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동 쉽게 보기 : 오마이러브

한국미녀
오마이러브
밍키넷 0 3,980 2023.08.21 13:51
Oh My Love
오마이러브 








방학이 시작되고, 육칠 십 년대에나 가능했다는 무전여행을 감행했다. 서울역에서 새벽부터 돈을 구걸하자, 생각보다 많은 돈이 모였다. 의외로 마음 좋은 사람이 많았다. 지갑을 잃어버렸다는 말도 하고, 무턱대고 손을 내밀기도 했고, 사실대로 무전여행을 위해서라고 하기도 했다. 
물론 사람 봐 가면서. 누워서 떡 먹기 정도까지는 아니었지만, 예상한 것보다는 쉬웠다. 
요즘도 그런 미친 짓 하는 녀석이 다 있냐면서 즐거워하는 사람들도 꽤 많았기에 어떤 점에서 수확이라면 수확이었다. 많이 보고 많이 느끼고 싶었기에 감행하는 만큼, 즐거워졌다.
처음 며칠 동안은 대구에, 다음은 구걸로 2만원을 모아 부산으로 내려갔다. 
유사시에 필요한 신분증과 지도와 돌아보려고 생각해둔 지역의 경찰서 전화번호와 밥을 공짜로 주는 곳의 위치를 꼼꼼하게 적은 수첩 이외에 내 것이라고 부를 수 있는 것이 없었기에 굶주림은 이틀을 넘기지 못하고 찾아왔다.
두륜산인지, 두류산을 올랐을 때도 그랬지만, 금정산을 오르자 확실히 우리나라 땅덩어리가 얼마나 작은지 알 수 있었다. 
다 봤다. 
뻥! 
다 보지는 못했다. 하지만, 어디를 둘러봐도 빼곡이 들어찬 도시는 숨쉴 틈도 없어 보였다. 
여름방학이라 다행이었다. 만약 겨울이었으면 추워서 역에서 잔다는 건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을 것이었다. 
벌레 물림 방지 약으로 온 몸을 무장하고 있어서 그렇게 물어 뜯기지도 않았다. 아침은 사랑의 뭐라는 곳에서 무료 시식을 하고, 점심은 굶고, 저녁은 2천 원하는 밥을 사먹었다. 반찬이야 별 볼일 없지만, 빵이 아니라 밥을 먹었다는 생각에서 오는 포만감은 값으로 메길 수 없었다.
초읍 도서관에서 하루를 잤다. 학생증이 있고, 월요일 일요일만 아니라면 밤샘이 가능한 국립도서관에서의 잠자리는 비를 피할 수 있다는 것과 함께 좋아하는 책에 둘러싸인다는 장점을 가지고 있었기에 잠을 자는 김에 좋아하는 작가의 책 두어 권도 읽을 수 있었다. 한 권은 읽었는데 나머지는 졸음에 취해 읽는 둥 마는 둥 했지만, 빌리지는 않았다. 
주소를 기입하고 학생증을 맡기면 빌려갈 수야 있겠지만, 학생증이 없으면 자칫 다쳤을 때 신원을 증명할 수도 없을뿐더러 아침밥도 어떻게 될지 모르는 상황에 처하게 되니까… 그렇게 좋아한다고 자부했던 책이지만, 한끼 식사에는 댈 만한 게 못 되었다.
서둘러 도서관을 나와 부산역으로 향했다. 
도착하자 이미 길다란 노숙자의 줄이 서너 겹으로 쌓여 식판을 기다리고 있었다. 너무 늦은 건 아닌가 걱정이 되었다. 만약, 밥이 앞에서 끊기면 가까운 헌혈의 집으로 가야했다. 오백 뽑고 나면 평일 낮 시간 영화관람권과 요기 거리 나오니까 말이다. 이렇게 줄일 길 줄 알았으면 도서관에서 그 책이라도 빌려오는 건데.

"학생, 식판 안 드나?"
"네? 네."

다들 다를 바 없는 처지라서 그렇겠지만 꾹꾹 눌러 퍼 담아줘도 더 달라는 말을 잊지 않아서 어느새 차례가 된 것도 모르고 있었다. 피를 뽑지 않아도 된다는 안심에 얼굴의 긴장이 풀어졌다. 땀 냄새가 가시지 않은 체구에서는 삶의 고단함이 풍겨져 나와 나도 모르게 몸이 움츠러들었던 모양이었다. 
그들은 어떤 아픔을 겪었던 것일까 하는 궁금함에 숟가락과 젓가락을 열심히 움직이며 혼자 그림을 그려갔다. 드라마의 삼류신파가 완결되었을 때, 식판도 깨끗해져 있었다.
대구에서 내려올 때 무궁화 입석 기차표를 사고 학생증과 함께 차비를 냈기에 주머니에는 이제 동전 몇 개밖에 남지 않았지만, 서울에서 여기까지 빈손으로 왔기 때문인지, 그 동전 몇 개도 웬만한 금붙이 못지 않게 자랑스러웠다.
노숙자 아저씨는 그런 모습이 안쓰러웠는지 자신이 오늘 마실 소주 값일 게 분명한 돈을 손에 쥐어주시기도 하셨다. 어쩐지 그를 속여 갈취해버린 건 아닌가 죄스러웠다. 서울 집으로 돌아간다고 해도 부자는 아니지만, 그래도 돌아갈 집 없는 그보다는 나은 처지이니 말이다. 안 받을 수도 없고…, 어른의 성의를 생각해서 받기는 했지만 면목이 없어서 차마 고개를 들지는 못했다. 열심히 살아라 아직 젊으니까 다 잘 될 거라고 어깨를 두들기시곤 식판을 박스에 넣고 그 자리를 떠나셨다.
차표 값이나 거리 이름을 쓰지는 않았지만, 눈길이 닿는 곳에서, 발길이 닿은 곳에서는 반드시 걸음을 멈추고 주의 깊게 바라봤다. 사진을 찍으면 되지 않겠느냐고 묻는 사람이 있겠지만, 다양한 생각을 남기기 위해선 아무것도 남겨선 안 되는 법이다. 
색즉시공 공즉시색이라고 하지 않았던가. 그래서 시작한 여행이고, 이어지고 있는 여행이었다.
부산에 들렀으면 당연하게 가야하는 해운대 대신, 대구에서처럼 무슨무슨 산을 찾았다. 어제는 금정산이었으니 이번에는 어디를 갈까 하고 지도를 폈는데 바다 가까이에 구덕산이라고 찍힌 지명이 눈에 들어왔다. 
뭐랄까 입체사진도 아닌데, 그 글자만 시야를 파고 들어왔다. 부산역 안에 기차가 도착했던 것인지 사람들이 우 쏟아져 나오고 그 사람을 잡기 위해서인지 택시기사 아저씨가 지명이름을 부르짖으며 호객행위를 했다. 
이름과 같은 그것에 피식 웃음을 던지고, 구덕산으로 향했다.
부산역에서 구덕산을 향해 가는 버스가 있어서 빠르게 도착했다. 너무 빠르게 도착해서 어쩐지 허탈하기까지 했다. 
그림을 배워야할까 하고 잠시 고민에 빠졌다. 이름을 아는 꽃보다 모르는 꽃이 많다는 건 그런 대로 참을 수 있었지만, 눈으로 뻔히 보고 있는 꽃의 색이 미묘할 때는 답답했기 때문이었다. 
서울에 가면 당장에 그림을 배우자. 그보다는, 색채도구를 사는 게 나을까. 다색 그림물감을 사서 그 색을 깡그리 다 외우자. 그게 낫겠다. 그렇게 하자.
결심하고 돌아선 나는 버스 종점에서 가까운 도서관으로 향했다. 도서관에서도 확연히 알아차릴 수 있는 예쁜 산등성이며 산허리들이 울긋불긋 물들어 있었다. 벌써 가을 준비를 하는 청춘의 잎새들이 바쁘게 움직이고 있었다. 참, 아름다운 나라 우리나라 좋은 나라, 절로 노래가 나왔다.

"쿡, 야, 노래 잘한다?"

깜짝 놀란 내가 휙 돌아보자, 그 앞에는 또래로 보이는 남자애가 담배를 피며 서 있었다. 현재 연예계에서 활동하는 연예인 중, 경상도 출신 남자애가 많다는 통계를 어딘가에서 본 기억이 났다. 서울에 살면서 연예인 한 번 못 본 촌놈이지만, 앞에 선 얘가 잘 생겼다는 것만은 확실히 알 수 있었다. 매력이 있었다. 사람의 시선을 받는 것에도 익숙한 모양인지 내가 뚫어져라 쳐다보는데 눈 하나 깜짝하지 않았다.

"너… 누구야?"
"나? 김철수. 니넌?"
"철수?"
"그래. 철수와 영희 할 때 그 철수. 니넌 이름이 모꼬?"
"나는 수영. 정수영이라고 해."
"수용?"
"아니, 수. 영."
"수영장 할 때 그 수영 말이가?"

활자매체로 접해본 적이 있는 사투리였지만, 역시 듣는 것과 보는 것은 차이가 있었기에 그의 말을 들어도 바로바로 머리에 입력이 되지 않아서, 철수를 기다리게 만들었지만 철수는 내가 순수 서울 토박이라는 것을 불쌍하게(?) 생각했는지 끈기 있게 기다려주었다.

"응."
"친척집 왔나?"
"아니."
"그라모?"

잠깐 뭐라고 대답해야 할지 몰라 망설였다.

"무신 생각을 하노? 퍼떡 대답 안하고?"
"아…미안,  무전여행… 무전여행 왔어."
"무전여행? 무전여행이 모꼬?"
"돈 하나도 없이, 여행하는 거야."
"크크큭, 니 말하는 거, 대끼리 우낀다. 니 아나? 서울내기는 다 니맹쿠로 말하나? 신기하네."
"신기해? 뭐가?"
"근지럽다."
"어?"
"근지럽다꼬. 근질근질, 모리나?"

그러면서 철수는 바디 랭귀지를 시도했다.

"아, 간지럽다고? 왜?"
"말하는 사람은 모리는 갑네? 아이다 그기 아이지, 서울 아-들은 다 그래 말하나? 그라모, 다들 그래 듣고도 아무치도 안한갑지?"

그렇게 말하고는 혼자서 키득거렸다. 

"니 부산에는 아는 사람 아무도 없나?"
"응."
"완전히 혼잔기가?"
"응. 왜?"
"흠, 어디어디 들릿노?"
"뭘 들어?"
"아-씨팔아, 부산까지 올 정도면 전국으로 다 돌았다는 얘기 아이가? 어디 갔었노 말이다."
"아, 무궁화 기차 타고 마음에 드는 도시에 내렸어. 간 곳이라고는 대구랑, 부산. 겨우 두 군데 뿐이야."
"십 원 땡전 한 푼 없이?"
"응. 무전이니까."
"씨발, 좆나게 멋지다, 니."

시샘을 하는지 그렇게 말하며 철수는 나를 잠시 노려봤다.

"이자부터는 어디로 갈끼고?"

물으면서도 부러움을 참을 수 없다는 듯 부라리는 눈빛은 변함이 없었다.

"글쎄, 매표소에 도착하고 나서 결정하니까."
"우와, 니 겁도 읍네. 기차는 그라모, 돈 안내고 탔나?"
"아니. 돈을 안내긴 왜? 돈 냈어."
"새끼, 니 그라모 여태꺼지 내헌티 구라칬나? 돈 한 푼 없이 부산까지 와따매?"

당장이라도 멱살을 잡아 패대기를 칠 것처럼 덤벼드는 철수를 향해 두 손을 들어 흔들며 재빨리 입을 열었다.

"저, 정말이야."
"뭐라꼬?"
"진짜라구. 진짜야. 역에서 구걸도 하고, 피도 팔면서, 그렇게 부산까지 온 거라구."
"헤에?"

빨리 끓는 냄비가 빨리 식는다고 했던가? 철수는 언제 화가 났었냐는 듯 멀끔한 얼굴이 되어 나를 바라봤다.

"화내지마. 이래봬도 힘들었어."
"씨발, 그럼 그렇다고 빨리 말을 하지."

목청 높여서 화를 냈던 게 조금 무안했던지 얼굴을 붉혔다.

"가자."
"어딜?"

내 손을 잡아끄는 철수에게 끌려가지 않으려고 다리에 힘을 주었지만, 워낙에 운동과는 담을 쌓고 산 몸인지라 여의치 않았다. 반면에 철수는 보기에는 그렇게 보이지 않는데 제법 강골인지 꿈쩍도 하지 않고 척척 앞으로 나아갔다. 
또래라고는 하나 이렇게 급격한 힘의 차를 보이는 철수가 무서워졌다. 여행지에서 만나는 사람이 다 좋은 사람일 수는 없지 않은가. 

"처, 철수야, 어딜 가는 거야?"
"어딘 어디냐? 당연빠따 우리 집이지."
"너희 집?"
"응. 우리 집."
"내가 너희 집에 왜?"
"밥 묵으로. 니는 밥 무것나? 난 아직 안 묵었는데. 니도 안 묵었으면 같이 묵으면 되고."

제대로 된 설명은 아니었는데, 잡힌 손을 통해 철수의 마음이 느껴졌다.

"우리 집 가깝다."

여전히 내가 발끝에 준 힘을 풀지 않자, 철수가 앞으로 향하던 고개를 꺾어 나를 봤다.

"와? 가기 실나?"
"가기 싫은 게 아니고."
"그라모? 와 뻐팅기는데?"
"으응?"
"와 뻐팅기냐고."

나를 잡은 한 손으로 바디 랭귀지를 하는 철수가 웃겨서 나는 나도 모르게 웃었던 모양이다.

"니 웃으니까, 완전히 가스나네."

이목구비를 여성스럽다고 생각해 본 적이 단 한 번도 없는 나였기에 단숨에 경직되었지만, 그에 굴하지 않고 철수는 버스에 태우더니 아저씨 두 명, 하고 버스가 떠나가라 소리쳤다. 
버스의 에어컨은 소름이 돋을 정도로 쌩쌩 했다.

"니 맻 살이고?"
"열 여덟. 내년에 고 삼이야."
"흠. 그래?"
"넌?"
"……나도."

대답을 망설이는 듯 보였던 것은 착각일까, 어쩐지 대답소리도 무척이나 작았다.

"부산에는 얼마나 있을 기고?"
"몰라, 보고."
"니는 노숙자 생활이 체질인갑다."

제일 뒷자리에는 우리 둘 이외에는 아무도 없었지만, 철수는 내 곁에 바싹 붙어 앉아 그렇게 물었다.

"그러고 여행해도 멀쩡한 거 보면."
"내 생각에도."

곧바로 맞장구치자, 그런 나를 어처구니가 없다는 듯 철수가 눈을 동그랗게 뜨고 바라봐, 그게 웃겨서 나는 키득거렸다.

"와 웃노?"

대답을 하려고 입을 열었는데, 철수가 뒷좌석에서 쿵 하고 내려섰다.

"내립니다, 내려요. 모하노? 퍼떡 안 내리고. 다 왔다. 얼렁 내리라."

버스 운전기사의 싫은 얼굴에도 굴하지 않는 철수의 행동에 얼굴을 붉히며 버스에서 내렸다.

"와 얼굴을 불키노? 사나 자슥이 가스나맹쿠로. 빨리 걸으라, 배고프다."

준수한 청년이 부산 사투리를 걸걸하게 내뱉는 걸 듣고 있노라니, 자연 조폭 이미지가 떠올랐다. 학교 자율학습 시간에 시청했던 그 영화가 제법 강렬했던 모양이다.
버스가 내려준 큰길에서 바로 보이는 3차선의 긴 횡단보도를 건넜다. 
평일인 동시에 여름의 한낮인지라 지나다니는 행인은 그렇게 많지 않았지만 근처 학교가 있는지 교복을 입은 무리가 종종 눈에 띄었다. 고3이겠지. 점심시간을 틈타 나온 듯 싶은 교복 무리가 분식집 근처에서 서성였다. 
철수의 뒤를 따라 골목의 모퉁이를 돌자, 가게 하나 없는 주택가였다. 하나같이 전용 주차장이 있는 주택들이라는 점에서 눈길을 끌었다. 
성북동쯤으로 분류되는 부자동네라는 것일까. 외지인인 나로서는 확인할 길이 없다.

"자, 들어가자."

다른 집들과 비교해서 담이 높았다. 그리고 대문이 넓었다. 높기도 했지만, 그 넓이에 놀란 나는 저절로 멈췄다.

"모하노? 안 드갈끼가?"
"집이야?"
"응. 우리 할매 집이다. 아빠랑 엄마는 내 방학하자마자 여행가뿌리고 읍다. 드가자."

닫혀 있는 문이 아닌지 그렇게 말한 철수는 문을 밀어 열었다.

"도련님 오셨습니꺼?"

어깨가 떡 벌어진 떡대 세 사람이 철수를 발견하자 허리를 90도 각도로 숙이며 인사를 했다. 겉에서 보기에도 들고 갈 게 많아 보이는 집에 자물쇠가 걸리지 않았던 이유를 알 것 같았다. 
철수는 그들의 인사에 눈길도 주지 않고 그대로 들어갔지만, 나는 난생 처음 보는 그들을 시야에 오래도록 담아두기 위해서 천천히 걸었다. 
머리 밑에 훤하게 들여다보일 정도로 짧게 깍은 뒤통수와 단련된 어깨며 팔 근육은 젊은 혈기로 넘실댔고, 탄탄하게 올라붙은 엉덩이와 허벅지는 거친 몸싸움에서 유용하게 사용될 것 같았다. 군대를 들어가기 전까지는 경험하지 못할 거라고 생각했던 우렁찬 경례조차 사랑스럽게 느껴졌다.

"모하노? 빨리 안 드로고?"

무슨 행성이름처럼 들리는 사투리로 재촉하는 철수가 또한 사랑스러웠다. 이 특이한 경험을 준 사람이 다름 아닌 철수였다.
세 개의 건물이 따로 떨어져 있었지만, 중간의 큰 건물에 이어져 있었다. 단순히 한옥이라고 생각했는데 가까이 다가갈수록 조금 다르다는 느낌이었다. 
중앙의 건물은 일본식 한옥으로 2층이었다. 거실 대신으로 중앙의 넓은 대청 마루 대신에 길다랗게 이어진 마루는 양쪽 유리창에 막혀 통로의 이음줄처럼 연결되어 있었다. 
신을 벗고 올라선 나는 긴 유리창들에 놀라고, 그 유리창의 사이의 마루에 또 한번 놀랐다. 장정 두 사람이 지나갈 수 있을 만큼의 폭이었지만, 반들반들 윤기가 흐르는 것이 방금 전까지 누군가 닦고 있었던 것은 아닐까 의심이 들만큼 깨끗했다.

"할매!"

철수가 크게 소리쳤다.

"할매 어디 있노? 할매!"

철수가 그렇게 고함치며 유리문을 하나하나 열어 젖혔지만, 누구 하나 말리는 사람이 없었다. 
열린 유리문 너머에서는 또 누군가가 허리를 구십도 각도로 숙이며 인사를 건넸지만, 철수는 보는 둥 마는 둥 유리문을 도로 닫았을 뿐이다. 
뒤쫓는 것만으로도 체력이 달려 역시나 나도 인사를 건네지 못했다.

"할매!"

몇 번째의 부름이었을까, 철수는 그렇게 외치며 유리문 하나를 열었다.

"귀 안 먹었다. 고마 고함 치라."

철수의 고함에 맞먹을 정도의 큰 소리가 되돌아왔다.

"할매 여 있었나?"

철수가 연 유리문 너머 세 개의 방이 있었는데, 방 다음에 방 그리고 다음에 방, 이런 식으로 방의 사이에는 미닫이문이 자리하고 있었다. 열면 큰방이 되고 그대로 닫아두면 각기 나뉘는 방이 되는 신기한 공간이었다. 
검은 머리카락이라고는 한 가닥도 보이지 않는 노인이 방의 저 끝에 앉아 있었다. 꽃꽂이를 하시는 중이었는지 작은 손에 딱 들어맞는 작은 가위가 들려 있었는데, 철수와 함께 마지막 방 끝에 닿을 때까지도 고개를 드시지 않고 열심히 꽃을 손보고 계셨다.

"할매, 밥은?"
"와? 벌써 배고프나?"

단정한 외모에 어디 하나 흐트러짐이 없는 모습에서 위엄을 느꼈다.

"안녕하세요?"

할머니의 주름진 손을 들여다보고 있던 나는 인사말이 끝나자마자 율동 하던 손가락이 멈추는 것을 보고 시선을 들었다. 
마주한 시선으로 나는 할머니의 시력이 그다지 좋지 않음을 알아차릴 수 있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할머니가 앞을 못 본다던가 흐릿한 눈빛이지는 않았다. 오히려 초점이 맞지 않는 점으로 미간을 좁히는 모습에서 정정한 위력이 느껴졌다. 꼿꼿한 허리만큼이나 단단할 성품이 그대로 눈으로 뿜어져 나오고 있었다.

"니는 누고?"
"네. 저는 정수영이라고 합니다. 서울에서 살고 있고, 현재 고등학교 2학년에 재학중입니다."
"부산에는 와?"
"진짜 대단한 놈이다, 임마자슥. 돈 한 푼 없이 서울에서 부산까지 왔단다."

나를 향하고 있는 자기 할머니의 시선을 못 봤을 리도 없건만 녀석은 신이나 죽겠다는 듯 어깨를 들썩이며 내 말을 가로막으며 철수가 대답했다.

"그래?"

철수 할머니의 시선은 여전히 나에게 못 박혀 있었다.

"네."
"어떻게 왔는지는 안 들어도 알겠다. 철수야, 친구 밥 묵고 나면 목욕탕으로 안내해라."
"응. 안 그래도 그랄 끼다."
"니 갈 데는 있나?"
"엄따드라."
"철수야 니가 수영이가?"
"아니."

철수가 입을 삐죽이며 대답했다.

"수영아, 니 갈 데는 있나?"

철수의 할머니는 같은 질문을 했다. 꼭 내 입으로 하는 말을 들어야 성이 풀리겠다는 듯 힘이 들어간 물음에 나도 모르게 어깨에 힘이 들어갔다.

"아뇨. 없습니다."
"부산에 오래 있을 기가?"
"모르겠습니다."
"부산에는 언제 왔노?"
"어제 도착했습니다."
"그러믄 어제 잠은?"
"초읍 도서관에서 잤습니다."
"도서관?"
"네. 학생증이 있고, 국립도서관이라 하루 사용료만 내면 개방된 열람실에서 잘 수가 있습니다."
"그래? 부산에서 거기만 갔나?"
"아뇨. 금정산을 올라서 그 아래로 보이는 부산을 내려다 봤습니다."
"내려다 봤다?"
"아, 별 뜻은 없구요. 그저 많이 볼 수 있는 곳은 어쨌든 높은 곳이니까, 그래서 산에 올라간 김에 아래를 내려다 봤을 뿐입니다."
"흠, 산이라… 오늘은 구덕산이고?"
"네. 그런데 많이 보지도 못했습니다."
"허허허, 그래, 철수가 밀어붙였겠지. 저거, 지 맘대로 안 되는 꼴은 못 견디니."

팔이 안으로 굽는다고 자신의 새끼에 대해 제대로 볼 생각을 하지 않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할머니는 여느 할머니와는 다른 모양인지 대놓고 싫은 얼굴을 했다.

"부산에 아는 사람도 없다고?"
"네. 없습니다."
"그럼 딱히 갈 데도 없으니, 그냥 서울 가기 전까지는 여기 있어라."
"네? 하지만…."
"어떻게 여 까지 돈 한 푼 없이 왔는지 모르겠지만, 올 때처럼 쉬울 기라고 생각하지 마라. 세상이 그리 호락호락 한 줄 아나? 그야말로 운인기라. 운. 니는 운이 좋았어. 운이. 철수야, 야 밥 묵이고 씻기라. 냄새난다."

여행하면서 항상 친절한 사람만 있었던 것은 아니었지만, 그렇다고 이렇게 처음 만난 사람에게 냄새난다고 말한 사람도 없었다.

"아뇨. 전 이만 가보겠습니다."
"허어? 니도 방울 두 개 달고 있다고 사내자슥이다 이거가? 내헌티 니는 모르는 사람 아니다. 내 손주가 지 손으로 끌고 들어온 친구인기라. 친구가 뭐고? 니도 내 손주인기다. 체면 차릴 것도 엄꼬. 자존심이다 뭐다 챙길 것도 엄따. 철수 저게 저래 봬도 갠찬은 놈인기라."
"할매 이상한 소리하지 마라."
"허허허, 봐라, 진짜 신기하제, 애릴 때도 친구 한 번 안 델꼬 오더니 오늘 첨 본 니럴 집 안에 까지 델꼬 드로고. 신기한 일인기라."

그리고는 다시 꽃꽂이로 정신을 집중하기 시작한 할머니는 철수와 내가 그 방을 나올 때까지도 고개를 드시지 않았다. 
철수의 손에 붙들려 나와 식당으로 들어가자, 한 명의 남자와 두 명의 여자가 열심히 설거지를 하고 있었다. 여자 한 사람이 세제를 묻혀 비비면 다른 여자가 그것을 받아 헹구고 마지막으로 남자가 물기를 털어 내어 찬장에 차곡차곡 쌓는 순서로 진행되고 있었다.

"밥."

철수가 그 흐름 속에 파고들었다.

"헉, 도련님 오셨습니까?"

남자가 황급히 뒤돌아 섰다.

"어머, 도련님 오셨어요?"

두 여자도 남자의 뒤를 따라 당황한 기색을 숨기지 않고 허리를 굽혔다.

"밥."

전부 다 떼어내고, 달랑 명사 하나만 말하는데도 엄청 스타일이 잡히는 철수의 모습에 나는 생각보다 이 집에서의 철수의 지위가 높음을 실감했다. 한두 해 이렇게 산 게 아니라, 태어날 때부터 이랬던 것이다.

"안녕하세요."

나의 앞길을 가로막지 말라는 당당한 어투의 기백에 눌려 있던 나는 한 박자 늦은 인사를 했다.

"앉아."

사람이 뭐라고 할 시간도 주지 않는 철수를 노려보았지만, 오히려 왜 그렇게 보냐는 듯 눈동자를 굴리는 모습에 작게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가로 저었다.
설거지는 두 사람에게 맡기고, 남자가 상을 차렸다. 와이셔츠 소매를 걷어올리고 열심히 반찬을 나르고 국을 데우는 움직임은 노련했다. 꽤 오랫동안 해 본 솜씨였다. 철수와 식탁에 앉고 몇 분도 되지 않아 상다리가 휠 만큼 찬이 가득한 자리가 마련된 것을 보면 주방 일에 이만저만 익숙한 게 아닌가 보다.

"많이 드세요."
"네. 잘 먹겠습니다."

서울 쪽도 그렇게 많지는 않지만, 경상도에는 특히 드문 일일 거라고 생각하자 나도 모르게 시선이 남자를 따라가고 있었다. 남자는 나머지 여자가 일을 대충 마쳤다고 생각했는지 이제 그만 나가 보라고 이르고는 헹궈진 식기를 정리하기 시작했다.

"뭐 보노? 식는다 묵어라."
"어…어."

5일 간 점심은 무조건 건너뛰던 식 습관에 어긋나는 점심식사였음에도 불구하고, 위장은 아무 반항 없이 진수성찬을 받아들였다. 
너무 맛있어서 씹지도 않고 삼키는 것도 있었고, 씹을 필요도 없는 것도 있었다. 살살 녹았다. 누가 만들었는지 몰라도 이 집의 가정부가 아니라 요릿집 해도 괜찮을 것 같았다.

"야야, 천천히 무그라."

아무리 그래도 낯선 사람의 집인데 너무 허겁지겁 먹었던 모양인지 걱정스러운 눈빛 반 재미있다는 눈빛 반의 철수가 물을 내밀었다.

"정말 맛있다."

미친 듯이 먹었던 스스로를 반성하는 마음에 무슨 말이든 해야지 싶어 그렇게 말했다.

"쿠하하하, 니 진짜로 재미난 놈이다."

뭐가 웃겼는지 몰라 의아했지만, 목젖이 보일 정도로 웃어젖히는 철수가 싫지 않아 내민 물 컵을 받아 두 번에 걸쳐 나눠 마셨다. 물을 마시는 틈틈이 건강하게 웃는 철수의 호탕함도 잊지 않고 확인했다.

"웃지마."

숨넘어갈 듯 웃던 철수가 들썩이는 어깨를 차츰 가라앉혔다.

"내 얼굴에 뭐가 묻었냐?"
"아니."
"근데 뭐가 그렇게 웃기냐?"
"전부."
"개그맨 하면 뜨겠네, 전부 그렇게 웃기면?"

눈이 순간 반짝인다 싶더니 미묘하게 얼굴이 일그러지며 다시 철수의 웃음이 시작되었다. 
황당하기도 하고, 부끄럽기도 한 나는 점점 붉어지는 것을 막지 못하고 물 컵을 움켜쥐고 몇 방울 남지도 않은 컵 안을 노려보았다. 남이 밥 먹는 거 처음 보는 것도 아닐 테고, 질질 흘리면서 먹지도 않았는데, 박장대소를 하는 철수가 야속했다. 
게 눈 감추듯 먹었던 자신의 모습이 그렇게 웃겼나 싶은 게 말도 못하게 창피했다. 그런 창피함 속으로 몰아붙이는 철수의 웃음은 그래서 원망스러웠다.

"쿠쿠큭, 미안… 미안…."

사과를 하면서도 웃음을 참지 못하는 철수가 급기야 눈물까지 찔끔거리자, 식당에서 나가지 않고 있던 남자의 웃음소리까지 그에 더해졌다.

"어? 누구야?"

두 사람이 좀처럼 그치지 못해, 일어서지도 그대로 앉아 있기도 뭐한 상황이 계속되는 중에 목소리 하나가 등뒤에서 튀어나왔다. 
식당 입구를 등지고 앉아 있던 내가 고개를 돌리자 거기에는 발레 복을 입고 있는 여자아이가 서서 웃고 있는 두 남자를 휘둥그렇게 떠진 두 눈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무슨 일이야? 두 사람 약 먹었어?"

철수의 웃음에 전염된 남자처럼 여자아이도 같이 따라 웃는 건 아닌가 지레 겁을 먹었던 나는 여자아이에게서 나온 인간다운 반응에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두 사람 다 더위 먹었어? 아니면 무슨 일이야? 뭔데? 뭔데 그래? 뭐가 그렇게 재미있어? 누가 죽는 거라도 봤어?"

조…조금…이나마 인간다운 반응이니 다행스럽게 생각하자.

"무슨 일이야?"

역시나 발레 복을 입은 여자아이가 식당 안을 빼꼼 들여다보며 향해 물었다.

"나도 몰라. 내가 왔을 때도, 이렇게 웃고 있었어."
"두 사람은 앞에 사람 앉혀두고 예의 없이 무슨 짓일까."

말 그 자체만 본다면 비꼬는 일색이었으나, 어투 속에는 두 사람에 대한 사랑이 묻어나고 있었다.

"안녕하세요?"

해야겠다고 생각하고 허리를 들려는 찰나에, 조금 늦게 들어온 쪽의 발레 아가씨가 인사를 건넸다.

"철수 오빠 친구?"

어정쩡한 자세의 목례가 끝나기도 전에 앞서 들어온 발레 아가씨가 물었다. 나는 그렇다고 해야할지 아니라고 해야할지 알 수 없어서 잠시 머뭇거렸다.

"당연히 철수 친구겠지. 철진 오빠 친구하기에는 너무 어리잖아."
"언니는 그런 고정관념을 깨야해."
"고정관념이 아니라, 철진 오빠에 대해 너보다 잘 알고 있기 때문이야."
"다 안다는 것도 고정관념이라니까."

두 사람의 공방이 티격태격 진행되어 자칫 싸움으로 번지는 게 아닌가 하는 걱정으로 싸움을 말려줄 누군가를 찾기 위해 눈을 돌렸다. 
시선 끝에 제발 육탄전이 되었으면 하고 바라며 눈을 반짝이는 두 남자가 걸렸다. 사투리가 심하지 않았지만, 경상도 아가씨 특유의 목청이라 쩌렁쩌렁 울려 금세 큰 싸움이 될 것 같은데도 남자 둘은 어떤 움직임도 보이지 않았다. 한마디로… 한심했다. 생각이 있는 남자라면 이 상황에서 말리는 게 정상이 아닌가.

"안녕하세요. 두 사람은 식사했어요?"

때늦은 인사를 날리며 신경전을 펼치는 두 사람 사이에 끼어 들었다.

"아… 아뇨."
"발레 복 입기 전에 뭐 먹으면 탈나요."

보기에도 가슴 부분의 코르셋은 인간적으로 심하다 싶을 정도로 조여져 있어서 숨을 제대로 쉴 수 있을까 걱정스러웠다.

"옷 갈아입고 오세요, 아가씨들. 차려놓을 게요."

그렇게 말한 남자의 말에 두 아가씨는 말 그대로 얼굴을 발갛게 물들이고는 고개를 한번 끄덕인 후, 식당에서 사라졌다.

"쳇, 좋은 구경거리가 사라졌잖아."

철수는 사라진 싸움이 내심 아까운지 밥 한 공기를 비울 때까지 계속 툴툴거렸다. 
신장은 어른의 수준을 웃돌고, 체격이나 인상은 장정 서넛은 너끈히 상대할 수 있을 만큼 강렬한 철수가 입술을 불퉁하니 내밀고 있는 모습은 영락없는 아이의 그것이었다. 만나고 나서 처음으로 만만하게 보인 그 순간은 순식간에 사라졌지만.

"어서들 앉으세요."

발소리를 듣지 못한 나는 등뒤로 인사를 건네는 남자의 말에 고개를 돌렸다. 
언제 싸웠냐 싶게 손장난을 치며 서로 먼저 자리에 앉겠다며 키득대는 두 명은 이번에는 학교 체육복임이 틀림없는 트레이닝복을 입고 있었다. 
옷걸이가 잘나 그런가 고작 체육복일 뿐인데 옷 테가 났다.

"뭘 그리 보노?"

철수가 묻지 않았다면 두 사람이 맞은편에 앉을 때까지도 시선을 떼지 못했을 것이다.

"아냐, 아무것도."
"아니긴 뭐가 아니고. 쳇, 지도 사내자슥이라고."

철수는 이번에는 또 뭐가 기분을 상하게 만든 것인지 입안으로 투덜거렸다.

"철수 오빠 친구예요?"
"친구믄 와, 가시나야, 작업 함 걸어볼라꼬?"
"정말 철수 오빠 친구예요?"
"네."

아니라고 하기에는 너무 멀리 온 감이 있었다.

"그봐, 내가 철수 친구일 거라고 했지?"
"철수 오빠한테 친구 있다는 말 못 들었단 말야."
"그렇다고, 철진 오빠 친구일 거라는 건 말이 돼?"
"그래도 철수 오빠보다는 철진 오빠가 더 사교적인 성격이잖아. 오빠, 철수 오빠 친구 오빠, 아, 너무 길다. 오빠 이름 뭐예요?"
"나? 정수영."
"수영 오빠, 수영 오빠라고 불러도 되죠? 수영 오빠, 친구니까 잘 알고 있겠죠? 철수 오빠 정말 성격 더럽잖아요? 저렇게 성격 더럽기도 힘들어요. 그런데 어떻게 친구일 거라고 짐작이나 했겠어요? 앗, 그러고 보니, 내 소개를 깜빡했네. 수영 오빠, 저는 영희라고 해요. 김영희. 철수와 영희 할 때, 영희요."
"형제야?"
"친형제는 아니구요. 사촌형제예요. 이쪽은 저랑 친한 언니, 장간난. 좀 특이한 이름이죠? 그래서 다들 미스 장이라고 불러요. 오빠도 그렇게 부르는 게 좋을 거예요. 이 언니가 보기에는 얌전하고 조신해 보여도, 저 만큼이나 왈패거든요."
"이게, 너 처음 본 사람한테 소개가 뭐 그래?"
"흥? 철진 오빠도 말은 그렇게 하면서 속으로는 나랑 의견이 똑같으면서 뭘 그래? 아냐?"

철진이 아니라고 대답할 줄 알았는데, 그는 스리슬쩍 이 난관을 헤쳐나가기 위해서인지 등을 돌려 있지도 않은 설거지를 하는 척 했다.

"봐요. 봤죠? 철수 오빠는 어쩌다가 친해졌어요?"

대답을 찾지 못해 철수가 있는 쪽을 바라봤으나 여전히 기분 나쁜 오로라로 무장하고서 도와줄 생각을 하지 않았다.

"넌 무슨 질문이 그래? 난감하죠? 영희는 다 좋은데, 너무 직설적이에요. 철수가 집에 누구 데려온 게 처음이거든요, 제가 알기로는."
"내가 알기로 그래. 철진 오빠는?"
"제가 알기로도 처음입니다."

설거지하는 척을 하면서도 뒤로는 들을 걸 다 듣고 있었던 모양인지 사이도 없이 철진이라는 남자가 대답했다.

"저 성질에 친구라고 남아 있어주는 사람이 없는 게 당연하다면 당연한 거겠지만, 친척 된 입장에서 굉장히 걱정하고 있었어요. 고마워요, 수영 오빠, 앞으로 우리 철수 오빠가 많이 괴롭히겠지만, 꾹 참고 오랫동안 친구 돼주세요."
"영희가 말은 이렇게 하지만, 정말 걱정되어서 그러는 거예요. 더불어 저도 철수 부탁드릴게요."

영희의 부탁까지는 웃어 넘길 수 있었지만, 미스 장의 부탁은 난감했다.

"가능하다면 저도 부탁드리겠습니다."

장난스러움은 철저히 배제한 철진의 부탁은 이만저만 난처한 게 아니었다. 언제 채웠는지 밥공기를 빠른 속도로 비우는 철수는 자신에게서 시작된 문제임에도 불구하고 나 몰라라 모른 척 했다. 그리고 화났던 표정은 조금 풀려 있었다. 
덩치는 산만한 녀석이 꽤 변덕스러웠다. 
휴우, 할 수 없구나, 겉보기와는 달리 어린 녀석을 걱정하는 가족들의 앞이니, 어떻게 사양할 수 있겠어, 라고 나는 오늘 처음 만난 철수를 걱정했다.

"걱정 마세요. 싫다고 해도, 끝까지 남아있을 게요."

영희와 미스 장에게로 고개를 돌리고 그렇게 말하는 내 목소리는 약하게 떨리고 있었다. 비장하기까지 한 끝에 대한 맹세가 부담스러웠다. 
땅이 꺼져라 한숨을 내쉰 나는 이 부담의 원천이 된 녀석이 하고 있을 꼴을 보기 위해 고개를 돌리다가 나를 향해 미묘한 시선을 보내고 있는 철수와 눈이 마주쳤다. 
나를 보고 있었다. 배경의 나도, 나의 배경도 아닌, 오로지 나 하나만 보인다는 듯 그렇게 뚫어져라 나를 보고 있는 철수의 눈동자에 전율을 느꼈다. 정수리에서 등줄기를 가로지르는 전기충격은 걷잡을 수 없는 속도로 손가락 발가락 끝까지 타고 흘렀다. 고개를 돌린 후에도 몇 분간 식탁을 차지하고 앉아 대화에 참여했으나, 쿵쾅거리는 전류의 흔적은 심장에 고스란히 남아 얘기에 전혀 집중할 수가 없었다.
철수 녀석의 시선이 사라진 뒤로도 나는 그 시선에 사로잡힌 벌레가 된 듯한 마비 증상에 빠져 있었다.
별로 관심이 없었던 바다 구경을 하며 해운대 송정 기장에 영도와 송도까지 웬만한 부산 바다는 다 휩쓸었다. 
하루는 여기, 하루는 저기, 이러는 사이에 해외로 여행을 가셨다는 철수의 부모님이 돌아오셨다. 철수에게 친구가 생겼다는 것만으로도 기꺼워하던 다른 이들과는 다른 차가운 반응에 놀라기도 했지만, 어떤 면으로는 이해도 되었다. 무전여행 온 근본도 모르는 녀석과 친구가 되었다는데 어느 부모가 좋아하겠는가. 그래서, 이만 서울로 돌아가야 할 것 같다고 철수에게 말했다. 식객 노릇이 거의 한 달이 되어 가는 마당에 빨리 돌아간다는 표현은 우습지만, 어쨌든 방학 끝나기 직전에 올라가겠다고 했던 계획을 틀어버렸으니 이르다고 할 만 했다.
부산역까지 마중 나온 사람은 총 네 사람이었는데, 그건 차에 탈 수 있는 인원이 다섯 명이었기 때문이다. 운전한 강철진, 운전석 옆에 앉은 미스 장, 철수와 영희 사이에 끼어 앉은 나까지 이렇게 다섯 명의 이동은 부산 바다를 누비고 다닐 때와 똑같은 모습이었으나 내부 공기는 짙은 안개가 낀 것처럼 뿌옇게 내려앉아 있었다.

"여기까지 데려다 줄 필요는 없었는데, 고맙다. 정말 재미있었어."

내 인사에 철수와 철진은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고, 영희와 미스 장은 다른 사람의 눈치를 보지 않으며 그 자리에서 울음을 터뜨렸다. 

"다음 방학에 또 무전여행 와."

영희가 울먹이며 소리쳤다.

"나 서울로 대학가. 연락하면 모른 척 하지마."

역시나 울먹이며 미스 장이 말했다. 두 사람의 이 얘기는 철수의 집에 머무는 내도록 계속된 것으로 외우라고 하면 외우라고 할 수 있을 정도로 귀에 익은 것이었기에, 울음소리와 섞이자 짜증이 났다.

"또 올 건데, 울긴 와 우노? 드가라. 또 보제이."
"도련님 말씀대로 타세요. 더 계시다가는 이 차편 놓치겠어요."

말대로 기차는 떠날 차비를 하고 있었다.

"서울행 새마을호 타시나요?"

제복을 차려입은 남자가 물어서 고개를 끄덕였다.

"빨리 타세요. 곧 출발합니다."
"네."

인사가 길어지고 있는 것에 가볍게 눈살을 찌푸린 남자에게 떠밀리다시피 해 나는 기차에 올랐다. 
표에 맞춰 자리에 앉자 기다렸다는 듯 기차가 움직이기 시작했다. 차창밖에 선 네 사람의 모습이 조금씩 뒤로 밀렸다. 
느릿느릿 도저히 서울까지는 갈 것 같지 않던 기차가 힘을 발휘하기 시작하자, 배웅자의 그림자마저 뒤편으로 사라졌다. 
서울에 돌아가기로 한 것은 나였는데, 누구 탓으로 이렇게 된 것처럼 느껴져 참을 수가 없었다. 기차에 앉아 있는 나 자신부터 시작한 짜증은 그 누군가를 향해 쉬지 않고 달렸다. 
서울역에 도착하고도 기분은 나아지지 않았다. 벨을 누르고 집에 들어가자, 왜 예정보다 빨리 왔냐는 부모님의 질문에 어이없어진 나는 여행지에 대한 에피소드 하나쯤 기대하고 있던 부모님을 피곤하다는 거짓핑계로 내버려두고 방으로 재빨리 들어와 문을 닫고 침대로 몸을 던졌다. 
피곤하기는커녕 오히려 휴양을 하고 왔다고 하는 편이 옳을 여행이었으나 익숙한 공간에 전해주는 나른한 온기에 취해 나는 서너 시간쯤 더 잤다. 

"수영아, 전화 왔어."

요란한 울림에 끙끙대며 잠에서 깨어났다. 기차를 타고 오는 내도록 잤는데도, 잠이 들었다는 사실에 깨어나고도 몇 초 동안은 멍한 상태였다. 
인간이 이렇게 나태해질 수도 있구나 하는 경이감마저 들었다.

"수영아, 자니? 좀 일어나 봐. 부산 친구라는데?"

후다닥 침대에서 일어나 방문을 열고 거실에 있는 전화 수화기를 낚아챘다.

"전화 바꿨습니다."
-내다.

철수였다. 많은 사람들의 틈에서 살고 있어서인지 철수는 기계를 달갑게 생각하지 않았다. 할 말이 있으면 직접 만나서 하던지 아니면 아예 연락하지 않는 걸 좋아했다. 해외 여행지에서 짧은 소식이라도 전하려는 부모님의 전화도 건성으로 그리고 아주 간단하게 끝마치던 철수였으니까, 지금도 마치 바로 눈앞에 있는 것처럼 선했다.

-도착했으믄 돼따.
"미안 연락한다는 게 깜박…."
-자다 일어났제? 더 자라. 아무리 비싸다케도, 그 먼 길을 가는데 편하믄 지가 얼마나 편하겠노. 더 자라.
"자…잠깐만, 철수야."

금방이라도 끊을 것 같은 기세라, 나는 곁에서 전화 내용을 듣고 있는 부모님의 존재도 깡그리 잊어버리고 그렇게 고함쳤다.

와? 할 말 있나?
"아니, 딱히 할 말은 없지만…."
-뭐 하러 쓸데없이 전화통 붙들고 있노? 고마 치아라. 끊는다.

그래도 근 한 달간 붙어 다니던 정을 생각해서라도 이럴 수는 없다. 이렇게 인정머리 없는 녀석인 줄 몰랐다. 잊고 있던 짜증이 휘몰아쳤다.

"빌린 차표 값 우편으로 보내줄게. 주소 불러 줘."

수화 너머의 철수가 말이 없었다.

"전화비 아깝다고 끊었냐? 김철수! 야, 김철수!"
-철수 안 죽었다. 돈 아까워 그라는 기 아니다. 마, 돼따. 그라고, 무전여행이다아이가, 막판에 깽판치믄 우야노. 끝까지 무전여행 해라. 이만 끊는다. 종종 연락해라. 아, 서울은 겨울방학이 언제고?
"야, 여름방학도 아직 안 끝났어."
-그라믄, 그거 정해지믄 꼭 전화해라. 전화번호는 알제?
"응."
-돼따. 잘 지내라.
"너도…"

뚜 뚜 뚜 뚜

"…새끼야."

그 종종 연락이라는 건 일방적으로 내 쪽에서 해야 하는 게 기분 나빠서 일부러 전화를 하지 않았다. 연락 올 때까지 안 할 거야 라고 작심하고 있었다. 스스로도 너무 유치하지 않나 하는 생각을 하지 않은 건 아니지만, 철수 쪽에서도 그 후에 전화 한 번 오지 않았다. 
서울에 있는 대학에 시험을 치겠다고 했던 어여쁜 미스 장에게서도 연락이 없었는데 그건 하나도 신경 쓰이지 않았다. 여자니까 전화하기 힘들지도 모른다는 이해는 남자인 철수를 향한 몰이해로 이어졌고, 니가 이기나 내가 이기나 해보자는 혼자만의 내기에 빠졌다. 
그건 겨울 방학이 되어서도 쭈욱 그렇게 내기는 계속되었다.

"이제 너도 고3이구나."
"네에."

결혼식도 없는지 오랜만에 휴일다운 휴일을 보내는 아버지의 곁에서 할 일 없이 텔레비전을 보던 나는 바람 빠진 풍선처럼 대답했다.

"휴일인데, 친구도 좀 만나고 하지 그러니?"
"너 시위하는 거지? 여름방학 때처럼 겨울방학도 여행 보내달라고 시위하는 거 맞지?"

아버지께서 계셔서 그런가 어머니가 그간 벼르고 있었던 것처럼 따져 물었다.

"아니에요."
"아닌데 왜 그래? 병 든 닭처럼 늘어져서는… 성적 오른 건 참 좋은 현상이지만, 다 죽어 가는 사람처럼 늘어져서 불안하게 만들 거면 차라리 성적 내려가는 편이 더 마음 편하겠어, 엄마는."
"당신은 무슨 걱정을 하는 거요, 지금?"

아버지의 역성에 어머니가 손에 묻은 물을 행주에 닦더니 부엌에서 아버지와 내가 있는 텔레비전 쪽으로 다가오셨다.

"너 바른대로 말해. 여행가서 여자 애 사귄 거야? 그 애한테 몹쓸 짓 한 거야?"
"여보!"

어머니의 물음에 놀랐는지 순간 고함을 쳤다.

"요즘 애들이 얼마나 빠른데요. 당신이 몰라 그렇지, 아파트 단지 회의라도 하는 날이면, 청소년 문제 심각한 거 실감하게 된다구요. 우리 애는 아니겠지, 라고 덮어놓고 안심하면 안돼요. 성이 얼마나 개방되어 있는데요. 애들이 사고치는 건 한 순간이에요. 몸만 컸지, 우리 때보다 더 어리니까 문제라구요, 심각한 문제."

설득은 내가 아들만 아니라면 충분히 동감할 수 있는 내용이었다.

"아니에요!"
"아니야?"
"아니라잖아. 당신도 참, 다른 애들은 다른 애들, 우리 애가 아니라잖아. 장차 순수문학으로 나아갈 녀석이 불순한 쪽에 발을 들여놓겠어? 생각을 해봐."

아무리 아버지지만, 설득력부족에 억지였다.

"아닌데, 애가 왜 이래?"
"보약 먹여야 하는 거 아냐?"
"하긴, 다른 집도, 이맘때에는 보약 한 재씩 지어 먹인다고 하던데…, 말 난 김에, 당장 보약 지으러 가자."
"그래, 수영아, 엄마 말대로 해라."

부부금실도 이만큼 좋으면 비익조도 울고 가겠군.

"괜찮아요, 정 안되겠으면 말씀드릴게요. 아, 그렇지, 그러지 말고, 아버지 보약 한 재 짓는 게 어때요? 정말 조금도 쉬시지도 못하시는 것 같던데…."
"그래요, 수영이는 젊으니까, 나중에 해도 괜찮으니까, 당신 보약부터 먼저 지어요."
"나? 나 괜찮아. 수영아, 아버지 알통 봐라, 봐. 배에 왕…은 무리지만 아직 끄떡없어."

입고 있던 스웨터를 들춰 올려 가냘픈 몸매를 보여주시던 아버지는 늘어지는 뱃살이 민망한지 서둘러 끌어내려 가리고는 보란 듯 배를 두들기며 웃으셨다. 잠깐 나타났다 사라진 살 때문에 나와 어머니의 안색이 굳어진 것은 두말하면 잔소리.

"안되겠어요. 당신 보약 지어야겠어요."

강경한 어머니의 말투 때문이었을까, 아버지도 이번에는 웃음으로 얼버무릴 수 없다고 생각했는지 작게 고개를 끄덕여주셨다.

"알았어. 대신에, 내 거 지으면서 당신도 같이 짓는 걸로 하지. 쉬지 못한 걸로 치면, 당신도 마찬가지 아니오? 연말 보너스 받은 것도 있으니, 합쳐서 당신 것도 같이 짓는다고 하면…."
"알았어요. 알았어. 혼자 쓴 약 먹기 싫으니까, 억지로 끌어들이시는 거죠? 수영아, 넌 아빠처럼 그러지 않을 거지?"

속으로는 좋으면서 괜히 그러신다는 걸 모를 리 있겠는가. 아들이 없는 여름방학 동안 제2의 신혼생활을 보내며 둘이서 알콩달콩 보냈다고 자랑하는 닭살커플은 진정한 옵션이 무엇인지 새삼 느끼게 만들었었다. 
부유하지도 가난하지도 않은 가정에서 굉장히 의가 좋은 부모의 밑에서 자라서일까, 나도 얼른 자라서 둘만 있으면 어디라도 상관없는 그런 장소가 갖고 싶다고 항상 생각했다. 여름의 무전여행을 통해 그 옵션에 친구도 포함시키긴 했지만, 옵션은 그저 옵션일 뿐이다. 
그나저나 오늘도 전화는 안 올 모양이다. 
방안으로 들어가려고 몸을 일으키던 그 때였다.
따르르릉.
따르르릉.
두 사람의 세계에 빠진 부모님은 제외한다고 하더라도, 어째서인지 전화를 받을 수가 없었다. 전화기 쪽으로 몸을 움직일 수가 없었다. 
아버지에게 오는 전화는 대게 휴대폰으로 왔고, 저녁 늦게나 휴일에 어머니에게 오는 전화는 없었다. 
그래도 모른다. 휴대폰 연결이 매끄럽지 않아서 일지도 모르고, 부녀자모임의 긴급연락망이 발동한 것인지도 모른다. 
그렇게 또 여러 가지 이유를 들었음에도 몸은 순간 접착제라도 바른 듯 딱딱하게 굳어 움직일 수가 없었다.

"여보세요?"

끊어질 것처럼 끊어지지 않던 벨소리는 아버지에 의해 결정되었다.

"아… 잠깐만."

별다른 표정변화 없이 수화기를 내미는 아버지에게서 넘겨받기는 했지만, 바로 귀에 갖다대지 못했다.

"누구래요?"
"친구라던데?"
"친구 누구요?"

그제야 내가 어딘가 모르게 굳어있다는 걸 눈치챈 아버지가 의아한 눈초리를 보냈다.

"너 정말…?"

더 이상 미룰 수가 없어서, 손바닥으로 막아 누르고 있던 전화기를 들었다.

"전화 바꿨습니다."
-와 전화 안 하노?

너는 하고 물어보려다가 참았다.

"바빴어."
-방학시작했제?
"응."
-안 올 끼가?
"……."
-안 올 기냐고.
"몰라 바쁠 것 같다."
-흠, 그래?

바로 고3처럼 취급할 거라고 생각했는데 의외로 학교에서는 잠잠했기에 실제로 십 오 일간의 보충수업을 제외하고는 널널했지만 어쩐지 그렇게 대답하면 얕잡아볼 지도 모른다는 생각을-그 짧은 순간에-했던 것이다.

-집 크나?
"어? 으응? 뭐라고?"
-집 크냐고.
"아니, 그렇게 크지는 않은데?"
-네 명까지는 무리가?
"왜? 너희들 올라오게?"
"누가 올라와? 너희들? 몇 명인데?"

아버지와 나란히 붙어 앉아 흥미롭게 바라보고 있던 어머니가 물었다. 무선 전화기라면 재빨리 방으로 들어갔겠지만, 유무선전화기가 아니라 유선 전화기라서 그대로 거실에 앉아 통화를 진행할 수밖에 없었다.

-겨울 방학에도 같이 놀기로 해놓고, 무슨 딴 소리고?
"그렇다고 서울에 올라와?"
-사내 대장부는 한 입 갖고 두 말 안 한다.
"그 말은 내가 계집애다 이거냐?"
-거 까지는 말 안 했는데, 니도 제법 머리 좋은 갑다?
"죽을래?"
"죽을래?"

옆에서 내가 하는 말에 일일이 신경을 쓰고 있던 부모님 중 이번에는 아버지였다.

-옆에 누고? 안 오믄 갈 기다. 그리 알아라.
"부모님. 우리 집에 무너져, 안 돼. 오지마. 우리 집 네 방만하단 말야. 오긴 어딜 온다는 거야?"
-그라믄 니가 올 기제? 오는 거다. 방학이니까, 내일 당장 온나.
"내 맘이야."
-약속했잖아.

더 할 말이 없다는 듯 그 말을 끝으로 철수가 전화를 끊었다.

"누구냐?"
"친구."
"친구 누구? 부산 사투리를 아주 걸걸하게 쓰던데?"

아버지의 말에 어머니가 무릎걸음으로 한 걸음 앞으로 다가왔다.

"부산 사투리라면, 너 여행 갔다가 돌아왔던 그 날에도 그런 전화가 왔지 않았어?"
"당신 기억력도 좋아. 어떻게 그런 것도 기억해?"
"당신도, 참, 그게 무슨 대단한 일이라고 그래요? 철수가 방학 끝날 때 온다고 했다가 조금 더 일찍 온 날인 데다가 텔레비전이나 영화로야 사투리를 들어본 적이 있지만, 실제로 듣기는 처음이었으니 자연히 기억에 남았던 거예요."

칭찬을 사양하는 어머니를 바라보는 아버지의 눈은 반짝였고, 둘은 다시 아들이 있건 없건-옵션이긴 하지만 종종 존재가 잊혀지기에-상관없이 애정확인을 하기 시작했다. 가볍게 볼에 쪽, 쪽, 가볍게 입술에 쪽, 쪽, 키득거리며 장난스럽게 또 쪽, 쪽, 으, 지금 건 조금 길게 쪽이었다. 
제발 방에 들어가서 하시라구요. 부모님이 금실이 좋은 거야 자랑할 일이지만, 그 애정확인을 눈으로 보게 되면 정말 소름이 돋는다구요. 
소리가 되지 못하고 한숨으로 흘러나왔다. 
지금 문제는 이게 아니다. 네 명이라고 했다. 네 명이라면, 그 네 사람일 게 분명하고, 아무리 쪼그려 잔다고 해도 내 방에 네 명은 무리고, 그렇다면 여자 둘에게 내 방을 내주고, 남자 세 사람이 거실에서 자야한다는 말인데, 문제는 이 두 사람이다. 낯선 사람이 있다고 해서 눈치를 보면서 참을 리가 없다. 
결론을 내렸다.

"아버지, 어머니 바쁘신데 죄송해요."

이미 거실에 드러누워 버린 두 사람을 향해 말했다. 말은 그렇게 했지만, 정작 내가 하고 싶은 말은 아버지 어머니 치마에서 손 빼세요 였지만, …못하겠다. 절이 싫으면 중이 떠나면 될 일, 나는 천천히 시선을 돌렸다.

"전화 온 친구, 부산에서 알게 된 앤데, 겨울 방학에도 가기로 했거든요. 안 갈 거라고 했더니, 그러면 자기네들이 온다고 하네요. 우리 집도… 이렇고, 그냥 제가 부산으로 가는 게 나을 거 같아요. 그래서 그런데, 겨울 방학 끝나면 올라올 게요."

보통 고3 올라가는 아들이 이런 말을 하면 재떨이가 날아오거나 골프채가 날아오는 게 정상 아닐까. 
우리 부모님은 그 일에 바빠서 가려면 당장 가라고 했다. 그나마 생각해 준다는 게 부산에 가서라도 학원 수강하라며 학원비를 챙겨주시고 용돈을 평소의 두 배였다. 
옵션도 이렇게 까지 천대받으면 마음 상한다. 
책가방에 좋아하는 작가의 소설과 보충이 필요한 과목 교과서를 챙기고, 겨울 스웨터 두 개, 바지 두 개, 티셔츠 두 개, 속옷 네 개 챙기고, 두꺼운 코트를 입고 카키색 점퍼를 넣자, 여행용 가방은 빵빵하니 터질 것처럼 부풀어올랐다. 
인사도 없이 떠나는 게 마음에 걸렸지만, 아는 척도 하지 않는 부모님을 향해 무슨 소리를 하겠는가.
텅 빈 지갑이 아니라는 점에서 여름보다는 부담이 덜 되겠지만, 이랬거나 저랬거나 한 달하고 며칠 간 등을 비비고 있어야하기에 수중에 있는 돈의 낭비를 줄이기 위한 첫걸음으로 제일 싼 기차표를 끊었다. 
구정은 힘들어 신정을 챙기는 사람들의 틈바구니는 옵션의 지친 마음을 편안하게 만들어주지 못할망정 더 씁쓸하게 만들었다. 
이 고생을 해서라도 가족을 만나겠다는 일념 하나로 기차에 몸을 실은 그들이 부럽기까지 했다. 
전 같으면 내리고 싶다는 충동이 한 번은 일었을 텐데, 춥고 어두워진 배경 탓일까, 중간에 어딘가가 아니라 어서 빨리 종착역인 부산역에 내리고 싶을 뿐이었다. 
잠이 들라치면 깨고, 잠이 들라치면 다시 깬 나는 뻑뻑해진 눈을 억지로 붙였지만, 숙면은 불가능했다. 
번번이 정지하고 선로공사로 연착을 밥먹듯 한 기차도 결국에는 부산에 도착했다. 티켓에 쓰여진 것과는 무려 1시간이상이나 차이를 보이는 시간이긴 했지만 말이다.
내리실 때 두고 가는 물건이 없는지 꼼꼼하게 챙겨보라는 안내원의 말에 따라 두 개의 가방을 조심스럽게 움켜쥔 나는 잠이 덜 깬 사람들의 속에 끼어 걸음을 옮겼다. 
새벽의 공기가 싸하게 가라앉아 있었다. 서울 도시 자체가 가지는 온기로 눈이 쌓이기 힘들어졌다는 기상캐스터의 말이 있었음에도 찾을 수 있었던 서울역에서의 눈의 자취는 부산역에서는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12월에 들어서자마자 맛본 첫눈의 맛을 부산에서도 느끼고 싶었지만, 알아본 바로 그게 제법 거대한 욕심이라는 건 이미 알고 있다. 그만큼 눈이 귀한 도시의 바람은 볼이 애일 만큼 따가웠다. 
대합실로 올라가 먼저 손이라도 녹일 겸해서 자판기에 동전을 넣었다. 
백 원을 넣고 두 번째 동전을 넣기 위해 손가락을 치켜들었다.

"나도 한 잔 뽑아도."

챙그랑 소리를 내며 두 개의 동전이 자판기 바닥 위를 굴렀다. 
날쌘 놈이 다리를 쭉 뻗더니, 대굴대굴 구르는 녀석 하나를 밟아 세웠다.

"너…?"

동전 두 개를 허리를 굽혀 주워 올려 자판기에 넣자, 전부 삼백 원인지 버튼들에 불이 들어왔다.

"눌리라."
"어떻게 안 거야?"
"알기는 뭘 알아?"
"그럼?"
"오늘 오라고 했으니, 오늘 올 거라고 생각한 기제."
"뭐야?"
"생각보다 빨리 만나서 나도 쪼매 놀랐다. 니 어제 출발했나? 오늘 안 오믄, 내가 오늘 올라갈라고 했제."
"너 혼자야?"
"집 작따매?"

다른 사람이 했으면 놀리는 거라고 생각했을 테지만, 이 녀석 김철수이기 때문에 순전히 진심에서 우러나와서 하는 말이라는 걸 아는 나는 화도 내지 못하고 혼자 열등감을 느끼며 씩씩댔다.

"우리집 작은 거 보태준 거 있냐?"
"보탠 기야 읍지만, 그래도 내가 가믄 더 작아질 기잖아."

듣는 사람이 어떻게 생각하건 말건, 똑 부러지게 저 할 말을 하는 것도 여전했다.

"그래서 다른 사람은?"
"집에. 가자. 짐은 그거 뿌이가?"

어깨에 맨 책가방은 뺏기가 힘들었는지 크로스로 걸치고 있던 여행가방을 턱하니 자신의 왼쪽 어깨에 걸치고는 오른손으로 내 어깨를 감쌌다. 
종이컵의 반도 차지하지 않는 커피를 주인의 허락도 받지 않고 절반을 마셔 비운 후, 내 입술의 왼쪽 부분을 건드렸다.

"안 마시나?"

갑자기 본전 생각이 들었다. 
삼백 원은 내 주머니에서 나간 돈이잖아. 
녀석의 왼손에 들린 걸 획 잡아채 원 샷 했다. 유치뽕짝하고 어리기 짝이 없는 행동이라는 걸 알지만 멈출 수가 없었다.

"쿠하하하, 니 여전하네."
"내가 하고 싶은 말이다."

부산역이 떠나가라 크게 웃은 철수는 두꺼운 코트 밑으로도 확실히 느낄 수 있을 정도로 세게 내 어깨를 감싸 쥐고서 택시승강장으로 향했다.

"춥나?"
"서울보다는 따뜻하네."
"익숙해지면 이 날씨도 춥게 느껴질 기다."
"익숙해질 정도까지 있겠냐?"
"사람이 얼마나 적응을 잘하데."
"너 김철수 맞냐? 너한테 어울리지 않게 유식한 말을 다 하고 웬일이냐?"
"훗, 니가 몰라서 그렇지, 내 유식하다."

하나도 안 유식해 보이는 발언에 나는 피식 웃었고, 철수는 내 웃음을 따라 피식 웃었다. 남자 둘이서 얼굴만 봐도 웃긴다는 건, 어떤 의미에서 위험하지 않은가 하는 생각이 순간 스쳤지만, 택시 순서를 기다리다가 겨우 차례를 잡은 참이라 그것은 그대로 뇌리에서 사라졌다.
철수는 집의 위치를 기사아저씨에게 말하고는 내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어깨동무를 하고 있었기에 철수의 얼굴이 바로 코앞에 있어서 나는 철수에게 잡힌 어깨를 그의 팔에서 빼내고 등에 매고 있던 가방을 무릎 위에 올리고, 엉덩이도 조금 옆으로 움직여 떨어져 앉았다. 
내가 하는 냥을 바라보고 있는 철수의 시선이 따가웠다.

"너무 가까워서 입술박치기 하면 어쩌려고 그래?"
"입술박치기 한다라… 하믄 어때서?"
"넌 많이 놀아서 상관없겠지만, 이 몸은 깨끗한 100퍼센트 순수배양이란 말이다."
"순수배양인 놈이 무전여행 같은 걸 어떻게 하냐?"
"온실에 화초라고는 안 했어."
"춥잖아. 붙어 앉아."

말로는 이길 수 없다고 판단한 때문인지 철수가 내 몸을 끌어당겼다.

"손님, 히터 더 켤까요?"

운전기사가 춥다는 철수의 말에 어느새 히터를 높인 것인지 후끈한 열기가 얼굴을 향해 쏘아져왔다. 
차가운 곳에 있다가 갑자기 닿은 온기라 그런가, 얼굴이 간질거렸다.

"아까 그 온도로 가지요, 아저씨."

간지러운데 간질까 말까 생각하는데, 철수가 앞좌석을 향해 그렇게 소리치고는 두 손을 쫙 펴서 내 얼굴을 감쌌다. 간지럽다고 입으로 말한 것도 아닌데 어떻게 안 것일까 신기해서 쳐다봤다.

"니 얼굴 빨갛다. 완전히 깡깡 얼었네."

우리 두 사람은 택시의 뒷좌석이라는 것도 잊고 그렇게 시선을 마주했다. 
여름 내도록 질리게 봐 온 얼굴이지만, 처음 만난 날의 영혼까지 보고 있는 듯한 눈동자는 간만이었다. 두 번째인데도 어색하지 않았다. 도리어 친숙하게까지 느껴졌다. 계속 그렇게 응시 당하며 산 것처럼 말이다. 
녀석의 반듯한 이목구비가 한 눈에 들어오고 녀석의 눈동자에 내 얼굴만 떠 있는 것이 엄청 부끄러워졌다. 언제 간지러웠냐 싶게 멀쩡해진 얼굴이 뜨거워졌다. 

"어? 니 열난다."
"알아. 놔. 이제 괜찮아."
"진짜로 괜찮나?"
"괜찮다니까."

치워내지 않으면 끝까지 비키지 않을 것처럼 보이는 철수의 손을 밀어내자, 철수와 나 사이에  침묵이 흘렀다. 방금 그건 남자와 여자 사이였다면 분명 연인 관계에서나 가능한 행동이었다. 
집에서 아버지와 어머니가 눈앞에서 시범을 자주 보인 덕에 스킨쉽이 낯설지는 않았지만, 그게 막상 내 일이 되고 보니 심하게 떨렸다. 
상대가 남자인데도 말이다. 어라, 이거 비정상 아닌가? 
상대가 남자인데 왜 떨릴까? 
그러나저러나 이 녀석은 남자를 상대로 그런 닭살스러운 짓을 해도 아무렇지도 않은가?

"너…."
"와?"
"아니다, 됐다."

별 것도 아닌데 혼자 이상하게 생각하는 거겠지.

"집에 할매 뿐이다."
"부모님은?"
"겨울 방학이니까."
"흠, 그렇구나. 너도 고생한다."

내가 본 철수의 부모님이 금실이 좋았던 건 아니지만, 부부동반으로 자식이 방학하자마자 떠나는 것에 대한 다른 어떤 이유도 생각할 수 없는 나로서는 철수에게 동병상련을 느꼈다.

"다른 사람은 다 어때?"
"잘 지낸다. 영희는 무슨 영어 학습지에서 미국 여행 간다고 갔고, 미스 장은 현재 논술 준비한다고 학원 다니고 있고, 철진 형은 영희 따라 미국 갔어."
"영희 따라?"
"철진 형이 영희한테 유별나게 군다아이가. 그 못생긴 애한테 대체 무슨 일이 생긴다고, 참, 암튼 콩까풀이 씌여도 단단히 씌였지."
"부모님 대신?"
"응. 뭐, 두 사람이 간다고 했어도 따라가려고 했겠지만."
"철진 형이?"
"응."
"와?"
"아니, 난 미스 장 철진 형과 사귀는 줄 알았거든."
"두 사람이 사겨? 그냥 미스 장이 철진 형을 좋아하는 기지."
"그렇구나."
"와? 니 미스 장한테 관심 있나?"
"관심은 무슨. 그냥 그랬다는 거지."
"그란데 와 그리 놀라노. 말은 그래도 진짜 관심 있었던 거 아이가?"

은근히 찔러보는 말투에서 점점 따지는 투로 변한 철수의 말이 신경에 거슬렸다. 오해에 기분 좋을 사람은 세상이 아무도 없는 법이다.

"너야말로 미스 장한테 관심 있는 거 아니야? 왜 눈에 쌍심지를 켜고 난리냐? 사실대로 말해봐, 너 미스 장 좋아하지?"
"난 너 좋아하는데?"

녀석의 성질을 조금 건드려볼까 싶어서 한 소리에, 철수가 툭 하고 청천벽력 같은 소리를 내뱉었다.

"아저씨, 됐스요. 여기서 세워주이소."

철수는 퍼런색 만 원짜리 지폐를 아무렇지도 않게 내고는 잔돈도 받지 않고 차 문을 닫았다. 
집까지는 아직 더 가야하지만, 나도 제정신이 아닌 터라 철수를 말리지 못했다. 
언제 내 무릎에 있던 책가방까지 가지고 갔는지 철수의 양쪽 어깨에 각각 내 책가방과 여행가방이 걸려 있었다. 
숨을 몰아쉴 때마다 입가에 하얀 김이 서리는 것을 철수의 얼굴이 긴장으로 굳어져 있어서, 나는 가방 하나를 달라는 말조차도 쉽게 건네지 못하고 철수의 옆을 걸었다.

"내 생각 많이 했다."
"…?"
"니도 눈치챘는지 모르겠지만, 우리 집에서는 내 미스 장이랑 결혼시킬라고 한다. 우리 집, 왕년에 정치인들 뒷 배경 잡아주던 폭력배 했었다. 물론 지금도 힘을 쓰기는 하지만, 엄연히 정상적인 사업으로 하고 있다. 내는 니가 좋다. 여름에 니 보내고 나서, 진짜로 생각 많이 했다."

걸음을 멈추지도 않고 옆에서 멍하게 따라 걷고 있는 나를 바로 보려고도 하지 않는 철수가 담담하게 말했다.

"너… 너…."

빨갛게 물든 저 볼이 단순히 추위 때문이 아니라는 것이 충격이어서, 나는 그대로 걸음을 멈추었다.

"진짜다. 남들은 이런 기분을 사랑이라 카든데, 진짜로 그건지는 모리겠지만, 아무튼 나는 니가 참 좋다."

나를 따라 멈춘 철수의 담담한 말에 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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