게, 순지를 그렇게 만든 게 누군데.......
순자누나가 종알거렸다.
나는 갑자기 어리둥절해지고 말았다.
미야누나가 무얼 어쨌단 말인가?
뒤가 켕겨 선뜻 나설수는 없었지만, 이윽고 경희누나를 돌아보며 넌지시 물어보았다.
왜? 미야라는 여자가 어쨌는데?
아무것도 아냐, 넌 알 것 없어.
경희누나가 나의 물음을 한 마디로 잘라 버렸다.
그럴수록 나는 더욱 궁금해서 견딜 수가 없었다.
그러나 다시 뭐라고 더 물어볼 수도 없었다.
나는 공연히 속이 부글부글 끓어오르는 것 같았다.
이윽고 경희누나가 먼저 일어나 집으로 돌아가자 나는 슬그머니 뒤따라 나갔다.
경희누나! 무슨 얘기야? 그 여자가 우리 누나를 어떻게 했는데?
넌 알 필요 없다니까.
경희누나는 여전히 대답을 거절했다.
그래도 나는 멈추지 않고, 나란히 따라가며 끈질기게 졸라댔다.
그제야 그녀는 마지못한 듯이 입을 열었다.
누나를 그렇게 병이 들어 죽게 만든 것이 바로 미야누나라는 것이다.
여학교때의 젊은 국어 선생은 순지누나를 몹시 사랑했다는 것이었다.
그 선생은 누나하고 결혼할 생각까지 가지고 있었다고 했다.
그런데 그 사이에 미야누나가 끼어들었다는 것이었다.
그러자 나는 문득 누나의 무덤 앞에서 미야누나가 하던 얘기가 떠올랐다.
그 선생이 술이 취해 순지누나 앞에서 사랑을 고백했다는 얘기며, 그래서 순지누나는
자기를 모욕하는 것이라고 분해서 어쩔 줄을 몰
라했다는 얘기가 번개처럼 머리를 스치고 지나갔다.
그런 얘기를 할 때 미야누나의 태도는 완전한 객관적인 입장을 취하고 있었던 것이다.
자기도 그 선생을 좋아하고 있었다거나 사랑한다고는 단 한 마디도 꺼내지 않았다.
그런 미야누나가 그 선생과 순지누나의 사이가 거의 결정적인 단계에 이르렀을 때 느
닷없이 나타나 그 선생을 유혹하기 시작했다는 것
이다.
마침내 선생은 미야누나의 집요한 유혹 앞에 맥없이 끌려가 버렸고, 순지누나는 학교
를 졸업하자마자 병으로 들어눕고 말았다는 것이
다.
그때 누나가 처음 앓고 들어누웠을 때 어머니도 나도 그저 몸살이려니 하고 대수롭잖
게 생각했을 뿐이었다.
그러나 우리집 살림을 돌봐 주고 있던 청상과부인 이모가 몇 번이나 순지의 병이 심상
찮다고 뇌까렸을 뿐이었다.
순지누나는 평소에도 자기 속을 드러내 보이지 않는 철저한 내성적인 성격이었다.
누나는 천성적인 꽁한 성격에다 그런 충격을 받자 마침내 누에꼬치처럼 스 쓰라린 비
밀 속에 깊이 들어앉아 버렸던 것이다.
얼마의 시간이 흐른 뒤에야 누나의 병명은 폐결핵으로 밝혀졌고, 가족들이 아무리 타
일러도 누나는 병원이고 약이고 모조리 물리쳐 버
렸다.
어머니가 울며불며 간신히 약을 복용시켰으나 자기 속에서 받아들이지 않는 약이 몸에
좋을리는 없었다.
순지는 미야가 죽인 거나 마찬가지야.
그것은 마치 미야가 내밀어 준 독약을 순지누나가 마다하지 않고 그대로 받아마신 거
나 마찬가지라고, 경희누나는 울분에 치밀어 쫑알
거렸다.
마침내 나는 어리둥절한 상태에 빠지고 말았다.
도무지 내 자신을 어떻게 추스려야 할는지 알 수가 없었다.
미리부터 내가 그 모든 사실을 알고 있었다면, 결코 미야누나의 유혹에 끌려들지는 않
았을 것인데.........
그런 후에 미야누나는 그 선생과 얼마 동안 어울려 다니다가 다시 그 선생한테서 돌아
서 버렸다는 것이었다.
그러자 그 선생도 마침내 술에 빠져 학교를 쫒겨나게 되었고, 요즘은 알콜중독자가 되
어 거지처럼 거리를 헤매고 있다는 경희누나의
마지막 얘기였다.
그러고 보니 미야라는 그 여자는 지독한 요부로군.
나의 말에 경희누나는 미간을 찌푸리고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나 나는 경희누나의 그 모든 얘기를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 몰랐다.
그런 얘기가 모두 사실이라면, 미야누나라는 여자는 평범한 그런 여자가 아니라, 어딘
지 무서운 독기를 품은 요부 같은 여자임에 틀림
업었다.
그녀는 서로 사랑하는 두 남녀 사이에 뛰어들어 두 사람을 한 꺼번에 파멸시켜 버린
거나 마찬가지였다.
그런 무서운 여자에게 동정(童貞)을 빼앗겼다고 생각하자 나는 전신에 소름이 쭉 끼치
는 것 같았다.
그러나 나로선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그렇게 요염한 알몸으로 뜨겁게 부딪쳐 오는 그녀를 나 같은 애숭이가 어떻게 견디어
낼 수가 있단 말인가?
그것은 뒤늦게 돌이켜 보아도 도무지 불가능한 일이었다.
나는 죽은 누나에게 무서운 죄를 저지른 것 같은 무거운 기분으로 며칠 동안 누워 있
었다.
다음날부터 어머니는 간신히 일어나 시장으로 나갔다.
어머니는 시장에서 포목상을 벌이고 있었다.
그것이 우리집 생계의 유일한 방편이었다.
집안 살림은 어머니의 동생인 이모가 맡아서 했는데, 이모는 스물 일곱에 과부가 되어
십 년을 혼자 살아 오고 있었다.
마침 자식들도 없으니 마땅한 자리에 재혼이라도 하라고, 어머니가 밤낮 권해 보아도
이모는 들은 척도 하지 않았다.
그러나 이모가 그렇게 혼자 살고 있는 건 무슨 수절을 한다거나 죽은 남편을 잊지 못
해서 그러는 것은 결코 아닌 것 같았다.
이모는 첫결혼에 단단히 멀미가 난 것 같았다.
아니면 지독한 남성혐오증에 걸려 있는지도 모를 일이었다.
언젠가 어머니와 주고받는 얘기를 엿듣고 나는 그런 생각이 들었다.
어디 남자 아니면 못사우? 난 지금 생각해도 지긋지긋해.
이모의 쫑알거림에 어머니는 어처구니없다는 듯이 키들키들 웃었다.
모조리 자기 성질에 맞게 여자를 부릴려고 드는데 그걸 어떻게 견뎌? 글쎄 닷새를 몸
살을 앓고 있는데, 밤마다 덤벼들어 올라타고는
쑤셔대는 거야. 그 짓을 그것도 하루밤에 한 두번도 아니고 서 너번씩 해 대는데, 나
중에는 아래도 쓰라리고 아파서 불이 나는 것 같
았어. 그게 어디 사람이유? 지긋지긋해.....
이모의 얘기속에서 그 짓이라는 말을 나는 처음엔 무슨 뜻인지 분명히 알 수가 없었지
만, 이윽고 그것이 남녀 사이의 그런 관계를 가
리키고 있음을 알게 되었다.
그런 후로는 나는 이모를 마주 대하면 웃음부터 킥킥거리며 터져나왔다.
그리 못 생긴 얼굴도 아니고 곱상스런 예쁜 얼굴에 콧날이 오똑하고 버들처럼 가느다
란 몸매가 사내 하나쯤 후리기엔 충분한 조건을
갖추고 있었다.
그런데두 애는 왜 하나두 안 생겼는지 몰라. 난 아마 시작부터 망단을 해 버렸나 봐.
그 말에 어머니도 이모도 함께 웃음을 터뜨리고 말았다.
그렇게 남자를 지긋지긋해 하면서도 여자 본능의 모성애(母性愛)는 어디엔가 숨어 있
는 것 같았다.
닷새 동안을 몸살을 앓고 있는 이모에게 밤마다 덤벼들어 그 짓만 하곤 했던 남편에게
이모는 다시 남자를 생각하고 싶지 않은 지긋지
긋한 혐오를 심어받은 것 같았다.
그런 이모가 언제나 집을 지켰다.
마침내 나는 집을 나와 공중전화 곁으로 뛰어가고 말았다.
닷새 동안을 그렇게 들어누워 참아냈지만, 더 이상 참을 수가 없었던 것이다.
설사 미야누나가 순지누나를 죽여 버린 살인자라고 하더라도, 나는 미야누나에게 전화
를 걸지 않고는 견딜 수가 없었다.
그것은 가슴 밑바닥에서 밀어오는 그리움이 아니었다.
보고 싶다거나 손을 잡고 싶다는 그런 마음보다 나의 온 몸이 미야누나라는 여자를 향
해서, 아니 더 정확하게 말하자면 미야누나의 부
드러운 육체, 즉 탱글탱글한 유방과 내 성기가 한 없이 나를 끌어들이고 있었다.
처음으로 나에게 여자를 알려 준 미야누나의 요염한 매력은 나의 전신에 스며들어 있
었다.
그런 야릇한 매력과 누나를 죽였다는 알 수 없는 분노가 뒤섞여 더욱 그녀를 만나고
싶었다.
미야누나의 집은 아주 부자라고 했다.
그러나 그런 것은 나하고 조금도 상관 없는 일이었다.
이윽고 나는 공중전화의 수화기를 들고 다이얼을 돌렸다.
뒤이어 신호가 울려가더니 누군가 전화를 받았다.
낭낭한 여자 목소리였다.
여보세요?
나는 잠시 망설였다.
그 소리는 미야누나가 아닌 것 같았다.
그러는데 다시,
여보세요!
하고 여자 목소리가 조금 높게 울렸다.
그제야 나는 간신히 수화기에 대고 더듬거리듯 입을 열었다.
저 미야.....누나 계십니까?
누구시죠?
여자는 짓궂은 투로 물었다.
나는 다시 말문이 막히고 말았다.
누구라고 선뜻 밝힐 수가 없었다.
그러자 수화기 저쪽의 여자가,
잠깐만 기다리세요,
하더니 누구를 부르는 소리가 들렸다.
그러더니 잠시 후에 누군가 다시 전화를 받았다.
여보세요! 누구시죠?
저....순호예요.
뭐? 순호라고?.....어머! 왜 그렇게 소식이 없었니? 무척 기다렸단 말야. 지금 거기
가 어디야?
공중전화라고 대꾸하자 미야누나는 급하게 말을 받았다.
그럼 명동으로 나오겠니? 나 지금 바로 나갈 테니까.
내가 그러겠노라고 대답하자, 미야누나는 명동에 있는 카페 이름과 위치를 자세히 알
려 주고는 전화를 끊었다.
나는 어안이 벙벙해지고 말았다.
그렇게 삼킬듯이 미야누나가 나를 반길줄은 미처 몰랐던 것이다.
나는 공연히 가슴이 부풀어 올랐다.
버스에 오르자 나는 전신이 뜨거워지는 것 같았다.
미야누나와 다시 만나는 그 시간 이후의 내 자신을 나는 도무지 종잡을 수가 없었다.
미야누나는 무엇 때문에 나에게 그렇게 친절하게 대해 주는 것일까?
그러나 그 대답은 한 가지가 아닌 여러 가지로 나타났다.
나를 단순히 부담없이 만만한 그런 불장난의 상대로 잡아 두기 위해서 그러는 것인지
도 몰랐고, 아니면 죽은 누나에 대한 어떤 양심의
가책으로 동생인 나에게 친절을 베풀고자 그러는지도 몰랐다.
그러나 한 가지 분명한 사실은 미야누나가 나를 좋아한다는 것이다.
그것이 나를 귀여운 동생 같은 그런 기분으로 그러는 것이든, 아니면 이성인 남자로서
어떤 이끌림 때문에 그러는 것이든, 나는 미리
부터 그런 걸 따지고 싶지는 않았다.
나는 이제 막 여자라는 신비한 제목의 책을 한 장 한 장 넘기려는 순간에 있었다.
이미 책의 뚜껑은 열어 보았고, 그 다음 페이지의 내용에 무서운 호기심이 쏠려가고
있었다.
순지누나의 죽음에 대한 석연찮은 기분도 그런 호기심 앞에서는 빛이 희미해지고 말았
다.
얼마 후 미야누나가 일러 준 그 카페로 들어서자, 그녀는 어느새 먼저 나와 입구의 자
리에서 손을 번쩍 들어 보였다.
내가 맞은편 의자에 앉자, 미야누나는 부드럽게 미소를 흘리며,
며칠만에 보니까 순호가 더 어른이 된 것 같아,
하고 제풀에 까르륵거리며 웃음을 떠트렸다.
나는 그만 피식 웃고 말았다.
그럼요, 더 어른이 됐지요. 나도 이젠 여자를 알고 있단 말이요.
그런 말이 입 속에서 뱅글뱅글 돌았다.
아가씨가 다가와 커피와 밀크의 주문을 받아갔다.
카페는 와글대고 있었다.
생생하게 살아 있는 사람들의 지껄이는 소리가 문득 공동묘지의 귀신들의 괴괴한 울음
소리와 묘한 대조를 이루며 나의 귓전을 간지럽
혔다.
문득 살아 있다는 것이 우습게 느껴졌다.
자기가 죽으리라는 것을 분명히 의식하고 그렇게 떠들고 있는 사람은 한 사람도 없는
것 같았다.
그 새 왜 한 번도 전화하지 않았어?
미야누나는 나를 잠시 찌를듯이 흘겨보며 물었다.
나는 싱긋 웃어 버리고 말았다.
뭐라고 그 동안의 사정을 설명한다는 것이 쑥스럽게 생각되었던 것이다.
왜, 후회했니?
미야누나는 야릇하게 눈을 굴리며 다시 물었다.
나는 잠자코 고개를 가로저었다.
후회했다면 나는 다시 미야누나를 만나러 오지 않았을 테니까 말이다.
그러자 미야누나는 활짝 웃더니 문득 이렇게 중얼거렸다.
순호는 좋아. 아주 좋아.
나는 두 눈이 휘둥그래지고 말았다.
그 말이 무슨 뜻을 지닌 말인지 도무지 알 수가 없었다.
순호가 좋다는 말이 아니고, 순호는 좋다는 미야누나의 말이 나는 알듯 모를듯 머리
속이 간지러웠다.
미야누나의 입장에서 내가 좋다는 말인지, 객관적인 입장에서 내가 좋다는 말인지 분
명하게 이해할 수가 없었다.
그러는데 갑자기 미야누나가 키들키들 웃었다.
차를 마신 다음 나는 미야누나를 뒤따라 카페를 나왔다.
내가 가는 데는 어디든지 가도 좋아, 괜찮지?
미야누나는 내 손을 꼭 움켜잡고 생그래 웃었다.
미야누나의 그런 말에 나는 문득 거역할 수 없는 어떤 암시를 느꼈다.
어느새 날이 저물고 명동 거리는 인파로 붐비고 있었다.
나는 그 인파 속을 비집고 미야누나를 따라 충무로쪽으로 나갔다.
나는 미야누나에게 어디로 가느냐고 물어 보지도 않았고, 또 물어 보고 싶지도 않았다
.
알 수 없는 야릇한 호기심만이 나의 머리 속을 가득 채우고 있었다.
이윽고 미야누나는 뜻밖에도 길가의 술집으로 나를 끌고 들어갔다.
나는 두 눈이 휘둥그래지고 말았다.
누굴 잠깐 만나고 갈 거야.
그러더니 그녀는 왁자지껄한 실내를 잠시 휘둘러보고는 문득 한 곳에 시선이 멈추었다
.
미야누나의 시선이 멈춘 구석자리에 수염이 제멋대로 자란, 서른 너덧 되어 보이는 남
자가 혼자서 천천히 술을 마시고 있었다.
회색 바탕에 체크 무늬가 희미한 싸구려 코트를 걸친 그 남자는 다른 사람들의 시선
따위는 아랑곳없이 고개를 수그린 채 술 마시기에
여념이 없었다.
미야누나의 찌푸린 얼굴이 잠시 굳어지는 듯하더니, 이내 카운터의 청년을 돌아보며
물었다.
저기 구석자리의 이선생, 술값이 얼마죠?
그러자 청년이 잠시 계산서를 훑어보더니,
지금 현재까지 사만 오천원인데요,
하며 의미 있게 싱그레 웃었다.
그제야 나는 머리 한쪽에 번개처럼 스치고 지나가는 죽은 누나의 생각과 더불어 시인
이라고 하던 젊은 국어 선생이 떠올랐다.
저 사람이 누구죠?
핸드백을 열고 오만원짜리 수표 두 장을 꺼내어 청년에게 내밀어 주는 미야누나에게
나는 그렇게 물었다.
그러나 미야누나는 연민과 원망에 젖은 시선으로 그 남자를 잠시 돌아보더니 갑자기
나를 소매를 잡아끌고 도망치듯 술집을 나왔다.
그 사람이 누군지 순호는 알구 싶어?
미야누나가 조그만 소리로 되물었다.
그제야 나는 나의 짐작이 적중했음을 깨달았다.
그렇게 되묻는 미야누나의 침울한 목소리가 그것을 알려 주었다.
그 남자는 죽은 누나를 사랑하다 다시 미야누나에게로 돌아서 버렸다는 바로 그 선생
이었다.
시인이라고 하던 그 두 글자가 자꾸만 나의 뇌리에서 또렷하게 되살아나고 있었다.
그 사람은 이미 죽은 사람이야.
내가 뭐라고 대답도 하기 전에 미야누나는 그렇게 말하더니 갑자기 나의 손을 잡아끌
며,
순호야! 우리 집에 놀러가! 응? 괜찮지?
하고 생긋 웃으며 나를 돌아보았다.
괜찮지? 하는 나의 의사를 무시하는 듯한 미야누나의 말꼬리가 어쩐지 정답게 느껴졌
다.
그러나 나는 아무런 대꾸도 하지 않았다.
술집에 앉아 있던 그 남자가 누구라는 분명한 얘기를 미야누나로부터 들어야겠다는 생
각이 치밀었다.
그 남자는 왜 이미 죽은 사람이죠?
아, 그 사람 이선생 말이지?
미야누나는 잠시 말을 끊고 나를 힐끔 돌아보더니,
내가 얘기했지? 왜 국어 선생이고 시인이라는 얘기 말이야?
내가 잠자코 고개를 끄덕이자,
바로 그 사람이야, 순지를 사랑한다구 공연히 술을 먹구 그러더니, 그만 완전히 타락
하고 말았어.
미야누나의 목소리가 갑자기 풀이 죽어 버렸다.
미야누나는 아직도 자기 비밀을 그대로 지닌채 분명한 얘기를 털어놓지 않았다.
나는 문득 미야누나에게 그 문제를 사실대로 따져 보고 싶은 야릇한 충동을 느꼈다.
비로소 나는 반신반의(半信半疑)하고 있던 경희누나의 얘기가 사실이라는 것을 깨달았
다.
미야누나가 가운데 뛰어들어 두 사람을 일시에 파멸시켜 버렸다는, 무서운 결과를 나
는 그제야 눈 앞에 똑똑히 보는 것 같았다.
그러나 나는 미야누나에게 뭐라고 따질 수는 없었고, 또 미야누나 때문에 순지누나가
그렇게 죽었다고는 생각하고 싶지도 않았다.
그것은 어디까지나 순지누나 스스로의 운명이라고 생각했다.
실상 그것은 부정할수 없는 사실이었다.
순호야! 우리 그런 얘기 그만 두자!
미야누나가 괴로운 듯이 미간을 찌푸리며 말했다.
나는 말없이 고개만 끄덕였다.
그러나 미야누나가 왜 그 사람의 술값을 치뤄 주느냐고 입 안에서 뱅뱅 돌고 있던 질
문을 나는 꿀꺽 삼키고 말았다.
그렇게 미야누나가 그 사람의 술값을 대신 치뤄 주는 것이 한두 번이 아닌 것 같았다.
미야누나로부터 돈을 받으며 묘하게 웃고 있던 카운터의 청년이 그런 내막을 암시해
주었던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미야누나로선 어쩔수 없는 일인지도 몰랐다.
나는 그 시인이라는 남자가 끝없이 불쾌한 존재로 느껴졌다.
순지누나도 미야누나도 한참 피어오르던 아름다운 순정을 그러 볼품 없는 남자에게 서
로 바치겠다고 암투를 한 것 같았고, 끝내는 어
느쪽의 승리도 아닌 비참한 결과에까지 이르고 말았던 것이다.
나는 웬지도 모르게 그 남자를 만나 보고 싶었다.
그러나 만나서 어떻게 하겠다는 그런 구체적인 생각은 떠오르지 않았다.
다만 죽은 누나가 한때나마 사랑했던 남자로서 그를 만나고 싶다는 생각뿐이었다.
그러나 어느새 미야누나가 택시를 잡아 뒷문을 열고는,
순호야! 어서 타!
하고 나를 차 속으로 밀어넣었기 때문에 그런 생각은 끝장이 나고 말았다.
택시는 장충단 공원 앞을 지나 한참이나 달리다가 미끄러지듯 멈추었다.
이른 봄날의 밤공기는 겨울처럼 싸늘했고 봄은 아직 달력 위에만 머물러 있는 것 같았
다.
나는 문득 꽃샘바람이란 말이 생각났다.
일찍 피어난 꽃을 시기하여 불어오는 찬바람이라면, 그것은 무언지 미야누나와 순지누
나 사이에 있었던 그런 일과 어딘지 비교되는 무
엇이 숨어 있는 것 같았다.
그러나 꽃샘바람은 미야누나의 것이었다.
순호는 우리집이 처음이지?
외등이 화안한 골목길로 들어서며, 미야누나가 그렇게 묻더니 다시 말을 이었다.
내 정신좀 봐, 순호가 언제 우리집에 와 본 일이 있었나? 그런 걸 공연히 물었지?
그러면서 키들키들 웃었다.
미야누나는 그 술집에서 나온 뒤로 무언지 머리 속이 어지러운 것 같았다.
타락해 버렸다는 그 선생의 술값을 치뤄 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